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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그룹 셀모임 왜 필요합니까?
220814(주일오후)
마 4:18-22
성경을 읽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이, 수천 수만명이 아닌, 단지 소그룹인 12명만의 제자를 택하신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예수님은 왜 더 많은 사람들을 부르시지 않고, 단지 12명만을 제자로 삼아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으셨을까요?
태초부터 시작된 공동체들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를 마치신 후에는 대단히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혼자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인 여자를 창조하셨고, 이로써 인류 최초의 가정이 탄생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이 세상 가운데 만드신 최초의 공동체는 바로 가정입니다. 그런데 그 가정 이전에 이미 또 하나의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그 공동체는 하나님 아버지,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님, 그리고 영이신 성령 하나님이 이룬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이렇듯 세 분이면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하나로 존재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삼위일체”라 부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존재 방식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신 말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혼자서 존재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삼위일체라는 공동체적 존재 방식을 가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거나 친밀한 관계에 대한 그리움이 존재하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이 친밀함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공동체나 소그룹을 선택할 때 다음과 같은 것들을 염두하고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첫째, 소속감입니다. '나는 여기에 속해 있는가?'라고 질문하며 '내가 여기에 속할 것인가?'를 결정합니다.
둘째, 존재감입니다. 이 명제에 대한 질문은 '나는 여기에서 어떤 존재인가?'이며 '사람들이 나를 받아 주고 인정해 주는가?'를 확인합니다.
셋째, 사명감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명제와 질문은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청소년들은 가정 안에서 자신의 어떠함을 확인하기 위해 이런 물음 앞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학교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소속감, 존재감, 사명감'에 따라 자신의 시간과 물질, 에너지를 투자하며 만족감을 찾습니다.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목적'을 가지고 '~을 함께 추구하는 모임'을 가리켜 공동체(Community)라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과 부활의 능력 가운데 세워진 하나님의 가족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님 때문에 서로 사랑하고 그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역할을 하는 공동체입니다. 여기에도 '소속감, 존재감, 사명감'이라는 명제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 내가 예수님의 피 값으로 죄를 용서받고 예수님을 사랑하면 교회에 소속된 것이고,
- 내가 교회의 성도들을 사랑하고 섬기면 그것이 나의 존재감이며,
- 또 내가 그런 기쁨을 주신 예수님을 세상에 나가서 전하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명을 갖게 된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한 번도 다 함께 큰 건물에서 모인 적이 없습니다. 데살로니가나 예루살렘 등 각 지역에서 공동체성을 가지고 교회로서 존재한 것이죠. 이렇게 볼 때 초대 교회는 셀그룹의 전형입니다. 가정이나 큰 집에서 모여 서로 친밀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초대 교회에는 큰 능력이 있었습니다. 318년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에 공인되고, 396년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서 로마의 국교가 되기까지 기독교는 무려 300년 이상 온갖 핍박과 고난과 이단의 위협에 시달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 교회는 어느 시대보다도 강력하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국교화되면서 신앙이 관념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가 선택하는 신앙이 아니라 로마에 태어나면서 그리스도인이 되자 오히려 사람들은 문화적인 종교인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공동체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소속감, 존재감, 사명감'에 관한 질문에 진지하게 답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국교가 되어 버린 기독교는 여기에 답할 이유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기독교 공동체에서만 누릴 수 있는 관계에 대한 특별함과 애틋한 기쁨이 희미해집니다.
깨어짐과 하나 됨
인간이 죄를 지으면서 여러 관계가 깨졌습니다. 제일 먼저 파괴된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가정과 인간관계가 깨졌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회복되면 관계의 회복도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가정의 관계가 회복되면 주변 사람들과도 관계가 회복됩니다.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제일 필요한 것이 관계입니다. 동시에 가장 힘들어하는 것도 관계입니다.
이렇듯 사람이 관계에 몰두하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궁극적인 관계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서로를 두려워하고 불신하는 이유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고 서로를 두려워하게 된 사람들이 형성한 것이 바로 도시와 민족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이렇게 같은 목적을 가진 공동체를 만들었지만 그 안에서 서로를 괴롭힙니다. 그 안에서 끼리끼리 문화가 형성되어 다른 사람을 배척합니다.
그렇게 큰 무리가 모여서 하나님을 배척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바벨탑 사건입니다. 하나가 되긴 했지만 선한 목적을 위해서 하나가 된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 바벨탑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기 전까지 인류사에 이정표를 찍은 반역 사건입니다.
이러한 깨어짐의 역사를 거듭하던 인류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그의 택하신 제자들에게 ‘하나 됨'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미성숙했을 때는 하나로 부르신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누가 더 큰 자인가를 두고 다투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고 충고하셨습니다. 이 충고에는 교회의 하나 됨이라는 본질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중심이 된 예수 마을 공동체의 본질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주 안에서 하나 되어 서로 사랑하고, 밖으로는 그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 이것이 바로 교회됨의 본질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거치면서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외로움을 호소하게 되었습니다.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고 혼밥, 혼영 등 혼자 하는 것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로 인해 우울증에 걸리거나 자살자의 수도 늘어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니 우울해집니다. 관계는 시간의 투자요 인격을 대하는 것인데 온라인상에서 메시지나 콘텐츠 등을 주고 받으니 외로운 것입니다. 그러면서 점점 소극적인 사람이 되어 갑니다. 어느 공동체든 나를 인정해 주는 곳에 참여하고 싶지만, 그것마저 실패하고 두렵습니다.
우리나라는 분노 사회, 불신 사회로 치닫고 있습니다. 교회 역시 더 큰 영적인 시험대에 놓여 있습니다. 이렇게 개인은 원자화되고 사회는 불안하며 교회마저 안정적이지 않은 것 같은 이 시대, 우리는 무엇을 바라봐야 할까요? 또한 어디에서 해답을 찾아야 할까요?
모든 것을 예수님께 대입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이라면 이런 위기 상황을 어떻게 대처하셨을까?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을까? 위기의 순간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모범을 묵상하고 그것을 삶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유일한 대안이십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이 제시한 대안, '12제자 소그룹 셀모임의 비전'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제자를 부르시는 과정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역을 시작하시며 열두 명의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보잘 것 없는 어부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나마 12명 중 직업이 확실하게 알려진 사람은 반 정도밖에 안 됩니다. 물론 직업이 괜찮은 제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회적으로 왕따를 당하는 세리장 마태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개 내세울 것 없는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사용하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이제 그들을 부르시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주목하여 보시다
그 역사적인 첫 구절은 이렇습니다.
(마 4: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님이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를 만나는 이 장면에서 가슴이 뭉클해지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보시니'입니다. 여기의 ‘본다’는 헬라어 에이도(eido-)는 ‘관찰하다, 주목하다’라는 단어 호라오(horao-)에서 온 말입니다. 예수님은 해변을 거닐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물을 내려 물고기를 잡으려는 상황을 주목하여 보셨습니다.
(마 4: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여기에서도 동일하게 그물을 깁고 있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보시고'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구절에서 사용된 '보시니'는 단순히 '보시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주목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그들 삶의 모든 정황을 다 보셨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는 그들을 주목하여 보신 것입니다. 그렇게 주목하여 그들의 모든 것을 다 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실 때는 우리가 세상의 정상에 서 있을 때가 아닙니다. 우리가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을 때도 아닙니다. 소망이 없다고 느끼고 모든 것이 실패라고 느끼는 바로 그때, 가장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주목하십니다.
신약성경에는 '보시고'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중에서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눅 19:41) 라는 말씀에서는 멸망할 예루살렘 성을 미리 보고 우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보신다고 했을 때는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꿰뚫어 보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나의 미래는 물론 과거, 현재의 연약함까지 다 아십니다. 무엇보다 모든 죄를 다 아십니다. 그렇게 꿰뚫어 보아 다 아시면서도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을 보내신 그 사랑으로 말이죠. 우리가 밤새도록 바다에 그물을 내려도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있을 바로 그때, 사랑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부르시다
(마 4: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예수님이 보시고, 부르셨습니다. 소속감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와 안드레는 일전에도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침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났고 자기 형제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그들을 두 번째로 만나신 것이기에 아마도 그들의 이름을 불러 주셨을 것입니다.
이 부르심은 공동체나 소그룹을 선택할 때 염두에 두는 명제 중 하나인 소속감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나는 여기에 속해 있는가?, 나는 여기에 속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여기에 속하라고 부르십니다. 그분의 몸에,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이 불러 주신 제자들은 속할 곳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따르기가 쉬웠을지도 모릅니다. 버릴 것도 별로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를 따르라
세 번째로 우리 귀에 들어오는 구절은 '나를 따르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상황을 다 보고 우리의 상황이 어떠함을 아셨음에도 우리를 부르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그분을 따를 것을 요청하십니다.
(마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헬. duete opiso- mou ; Come, follow me)...』
이것은 프러포즈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고백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연인이 사랑을 고백하며 나와 함께 살자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나를 따르라'는 엄청난 주님의 선언입니다. 이 선언은 우리의 존재감과 관계있습니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는 본질적으로 '사람들이 나를 받아주고 인정해 주는가?'를 고민하는 질문입니다.
그 고민 앞에 예수님은 분명하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하고 내가 누구인지 몰라 방황할 때, 확신에 찬 음성으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래서 우리는 'We are the followers of Jesus Christ'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그리스도인'이 우리의 존재감이자 정체성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선언이 남아 있습니다.
(마 4:19) 『...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and I will make you fishers of men ...』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어부들에게 이렇게 선언하시며 사명감을 갖게 하십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너무나 소중한 초청이었습니다. 평생 배를 타며 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던 어부들을 이제는 물고기를 잡던 기술로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의 전도자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과거에 경험했던 것, 그것이 비록 상처와 실패라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그것을 다시 주워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역할 수 있는 도구로 만들어 주십니다. 이와 같이 고기를 낚던 사람들에게 '너희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는 말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선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만드셨고 그들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부들에게 이 위대한 영혼 구원에 대한 사명을 심어 주려고 애쓰셨습니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확인시켜 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12제자 소그룹 셀모임의 비전이 답인 이유
예수님은 이처럼 특별히 택한 열두 제자들에게 소속감과 존재감, 사명감을 심어 주려고 3년 동안 모든 것을 쏟아 부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 12명을 부르셨고, 그들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부으셨을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거대한 것을 생각하고 멋진 꿈을 그리며 방대한 비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만드시는 일에 고작 열두 명을 부르셨습니다.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든다면서 예수님은 왜 열두 명만 부르셨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열두 명으로 소그룹 공동체를 만드시고, 소속감, 존재감, 사명감에 관해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런데 왜 열두명일까요? 물론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의 12지파를 영적으로 새롭게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회적 의미도 있습니다. 많은 성경학자나 사회학자들에 따르면, 가장 효과적인 소그룹 인원은 12명을 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야 서로가 친밀하게 교제하고 관심을 가지며 리더 된 자도 효과적으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소그룹의 첫 번째 키는 '친밀함'입니다.
그리고 이 친밀함을 통하여 신뢰가 생기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나눔이 일어납니다. 이 나눔의 단계는 자신의 삶을 오픈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삶 가운데 드러난 죄와 허물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게 치부를 드러내도 여전히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며 함께 성장해 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전히 담대하게 그 은혜를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는 자보다는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사람이 사랑받는 곳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입니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기독교 공동체의 가장 위대한 점은 서로의 죄를 고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인생의 행복은 ~한 척해서가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발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초대 교회가 생겨나자 유대교에서 하지 않던 예식 두 가지가 새로 제정되었습니다. 침례식과 성찬식입니다. 침례식은 예수님을 믿는 증거로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의 죄가 예수의 보혈로 사해졌으며 이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겠다는 공개적인 고백입니다. 성찬식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가 모여서 죄를 고백하며 예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예식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과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독교 공동체의 비밀이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속감, 존재감, 사명감이 다 들어 있습니다. 서로의 허물과 죄, 아픔을 나누는 소그룹만큼 친밀한 관계는 세상에 없습니다.
기독교 소그룹 셀모임은 서로의 허물과 죄를 예수님의 보혈로 사하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거기에는 영혼들의 깊숙한 심령에 있는 아픔을 치료하시는 성령님의 임재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것을 행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요 20:19-23)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리고 거기에서 존재감과 소속감, 사명감을 확인하게 하셨습니다. 세상이 아닌 예수님께 속한 존재, 영혼을 구원하는 사명을 가진 자들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으로 세상에 나갈 때 세상이 예수의 제자 됨을 인정해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어디에도 속할 수 없고 존재감도 낮은 이들을 부르시고 따르게 하셔서 인류 역사를 구원하는 하나님 나라 사역에 동참하게 하셨습니다.
코로나 팬데믹과 같은 악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이 보여 주신 12제자의 소그룹 셀모임의 비전이 답인 이유는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외로움과 두려움, 절망에 찌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보다 두려움과 외로움에 사무쳐 있습니다. 서로 간의 신뢰감도 많이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께서 주신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장 연약할 때 우리를 보셨고, 우리가 가장 죄 가운데 있을 때 우리를 부르셨으며, 우리가 가장 실패 가운데 있을 때 우리를 따르라고 하시는 그 음성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럴 때 열두 제자처럼 우리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12제자 비전을 주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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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보잘 것 없는 어부들을 주목하여 보시고 부르신 후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사명을 주신 것처럼 주님은 코로나 시즌이라는 위기 가운데서 우리를 보시고 부르시며 사명을 깨닫게 하십니다.
공동체를 위한 기도
살아 계신 하나님,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에 속해 있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부족하지만 교회 안에서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존재감을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할 수 있는 사명감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그 사명을 가지고 한 영혼 한 영혼에게 다가가기 원하오니 용기와 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이 땅에 속한 수많은 교회들이 12제자 소그룹 셀모임의 비전을 세워가므로 이 땅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이 위기 가운데 일어나고 교회들을 붙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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