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윤동주 님,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呼吸)호흡이 남아있소.
한번도 손 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 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무서운 時間」전문
시인은 지금 시대의 질곡에 괴로워하며 칩거하고 있다. ‘손들어 표할 하늘도’없는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외부의 소리에 귀를 막으려 한다. 그런데도 자꾸 시인을 불러 시대와 역사에, 민족의 고통에 눈을 돌리게 하는 외부의 목소리는 집요하다.
모든 행동을 포기하고 호흡만 유지하고 있는 나를 역사의 전면으로, 행동의 자리로 불러내려는 저 무서운 소리 앞에 시인은 전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허무주의적 답변으로 대처하며 일제여 나를 부르지 마오. 라고 선언해 버린다.
「무서운 시간」에서는 외부세계와는 단절된 자아성찰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자화상」과는 달리 외부세계와의 요구 앞에서 무력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울었다.
우물 속에 살게된 사나이가 비로소 외부세계의 목소리를 만나게 된 것은 큰 변화로 시대와 상황의 변화 속에서 용기 없음이 일으키는 회의와 번민의 의식이 드러나면서 자신의 모습에 고뇌하고 반발하는 자아성찰의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즉 식민지 시대의 부정적인 현실에 대하여 일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부정하고 있다.
윤동주시인 독립운동 저항시 일제시대 : 무서운시간 해석- 내조국의 나약함은 나의 강인함이니.
https://youtu.be/2-mfYZz29oc?si=hDHzAWYqOpjmJVqX
[HERO영웅OST] 정성화-단지동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