“특히 실물과 꼭 같게 그리는 초상화에 뛰어나서 위 아래로 백년 사이에
이런 그림은 다시 없었다.(尤長於傳神寫照 上下百年無此筆也)”
- 조희룡의 『호산외기壺山外記』‘이재관전李在寬傳’에서
국내에서 이재관(李在寬, 1783-1837경, 자는 원강元綱, 호는 소당小塘)
에 대한 첫 석사논문이 나온지 30년 가까이 되었다.* 강산이 3번이나 바뀔
만큼 세월이 흘렀지만 그동안 이 논문에서 언급한 것 외에 소당의 작품은
불과 몇 점만이 더 알려졌을 뿐이다.
미술품 경매에 나온 것과 서울의 한 전시에 출품된 작품, 뒤에서 다시
언급할 <전다煎茶> 와 같이 산수인물화의 범주에 들어갈 한두 점만
있을뿐 이렇다할 새로운 작품의 발굴은 없었다. 이는 우리 옛
그림이 안고 있는 수적인 열세라고도 할 피할 수 없는 조건 때문에 생긴
당연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국립중앙박물관은 물론, 개인 화랑
등에서 개최한 조선회화에 관련된 기획전을 통해 기존에 사진으로만
알려진 그림이 공개되거나 또 단독 작품 혹은 대련對聯으로
생각되었던 족자 그림이 각각 독립된 것들이 아니라 어느 한 병풍에
속했던 사실이 새로 밝혀지게 되었다.
우선 그에 대해서 조금 살펴보면, 소당 이재관은 ‘조선의 화선畵仙이라
불리우는 김홍도와 마찬가지로 대물림한 화원 집안의 후손은 아니다. 또
일정한 스승 밑에서 본격적인 그림 수업을 받을 기회도 없었다. 일찍
부친을 여의고 모친 봉양을 위해 붓을 잡아 타고난 재주로 일가一家를 이룬
화원이다.
그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조희룡(趙熙龍, 1789-1866, 호는 우봉又峰)이
지은 저술『호산외사』에 힘입은 바가 크다.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가장 나이 많은 제자인 우봉이 지은 이 책은 달리 『호산외기壺山外記』
로도 불리우는데 당시 여러 분야에서 이름을 남긴 중인들의 활약상을 밝혀
역사서로 의미도 크다.** 여기에 소당에 관한 글인 ‘이재관전’이 들어 있다.
이 글을 보면 1837년 태조의 초상화가 도적에게 훼손당했을 때 이를 다시
그렸다고 하고 또 동래의 왜관을 통해 그가 그린 그림, 특히 새나 짐승 그림은
해마다 일본에 많이 건너갔다고 한다.
당시 이처럼 많은 작업을 한 듯하나 오늘날 알려져 있는 그의 작품은 조선
후기에 활동한 화가치고는 결코 많은 수가 아닌 30여 점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들 작품을 보면 『호산외기』에서 말한 것처럼 산수, 인물, 영모(翎毛,
깃털과 털을 가리키는 말로 새나 짐승 그림을 가리킨다), 초충, 어해(새나
게를 그린 그림), 불화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면에 두루 능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들 그림은 하나같이 일정 수준을 갖추고 반면 태작(駄作, 솜씨가
서투른 작품)이 적어 19세기 전반의 조선 화단에서 그의 위상을 짐작해볼
수 있게 한다. 아울러 이들은 크기와는 상관없이 그의 필치임을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개성적이며 독자적인 화풍을 보인다.
<약산진영>, 견본채색, 63.9x40.3cm, 국립중앙박물관
<천지석벽天池石壁>과, 해외에 소개된「한국미술5천년」에 출품된
보물 1485호 <약산진영若山眞影>에는 추사가 화면 내에 제시題詩를
남기고 있어 그에 대한 성가를 짐작케 한다. <약산 진영>은 강세황
(姜世晃, 1713-1791 호는 표암豹菴)의 손자인 강이오(姜彛五, 1788-
1857)를 그린 명품으로 이는 1836년에 그린 태조 어진 등과 함께 그의
초상화 솜씨도 잘 말해주는 작품이다.
<귀어歸漁>, 1837년, 지본담채, 26.6x33.5cm, 개인
또한 표암의 후손 강덕인姜德仁 구장인 <귀어歸漁>가 포함된 8폭『
산수첩』이 보여주듯 담청과 담황의 맑은 설채設彩로 담백함과 여유로운
구성은 그가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畫風의 산수화에도 빼어났음을
보여준다.
<쌍작보희雙鵲報喜>, 지본담채, 37.5x68.0cm, 간송미술관
영모에 대해서는 일본인들의 수요가 높아 동래의 왜관을 통해 이를 매년
구입해 간 사실처럼 간송미술관 소장의 <쌍작보희雙鵲報喜>와 이홍근
(李洪根, 1900-1980) 선생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전칭작인 10폭
<영모병>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송하선인松下仙人> <파초하선인芭蕉下仙人>
각 139.4x66.7cm, 국립중앙박물관
그런데 이런 작품 가운데 그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은 <송하선인
松下仙人>과 <파초하선인芭蕉下仙人> 두점이다. 이 두 점은 비슷한 크기
에 유명한 옛 일화를 그리고 있어 쌍폭으로 된 대련이 것처럼 보기가 쉽다.
내용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송하선인>에 적혀 있는 제시는 당나라때
시불詩佛로 불렸던운 왕유(王維, 699-759)의 칠언절구 마지막 구로
그림은 세상사에 초연한 은사의 모습을 담고 있다. <파초하선인>에
그려진 주인공은 당나라때 글씨로 유명한 회소(懷素, 725-785)이다.
그림 속에서 그는 동자를 거느린 고사 복색의 인물로 묘사되고 있으나 법명이
회소인 승려로 속성은 전錢이다. 미친 듯이 휘갈겨 쓰는 초서라고 해서
광초狂草로 불리는 장르에 뛰어났는데 집이 가난해 종이 대신 파초 잎에
글씨를 썼고 또 글씨 연습을 위해 간 먹물로 엿못물이 온통 검어졌다는
고사를 남기고 있다.
<현명弦鳴> <여협女俠> <취황吹篁> <작시作詩>
각 139.4x66.7cm 국립중앙박물관
이 두 그림은 1972년에 열린 「한국명화근5백년」
(1972.11.14-12.22)에 쌍폭처럼 나란히 소개되었으나 실상은
다르다. 이 두 점은 궁중의 사녀들이 시를 짓고, 생황을
불고, 검무를 추며 말을 타는 <작시 作詩><취황吹篁>,<여협女俠>,
<명현鳴弦> 등 2점과 함께 일괄해서 박물관에 들어왔다.
(유물번호 德 6429) 인수 당시는 모두 표구기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으나 이후 1978년 모두 족자로 꾸며졌다.
이들 그림은 특별전과 상설전시를 통해 여러번 공개되었는데
6폭 모두가 한 공간서 전시된 것은 1972년이며 그 외에는 외국의 순회
전이나 광주와 춘천 등지의 국립박물관에서 2점씩 전시된 적이 있다.
이 작품은 전체로 보면 남자들을 다룬 그림이 둘이며 여자를
다룬 작품이 넷인 점에 남성을 주인공으로 한 다른 2폭이 더 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그림의 규모를 볼 때 6폭일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특히 여자쪽을 그린 그림에는 김홍도의 그림을 보는
듯이 옷자락이 날리는 오대당풍吳帶當風식의 자신감 넘치고 활달한
필치가 돋보인다.
*박희련朴希蓮 「소당 이재관小塘 李在寬의 생애生涯와 회화연구繪畫硏究」,
홍익대 1983.11
**이기백李基白 「19세기 한국사학의 새 양상」,『한우근박사정년기념
사학논총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1981.1)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금원선생님: 안녕 하세요? 이렇게 오셔서 읽어 주시고 댓글까지 올려 주심에 고맙고 감사합니다. 언제나 행복 하시구요. 건필 하세요. *^^*
송정선생님, 안녕하세요? 고귀한 작품을 잘 보았습니다. 배움의 기회를 마련 해 주신 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귀한작품 잘보았읍니다,_()_
귀한 작품 볼 기회를 주셨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