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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시키시는 하나님 (룻1:1-5)
뉴욕의 한 호텔 여종업원이 어느 날 다음 투숙객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자 객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방에는 한 손님이 자살한 채로 누웠었고 그 곳에는 다음과 같은 유서가 있었습니다. “나는 이 사회에 좋지 못한 예를 남기고 떠난다. 나의 친구들에게는 삶을 낭비한 기억을 남기고 떠나며, 나의 부모님께는 그들이 노년에 감당하기 어려운 큰 슬픔을 남기고 떠난다. 나의 아내에게는 마음에 상처를 남기고 떠나며, 자녀들에게는 술주정뱅이와 자살자의 이름을 남기고 떠난다. 그리고 하나님께는 그 분의 자비를 모독한 한 잃어버린 영혼을 남기고 떠난다.” 참으로 불쌍한 인생의 모습입니다. 이 사람은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하고 괴로움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부끄러운 인생을 자살로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 살고 있던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을 떠나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비신앙적이며 무질서하고 암담한 사사시대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흉년을 내리심은 의미 없는 일이 아닌데도 엘리멜렉과 그의 가족들은 그 땅을 떠나가기만 하면 어려움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영을 따른 자들이 아니요 육으로 살아가는 불신자들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롬8:5-8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거기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풍년의 기쁨보다는 “마라” 즉 괴로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들레헴의 흉년보다 더 큰 환난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들의 문제로부터 도망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 즉 유다는 기근을 당하였습니다. 출애굽 세대가 사라진 이스라엘은 이방과 접촉하며 여호와 신앙이 점점 이방 우상의 신앙과 동화되어 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백성을 징계하시어 여호와 신앙으로 돌이키기 위하여 유다에 기근을 내리신 것입니다. 이 흉년은 구속사의 아름다운 등불과 같은 은총이요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타락한 나오미의 가족들은 짐을 싸서 그 문제들을 피하고자 모압 땅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근보다 더 큰 문제에 직면합니다. 즉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은 것입니다. 집안의 가장의 죽음은 곧 그 가정의 파멸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실을 깨달았으면 나오미는 아들들을 데리고 유다 땅으로 돌아와야 했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이방 땅에 머물렀습니다. 그들이 거기 거한 지 10년 만에 두 아들 말론과 기론이 다 죽어 버린 것입니다.
엘리멜렉 가정은 버려서는 안 될 기업을 버리고 이방을 찾아갔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즉 그들에게 환난을 주심으로 회개할 기회를 계속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 환난은 집안 남자의 모든 목숨을 거두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결혼한 사람이 자식이 죽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나오미는 그제야 모든 고난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깨닫고 이방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일어납니다. 마치 아버지를 떠난 탕자가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방불하게 합니다. 그녀는 그의 두 자부를 그들의 집으로 돌려보내려 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면 그녀가 하나님께 불순종한 사실의 증인이 될까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나오미는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나오미의 마음은 괴로웠습니다. 나오미란 이름의 뜻은 희락, 기쁨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모든 희락은 떠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알아보는 베들레헴 사람들에게 자기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마라라는 이름은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악취를 막기 위해 사용했던 몰약의 어원에서 나온 것입니다.
*룻1: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나오미의 귀향 소식을 전해들은 베들레헴 성읍은 떠들썩하였습니다. 그것은 부요한 세상으로 갔던 사람이 모든 것을 잃고 빈털터리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재산뿐만 아니라 사람까지 다 잃은 나오미의 비참한 지경이 그들의 화제 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나오미는 자기에게 나아온 사람들에게 자기의 이름을 ‘즐거움’이라 부르지 말고 마라 즉 쓴맛이라고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이는 고난의 쓴맛을 본 후 그녀가 체험했던 하나님께 대한 회개의 심정일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신의 고통스러운 심정에 대한 토로의 고백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지만 이 징계를 통해 연단을 받은 후에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그들은 홍해를 건너 수르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3일 동안 물을 찾아 헤매었는데 그러다가 만난 곳이 마라였습니다. 이 이름은 그곳의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입니다. 430년의 종살이를 청산하고 애굽을 탈출했고 육지 같이 건넌 홍해의 감격을 춤추고 노래한 지가 불과 사흘 전입니다. 삼십 일도 아니고 사흘이라는 짧은 기간입니다. 그런데 광야라는 메마른 현실에 봉착하자 이스라엘은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겨우 사흘 만에 축제는 원망으로 변했습니다. 애굽만 벗어나면 만사가 형통할 것 같았는데 막상 사흘이 지나서 목마름이라는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겨우 물을 발견했건만 이게 웬일입니까. 먹지 못할 쓴 물이라니.. 차라리 찾지 않은 것만 못합니다. 애굽에서는 비록 종살이지만 나일 강물은 마음껏 마실 수 있었습니다. 여우를 피했더니 호랑이를 만난 격입니다. 광야의 독소 마라는 이스라엘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공통된 괴로움입니다.
우리는 내 마음의 악함을 알고 경악하기도 하고, 동료 신자들의 냉정한 인간성에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이번만은” 하고 굳게 믿었던 일에 낭패를 만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도 마라가 있습니다. 차라리 나일 강 같은 억압과 노예의 세상이 쓰디쓴 광야의 자유보다 후하지 않았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까. 차라리 그리스도를 몰랐을 때가 더 자유롭고 형통하지 않았습니까. 물이 없습니다. 포도주를 달라는 것도 아니고, 우유를 달라고 한 것도 아닙니다. 물은 사치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가장 흔한 것이 물이지만 물이 없으면 죽습니다. 더구나 뜨거운 태양 아래 물은 생존을 결정짓는 가장 시급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장 시급한 것에 손을 대셨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생존의 문제에 그야말로 뼈와 살에 손을 댄 것입니다.
*욥2:4-5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뼈와 살에 손을 대십니다.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우리 손이 닿지 못하는 곳에 두도록 하시고 뺏어가기도 하십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열심히 주의 일을 하려고 했는데, 죽을 지경이 되도록 만드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항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그렇게 무자비하고 냉정하신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결코 자기 자녀를 데리고 장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분명한 목적과 계획이 없이 우리 삶을 어지럽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늘의 쓴 물을 통해 내일의 단 물이 정말 달고 감사한 것을 알게 하십니다. 우리는 거저 받은 것에는 좀처럼 자신의 애정을 쏟지 않습니다. 오히려 애써 얻은 것에 깊은 애착을 가지며 그것을 준 사람에게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생각하시기 때문에 순례자의 괴로움을 알게 하시고 그 가운데 살아가는 비결도 알게 하십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요 수학자인 파스칼은 말하기를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생각해 보지도 않고 무조건 원망했습니다. 물이 없다. 무엇을 마시라는 거냐. 마구 원망을 퍼부었습니다. 불의한 애굽의 바로를 피해 왔는데 더 큰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원망의 대상을 찾기 마련입니다. “너 때문에”라고 할 만한 것을 찾아 좀 퍼붓고 나면 속이 시원할 것도 같습니다. 그러다가 최종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스라엘은 마라를 앞에 두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모세가 자기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했고 바로의 분노를 사게 했으니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가라해서 왔는데 모세가 어떡합니까. 그러나 실상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을 원망한 것입니다. 개가 주인보다 지팡이를 물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문제들로부터 도망할까요. 그것은 믿음으로서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압에서의 삶과 베들레헴의 삶을 오직 인간적인 관점에서만 비교하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베들레헴은 굶주림과 고통만 보였지만 그들의 눈에 모압은 풍부함의 땅으로 비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의 결정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모압은 이방 땅이요, 모압 사람들은 거짓 신을 숭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원수들이었습니다. 암몬 족속과 모압 족속은 근친상간 행위로 얻은 롯의 후손들이었습니다. 롯이 소돔에서 구출 되었을 때 그와 그의 딸들은 동굴에서 살았습니다. 그의 딸들은 아비에게 술이 마시고 취하게 한 후 인사불성이 된 아비와 동침하였습니다. 롯의 딸들에게서 태어난 롯의 아들들인 암몬과 모압이 그들의 조상이 되었고, 이 나라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신23:3 암몬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나오미와 그의 가족은 약속의 땅을 떠나 원수의 품에 의존하며, 원수들과 함께 살고자 하나님 곁을 떠난 것입니다. 베들레헴이란 이름은 떡집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유다는 찬양의 뜻이 있고 에브라다는 수확이 많다.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베들레헴 에브라다’ 라고 불리웠습니다. 이 나오미의 가정이 “수확이 많은 떡집”에서 본 것은 오직 기근과 메마름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불평의 소리는 찬양의 땅에 가득했습니다.
엘리멜렉은 나오미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일은 바로 이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것만을 따라 살고 믿음으로 살지 않는다면 이러한 곤란한 상황은 여러분들에게 절망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며, 도망하는 것만이 가장 최선의 해결책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들은 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 만일 자신의 백성이 자기를 순종한다면 그들에게 복을 내리시겠다고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28장에 순종과 불순종에 대한 축복과 경고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주신 기근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연단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께 온전히 순종한다면 하나님은 곡식과 햇빛과 비와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백성들은 기근 시에 도망하는 대신에 오히려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선 살고 보자” “우선 잘 먹고 잘 살고 보자”라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곳에서 풍족하고 만족한 육신적 삶을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굶주리기 원합니다. 사단이 예수님께 가지고 온 첫 번째 시험은 영과 육 사이의 선택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광야에서 금식하시며 사십일을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몹시 주리셨습니다. 사단이 말합니다. “그대가 굶주렸으니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시오” 그 때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하셨더라면 예수께서 천 번이라도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단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밖에서 자신의 필요를 채움 받을 수 있는 그 시험에 미혹당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사탄의 단 한 번의 미혹에 빠지게 되면 영원히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히12:16-17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명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이것이 바로 에서가 범한 실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장자권을 경홀히 여겼습니다. 그는 그의 생애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하기에 앞서 육신의 욕구를 채우기에 바빴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영적인 것보다 육적인 욕구에 앞서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여러분 자신을 기쁘게 하는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기보다 자신의 안일과 기쁨만을 염두에 두셨다면 오늘날 주님은 어떻게 되셨으며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사들이 통치하던 때에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고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습니다. 나오미와 그의 가족들은 무질서한 시대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 시대의 인기 있는 구호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못하겠는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의 상황이 어렵게 되었을 때 나오미와 그의 가족들은 세 가지 잘못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베들레헴을 떠날 결정을 했습니다. 축복의 땅을 떠나가기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에 반기를 든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들은 모압으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하필이면 이방을 선택했습니다. 가나안 땅 전체에 흉년이 든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 안에 다른 지역도 많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모압입니까. 세 번째로, 남편 엘리멜렉이 죽은 후 나오미는 그 두 아들들이 모압 여인과 결혼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율법에는 이방 사람과 결혼하지 못하도록 엄히 규정하고 있지만 저들은 그것을 무시하고 스스로 모압 사람과 하나 되기를 자청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문제 역시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세상을 본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로부터 도망할 때 우리는 주님을 위하지 않고 세상을 위해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문제의 참된 근원, 즉 그들 자신의 마음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나오미와 엘리멜렉은 그들의 두 아들과 모압으로 내려갈 때 그들의 문제까지도 가지고 갔습니다. 그들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그들의 마음은 영적으로 퇴보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보다도 더 나은 일을 스스로 할 수 있고, 또 자신의 삶도 스스로 영위하며, 조종할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모든 문제의 핵심은 내 마음에 있습니다. 우리는 환경을 탓하고 또 하나님을 탓하기 조차 합니다. 그러나 문제의 근원을 추적해 보면 탓해야할 대상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을 의심하였고, 말씀에 불순종 하였으며, 하나님의 뜻 대신에 세상과 육신을 우선으로 따랐습니다. 그리고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이 도망갈 때 우리의 죄 된 마음이 우리를 도망가도록 허용했다고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도망칠 수 없는 이유이며, 우리들이 도망갈 때 문제를 확대시키는 이유입니다. 우리들은 새로운 장소에, 새로운 환경에 있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들은 옛날과 똑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똑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게 될 것입니다.
나오미와 그의 가족은 베들레헴에서 모압까지 약 80km쯤 여행했습니다. 그 여행은 그들을 하나님의 뜻 밖으로 멀리 떼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잠시 동안만 모압에 살기로 작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10년이나 머물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은 퇴색해 버렸습니다. 풍성한 열매를 맺던 모압의 밭들은 나오미의 남편과 두 아들의 매장지로 변했습니다. 소망을 갖는 대신 나오미는 소망이 없는 절망의 여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녀가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이 가족들에게 필요한 연단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항한 것에 대한 대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었습니다.
마라에서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에 모세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때문이라고 발뺌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어리석음을 꾸짖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의 원망을 하나님께로 들고 갔습니다. 써서 먹을 수 없는 물을 달게 하는 약은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늘 약국을 바라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나온 것이니 하나님께서 해결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무 하나를 보여 주십니다.
*출15: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모세는 즉시 지시한 나무를 잡았습니다. 하나님의 답을 지체하지 않고 시행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즉시 시행해야 합니다. 특히 어려울 때 하나님의 주시는 말씀을 의심 없이 믿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나중으로 미루지 않고 아멘 해야 합니다. 붙들어야 합니다. 여호와의 치료의 말씀을 흘려보내서는 안 됩니다. 그 나무는 살아있는 나무입니다. 그 나무에 해독제가 있었을까요. 그것을 논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요. 그 이유는 아라비아 땅은 거의 대부분이 사막 지역입니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물이 거의 없을 뿐 아니라 설령 있다 하더라도 거의 대부분이 쓴물입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빗물을 저장하여 그것을 식수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호와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습니다.
히스기야 왕의 병을 고칠 때 하나님은 음식으로 먹는 무화과 반죽을 사용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왕에게 ‘한 뭉치 무화과를 취하여 종처에 붙이면 왕이 나으리라.’고 하였고 히스기야 왕은 선지자의 말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고 순종하여 병을 기적적으로 고쳤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은 그리 맑지 않는 요단강으로 고쳤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선지자 엘리사의 말을 듣고 요단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잠그고 문둥병을 깨끗하게 고쳤습니다. 요단 강물은 민물입니다. 소금이 들어 있는 바닷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상처를 소독하거나 치료할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이 물로 하나님은 불치의 병인 문둥병을 고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흉년이 들어 선지학교의 생도들이 굶었을 때 엘리사 선지자는 생도들이 구해온 야등 식물에 독이 있음을 알고 가루를 가져다가 솥에 넣어 국을 해독하였습니다. 이런 경우에 무화과에 치료의 약이 들어 있었다거나 요단강물에 소독제가 있었다거나 밀가루에 해독제가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 말씀으로 우리를 치료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정한 나무는 단지 도구만이 아니라 생명나무의 예표입니다. 나무를 물에 던질 때에 물이 달아졌습니다. 사망의 물이 생명수로 바뀐 것입니다. 사람이 먹고 마실 수 있는 물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만이 실망을 희망으로 만들어 줍니다. 괴로움을 기쁨으로 만들어 줍니다. 나의 눈물을 샘의 곳이 되게 합니다. 십자가는 모든 것을 치료합니다. 이스라엘은 마라의 연속입니다. 끝없는 목마름, 만나, 적병들, 요단의 범람, 그리고 죄의 마라. 끝없는 마라의 연속은 끊임없는 하나님의 개입이요 은혜의 치료입니다.
*룻4: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가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오벳의 뜻은 섬기는 자, 봉양하는 자 라는 뜻으로 나오미의 노후 생활을 돌보아 줄 봉양자 즉 손자가 생겼다는 뜻입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소망이 없던 그녀에게 하나님께서 마라 대신에 기쁨을 주신 것입니다. 그녀의 이름을 다시 나오미 즉 기쁨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라의 나무는 선교에 적용됩니다. “나는 치료하는 하나님이라” 여기에 사랑과 인애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재난과 원통함 뿐입니다. 전쟁으로 죽어가는 나라. 무지한 미신으로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 가는 민족. 아담의 자손들은 아직도 재난에 떨고 배고파서 울고 소망이 없이 슬퍼합니다. 이방 민족은 이 치유의 나무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십자가에 어떤 능력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십자가에는 위로와 치료와 소망과 기쁨이 있습니다. 희락이 있습니다. 쓴 물을 달게 하는 나무를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들고 죄의 마라와 인생의 필연적인 마라가 있는 곳에 가야 합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선교하는 자는 선교의 심령을 가져야 합니다. 우선 자신이 먼저 생명나무의 치료와 위로,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라가 달아져야 합니다. 그럴 때 슬프고 배고픈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마라를 마라인 채로 가지고 있으면서 고통스러워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지시한 해결책을 붙잡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라가 변하여 이웃을 돌아보기는커녕 자신의 문제에만 급급하지는 않습니까. 마라가 끝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삶을 치료하고 선교의 심장을 가진 자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다 같이 선교에 동참하여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고 영광을 예수님께 돌리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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