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힘] 1부 힘든 시절 ⑨평생 약에 의존해야 하나
우울증의 핵심에는 불면(不眠)
셔터스톡
우울증은 발병 원인도 다양하고 이에 따른 치료도 환자별 맞춤형으로 진행돼야 한다. 일반 내과나 외과 질환보다 훨씬 세심한 분석이나 처방이 필요하다. 병원이나 의사 선정도 매우 중요하다.
환자의 병력 스토리를 잘 알고, 징후를 관심 있게 살펴주며, 심리적으로 신뢰감을 주는 의사를 선택해야 한다. 나아가 환자의 성격, 성장 과정 등 내면세계를 파악하고 있는 의사라야 제대로 진단과 치료를 할 수 있다.
그러나 환자 스스로 병을 인정하지 않거나 숨기려 들며, 설령 병원을 가더라도 주위와 충분한 상의 없이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정확한 진단이나 제대로 된 치료가 쉽지 않다. 자칫 약물 남용이나 오진 등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이럴 경우 환자의 상황은 더욱 나빠질 수 있다.
나 역시 그랬다. 우울증이 급속히 진행되는 데도 계속 버텼다. 약국에서 파는 수면제나 진정제도 먹지 않았다. 결국 공황발작을 겪고서야 병원을 가겠다고 마음먹게 됐다.
지인에게 물어물어 개인 정신과 병원을 찾았다. 서울 변두리의 낡은 상가 건물 2층에 위치한 병원에 들어서니 서너 사람이 앉아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심이 가득한 표정의 중년 아주머니, 백수로 보이는 20대 청년, 30대 초반 여성 등…. 다들 활기를 잃은 모습이었다. 나는 괜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원장이 몇 가지 테스트와 진찰을 마친 뒤 말했다.
“우울증인데 한 1년은 치료받아야 할 겁니다.”
그렇게 오래 치료받아야 한다니 선뜻 수긍하기 어려웠다.
“선생님은 그동안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바쁘게 살아왔습니다. 심신이 지친 것이죠. 이제 모든 걸 내려놓고 쉬세요.”
그의 말에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내 나이 이제 56세, 그런데 현역에서 물러나라니….
“무릎을 많이 쓰면 연골이 닳듯 머리와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뇌세포도 닳고 신경전달물질들이 원활히 공급되지 않으니 활동이 둔해지죠. 그래서 행복감을 높이는 신경전달물질을 인공적으로 공급해줘야 합니다.”
“그게 뭐죠?”
“세로토닌(serotonin)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편하게 하는 신경전달물질이죠. 우울증에 걸리면 뇌에서 세로토닌 분비량이 적어져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겁니다.”
내게는 완쾌 여부가 중요했다. 이 지긋지긋한 병을 고치지 못해 마음의 기운이 이렇게 다운된 채 평생 살아가야 한다면 정말 힘들 것 같았다.
“치료를 받으면 완쾌될 수 있나요?”
“이런 병은 어차피 완치란 없고…. 이젠 병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심드렁한 표정에 사무적 말투. 불치병을 선고하는 듯한 그의 태도에 매우 실망했다. 의사는 환자에게 따뜻한 신뢰와 애정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 환자는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고 그의 말에 따르게 된다. 그러나 이 의사는 내게 희망보다는 절망을 주었다.
의사는 일주일분의 수면제와 함께 세로토닌을 처방했다. 나는 의료보험 대신 일반 진료비로 치렀다. 의료보험으로 처리할 경우 진료 기록이 남아 혹시 나중에 무슨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우에서였다.
집에 와 약을 먹었다. 수면제 덕분에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난생처음 세로토닌을 먹은 기분은 묘했다. 내 정신이 마치 화학물질에 지배받는 듯한 느낌….
무엇이 진정한 내 자아일까.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어쨌든 약은 효력이 있었다. 머리도 맑아지고 맥박도 좋아졌으며 어두운 마음의 그늘도 걷혔다. 아랫배 통증도 사라졌다.
역시 잠이 보약이었다. 이틀을 내리 푹 자고 나니 딴 세상이 나타났다. 기운이 솟고 활력이 생겼다. 우울증의 핵심에는 불면(不眠)이 도사리고 있었다. 잠을 못 자서 24시간 심신이 쉬지 못해 상태가 갈수록 악화된 것이다. <계속>
남산 작가
출처 : 마음건강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