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916. 묵상글 (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 주님의 만찬과 자기 만찬. 등 )
----------------------------------------------------
24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9.16 04:14
- 주님의 만찬과 자기 만찬
“나는 여러분을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모임이 이익이 아니라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를 아주 따끔하게 야단칩니다.
코린토 교회가 분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코린토 교회는 아주 분열적인 교회입니다.
오늘은 11장의 말씀인데 3장에서도 바오로는 코린토의 분열을 꾸짖었지요.
바오로파니 아폴로파니 하며 교회가 갈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차원에서 분열을 꾸짖고 있습니다.
3장이 파당적인 분열이라면 11장은 그런 분열이 아니라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일방적으로 소외시킨 분열입니다.
부자들은 먹을 것을 많이 가져와 자기들끼리 배부르게 먹고,
가난한 이들은 아무것도 가져온 것 없어 굶주리고 있었지요.
교회 안에서마저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소외시킨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가난한 이들을 부자들이 업신여긴 것입니까?
재물이 없다고 사람을 업신여긴 곧 ’없이 여긴‘ 것입니다.
분명히 자기들과 함께 있는데도 없는 사람인 양 여긴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가난한 이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비참하게 만든 것입니까?
그렇다면 세속과 무엇이 다릅니까?
이런 공동체를 교회 공동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행위는 가난한 이를 부끄럽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이라고까지 바오로 사도는 꾸짖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사실 주님께서는 최후 심판 비유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한 것이 당신께 한 것이라고 하심으로
가난한 이들을 당신과 동일화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코린토 교회가 더 꾸지람 들어야 할 것은
자기의 만찬으로 주님의 만찬을 모독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현재 우리 번역에서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라고 된 것을 직역하면
‘식사 때 자기 만찬’이라는 뜻이고 따라서
주님의 만찬을 해야 할 공동체가 자기 만찬을 한다는 뜻입니다.
자기 만찬은 자기 집에서 먹어야 하고,
부자들의 만찬은 자기들끼리 먹어야 할 것을 굳이
교회 공동체 집회에서 함으로써 주님의 만찬 곧 성찬례를 모독한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몸과 피를 같이 나누어 모시는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자기가 싸 온 자기의 빵과 포도주를 마시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성찬례를 거행하면서 이러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겉으론 그렇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자기 만찬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같이 나누어 먹는다는 의식 없이 먹는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식사하고 싫어하는 사람하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찬례를 하면서 여전히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 사랑과 나눔에서 그를 배제하고 있다면 같이 주님의 만찬을 했어도
실은 자기 만찬을 한 것입니다.
주님의 만찬과 자기 만찬 가운데 나는 어떤 만찬을 하고 있습니까?
----------------------------------------------------
24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이 자매는 남편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세 자녀의 육아 대부분을 그녀 혼자 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리, 청소, 빨래, 아이들 숙제 도와주기, 아이들 등하교 운전 등 모조리 자기가 도맡아 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집 남편은 아이들과도 잘 놀아주고, 요리나 청소도 해주던데 자기 남편은 전혀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자매의 불만은 정당할까요?
그런데 남편의 건강이 안 좋아졌고,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계속 누워있으며 투병하는 남편을 통해, 이 자매는 불공평한 역할 분담을 다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아프기 전까지 잔업을 많이 하면서 넉넉한 수입을 가져다준 남편이었습니다. 또 고장난 집 안 수리는 늘 남편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프고 나서, 수입이 끊기고 청구서가 쌓여만 갔습니다. 여기에 고장난 가전제품에 막막해 하면서 남편이 이제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님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누가 더 일을 많이 하는지, 누가 더 힘든지, 또 옳은지 그른지를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상대방은 내가 해야 할 몫을 대신 해주는 고마운 존재임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다른 남편은 안 그런데, 다른 아내는 안 그런데….’라며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아내, 내 남편, 내 친구, 내 자녀, 내 부모…. 이 모두가 자기의 큰 몫을 대신해 주는 고마운 사람입니다. 그 고마움을 갖지 않으면 불평의 크기는 점점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과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몫을 대신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보고 있습니까? 이런 사람만이 감사의 삶, 기쁨의 삶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백인대장이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자기 노예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살려 달라는 청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가려고 하자, 친구들을 보내어서 이렇게 아룁니다.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루카 7.6.7)
한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종이 나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자기 몫을 대신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주님뿐이라는 믿음이기도 합니다. 그 결과는 백인대장의 뜻대로 노예가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면서 자기 행복의 크기를 잽니다. 그러나 이렇게 주님께 맡길 수 있는 사람은 굳이 그 크기를 재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서 충분히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오늘의 명언: 화가 나면 열까지 세고 상대를 죽이고 싶으면 백까지 세라(토머스 제퍼슨).
----------------------------------------------------
24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루카복음>에서는 이방인을 위한 최초의 이적을 베푸시는 장면입니다.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믿음이 있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지설교를 마치시고 가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을 때, 병들은 노예를 위한 백인대장의 청을 전하는 유다인 원로들의 말을 듣고 백인대장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백인대장의 친구들이 와서 백인대장의 말을 이렇게 전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루카 7,6-8)
이 말씀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군중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루카 7,9)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이 없는” 이방인임을 알았으며, 또한 자신이 군사력을 지닌 백인대장이지만 왕에게 속해 있듯이, “상관 밑에 매인 사람”, 자신이 누구에 속해 있는 지를 철저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깨달음, 곧 자신의 부족과 한계와 무능함과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 존재인가를 깨달은 데서, 한편으로는 ‘겸손’이 다른 한편으로는 ‘믿음’이 흘러나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 ‘밑에 매인 사람’인지를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에게 매여 있고 ‘속해 있는 종을 소중하게 여길 줄’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이 속한 분께서 자신을 소중히 여기실 것에 대한 믿음을 가졌고, 무엇보다도 그분의 말씀에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가 청한 것은 오로지 한 마디의 “말씀”뿐 이었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루카 7,7)
그는 말씀의 권능을 믿었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시어 은총을 입은’ 성모님처럼, ‘은총’을 입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백인대장’에게서 배웁니다. 우리의 무능과 나약함을! 그리고 주님께 속해 있는 존재임을! 그러나 그분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존재임을! 그러기에 우리 또한 주님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이들을 소중하게 여겨야 함을! 그리고 주님의 말씀의 권능을 믿고 의탁해야 함을!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루카 7,7)
주님!
당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게 하소서!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게 하소서!
머리 위에 계시되 누르지 않으시는 분, 당신을 머리 위에 두고 살게 하소서.
소유하시되 속박하지 않으시는 분, 당신께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아멘.
----------------------------------------------------
24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은 하느님의 능력을 만나는 기회
“저는 기도를 잘 하지 않습니다. 믿음도 부족합니다.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됩니다. 마음은 간절한데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기도를 하는 대로 들어 주신다면 매달려 보겠는데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일에나 성당을 찾는 발바닥 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하고 말씀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저를 두고 하는 말씀으로 알아들었습니다. 미사를 봉헌하고 성무일도를 바치는 것에 급급해하는 자신을 보면서 기도가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성경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대로 행함으로써 하느님을 체험하라고 강조하면서도 정작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루의 끝맺음에 서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 하나 못하고 후회하며 부끄러워합니다. ‘내일은 잘해야지’하고 결심하고서는 아무 의식도 없이 또 하루를 보냈습니다. 이러고서도 굳센 믿음의 소유자가 되길 바라고 있으니 뻔뻔합니다.
민수기 14장 28절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내가 살아있는 한, 너희가 내 귀에 대고 한 말에 따라,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그대로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간절한 청은 물론, 불평불만 하면서 뱉어버린 말도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 주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투덜대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내가 원하고 바라는 때가 아니라 당신이 보시기에 가장 좋은 때에 당신의 뜻을 이루어 주십니다. 따라서 오늘 이루어 주실 수도 있고, 내일 이루어 주실 수도 있으며 내 세대가 아니라 다음 세대에 이루어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저 믿고 때를 기다리며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백인대장은 자기 종이 병들어 죽게 되자 예수님께 ‘저는 제집에 주님을 모실 자격도 없고,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청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당신을 의심하는 고향 사람들 앞에서는 별로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지만(마태13,58), 믿음으로 준비된 사람에게는 당신 말씀의 능력이 살아났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하고 자신을 낮추는 그곳에서 큰 힘을 만났습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할 일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성체를 모실 때에도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하고 받아들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은 늘 작용합니다. 다만 내가 믿음으로 준비되지 못한 탓으로 그 능력을 체험하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의 능력은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습니다. 물론“예수님은 연민의 정신과 사랑의 정신으로, 때로는 그자가 믿든지 말든지 일방적으로 기적적인 역사를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편에서 신앙이 합쳐질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재창조 역사가 일어납니다”(김정원신부). 그러니 열린 마음과 겸손으로 그분의 능력을 믿고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구하는 바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대로 얻게 될 것입니다. 열매는 행동하는 데서 맛보게 됩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능력을 만나는 기회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24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88년 5월에 저는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했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복학하기 전까지 예비자 교리를 가르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중, 고등학생 반을 맡아서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12월에 세례식이 있었습니다. 학생 중의 한 명은 취직이 되었고, 첫 월급을 타는 날 제게 저녁을 사겠다고 했습니다. 5시에 ‘대학다방’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저는 약속을 잊어버리고 친구들과 천마산으로 등산을 갔습니다. 오후에 약속이 생각난 저는 부랴부랴 약속 장소로 갔습니다. 그러나 이미 시간은 10시가 넘었고, 다방 문도 닫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기에 연락할 수는 없었지만, 혹시나 하고, 다방 문을 열었습니다. 다방 한구석에 저를 기다리던 학생이 있었습니다. 학생은 제가 올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저를 끝까지 믿고 기다려준 학생에게 고맙기도 했고,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4년 뒤에 저는 그 친구가 근무하던 자동차 대리점에서 승용차를 샀습니다. 저를 믿고 끝까지 기다려주었던 친구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믿음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값싼 믿음과 진정한 믿음입니다. 값싼 믿음은 하느님과 거래하려는 믿음입니다. 마치 하느님을 자판기처럼 생각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에 따라서 상황이 바뀌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상황이 바뀌지 않으면 믿음마저 포기하는 것입니다. 나의 뜻대로 하느님이 변하기를 원하는 믿음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을 바라는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성공과 권력이 주어지기를 바라는 믿음입니다. 신앙이 본래 지닌 깊이와 진지함을 잃어버린 형태의 믿음이 값싼 믿음입니다. 이는 은혜를 값싸게 만들고, 회개나 변화 없이 하느님의 용서를 받으려 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값싼 믿음은 죄의 진정한 회개 없이 쉽게 용서받으려는 태도를 포함합니다. 값싼 믿음은 예수님의 희생과 십자가의 고난을 가볍게 여기고, 희생 없이 은혜만을 바라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값싼 믿음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무시하고, 자신의 삶에서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은전 서른 닢에 스승을 배반한 유다의 믿음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의 믿음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믿음입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주어지는 상황까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마리아는 그런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니 그리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남자를 모르는 처녀가 아이를 갖게 될 상황까지 받아들이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마리아가 받아들였던 상황은 약혼한 요셉에게 파혼당할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받아들였던 상황은 어쩌면 돌에 맞아 죽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믿음 때문에 마리아는 ‘성모 마리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3번이나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셨는지 예수님의 얼굴에는 피와 땀이 흘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고난의 잔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외롭게 죽어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었던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고난과 십자가를 받아들였던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참된 믿음은 신앙의 진정한 의미를 회복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삶을 변화시키는 깊은 헌신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백인대장은 참된 믿음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아픈 종을 보았고, 주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미 이런 모습만으로도 주님께 칭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백인대장은 주님께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주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그렇습니다. 참된 믿음은 신분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모든 이들에게서 오늘 것입니다.
----------------------------------------------------
24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성경을 읽다 보면 주님께서 어떤 특정 인물에게 믿음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는 표현을 썼던 여인도 떠오릅니다. 또한 나병이 나아 다시 감사의 인사를 하러 찾아온 ‘나아만’도 떠오릅니다.
오늘 복음은 이런 사람 중 한 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백인대장은 주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제 밑에도 사람이 있어서 제가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갑니다. 그러니 주님, 한 말씀만 하십시오. 그럼, 저의 종이 낫겠습니다.’
백인대장의 이 고백은 참으로 엄청난 고백입니다. 백인대장의 고백 안에 들어 있는 의미는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병마와 죽음, 즉 저승까지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병마에게 가라고 하면 갈 것이고 오라고 하면 올 것입니다. 죽음에게 가라고 하면 갈 것이고 오라고 하면 올 것입니다. 주님, 당신은 그런 분이심을 저는 믿습니다.’
이렇게 백인대장은 주님께 고백한 것입니다.
갑자기 부끄럽습니다. 또한 한편으로 백인대장의 믿음과 고백이 부럽기도 합니다.
저를 포함해, 우리가 모두 이런 믿음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실제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자기중심적 백성이 아닌 주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
에스프레소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제 주변에도 참 많습니다.
언제부터 커피가 우리 삶의 중심에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이제 커피 없는 하루를 상상하기 힘든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사실, 저는 커피를 잘 모릅니다. 커피 면에서는 제가 좀 둔한 것 같습니다.
처음 에스프레소를 마신 것은 신학교 3학년 때입니다. 당시 주임 신부님께서 커피를 좋아하셨습니다. 방학하고 본당 생활을 시작하면 늘 사제관에서 커피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월요일 새벽 미사가 끝나면 빈속에 에스프레소를 마셨습니다. 그렇게 에스프레소를 마시면 오전 내내 속에서 커피향이 올라왔습니다. 제게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내 안에서 향기가 올라오는 신기한 경험을, 커피를 통해서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전부터 내 안에서는 향기가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 말입니다.
오늘도 제 안에서 그리고 그대 안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올라올 것입니다. 그 향기가 커피 향보다 더 진하고 강하고 풍미롭기를 기도합니다.
----------------------------------------------------
24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무엇이 주님을 감동시켜 치유케 하는가?
“겸손한 믿음”
겸손한 믿음이 지혜입니다. 겸손한 믿음이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입니다. 겸손한 믿음 또한 은총입니다. 겸손한 믿음이 주님을 감동시켜 치유에 이르게 합니다. 정말 청하고 싶은 은총이 겸손한 믿음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겸손한 믿음을 보여줍니다.
“좋은 것을 배울 때는 바람처럼 빠르게 하고, 허물을 고칠 때는 우레처럼 과감하게 하라.”<다산>
이런 이들이 겸손한 믿음을 지닌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어제 주일 삼종기도후 교황님의 짧은 강론중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네가 참으로 예수님을 알아간다면 모든 것은 변화한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참으로 주님을 알아갈 때 겸손한 믿음과 더불어 참나를 알게 되고 정화와 성화, 치유의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장거리, 장시간의 해외 사목 방문후에도 한결같이 쉴사이 없이 일상에 충실하십니다. 사목여행후 함께 했던 분의 요약글 끝부분도 감동적이며 깊은 깨우침을 줍니다. 이 또한 겸손한 믿음의 은총입니다.
“마지막으로 교황님 자체가 신비로웠다. 사람들은 아열대 기후의 나라들안에서 이런 긴 여정의 어려움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의아해 한다. 그 반대다. 그것은 ‘위에로의 여정’(an upward journey)이었다! 숱한 이동과 거리, 비행시간으로 날마다 피곤했던 대신, 그분은 힘을 얻었다(gained energy)! 그분은 다양한 나라의 젊은이들을 만났고, 수시로 준비했던 원고를 버렸고, 대화자들에 따라 대화 내용도 바꿨다. 자신의 영과 몸을 새롭게 하면서(refrsehing his spirit and body)! 88세 생신을 얼마전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젊은이들가운데에서는 젊게 되었다(became young).”
피곤으로 지친 '아래에로의 여정'이 아니라 날로 활력이 더해가는 '위에로의 내적 여정'이었으니 그대로 겸손한 믿음의 은총입니다. 이것은 제가 10년전 산티아고 800km 2000리 순례여정시 체험이기도 했습니다. 발바닥 물집 하나 없었고 피곤도 전혀 못느꼈으며, 산티아고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발걸음도 가벼이 날을 듯 걸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오늘은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두분 다 겸손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교회를 충실히 섬겼던 친구들이였습니다. 251년 고르넬리오가 교황에 선출되었을 때 직면한 것은 박해가 아니라 교회내의 분열이었습니다. 교황의 입장은 배교자들도 회개 절차를 밟아 교회의 품안에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배교한 이들은 물론 살인, 간통, 두 번째 결혼의 경우 역시 다시 교회에 받아들이기를 단호히 거부하며 대립 교황으로 맞선 극단의 엄격주의자 로마의 사제 노바티우스의 이단에 맞서 교황은 치열히 투쟁했고, 여기에 결정적 도움으로 교황의 권위를 강화해 주었던 카르타고의 주교 치프리아노였습니다.
치프리아노는 일찍이, “하느님이 우리중 하나에게 곧 죽을 은총을 주신다면, 우리의 우정은 주님 앞에서 계속될 것이다.”라는 대목의 서한도 교황에게 보내며 영적우정을 돈독히 했습니다. 고르넬리오 교황은 갈루스 황제가 다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253년에 순교했고, 교황중 최초로 무덤에 라틴어로 새겨진 “고르넬리우스 순교자(Cornelius Matyr)”라는 비문도 세워집니다. 이어 치프리아노 주교도 258년 발레리우스 박해시 참수형으로 순교했으며, 마지막 임종어는 “하느님께 감사!”(Thanks be to God!) 였습니다. 역시 주교님의 전생애를 요약한 겸손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우리는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에 감동하게 됩니다. 병든 종을 고쳐주기 위한 그의 사랑이 겸손한 믿음으로 표현됩니다. 자기의 청에 오시겠다는 주님을 극구 사양하는 백인대장이요, 백인대장의 진정성에, 겸손한 믿음에 감동하신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군중에게 돌아서서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심부름 왔던 이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노예는 이미 건강한 몸이 되어 있었다 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주님 만찬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공동체의 일치를 지향하는 주님의 만찬이 서로 배려와 존중이 결여되어 있고 분열을 조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일치를 지향하는 만찬의 취지를 자상히 설명한 후 만찬을 먹으려고 모일 때에는 서로 기다려 주라고 간곡히 권합니다.
끝까지 기다려 주었다 함께 하는 것 역시 겸손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한마디로 서로 배려하는 사랑, 겸손한 믿음이 주님의 만찬을 위한 최상의 준비임을 깨닫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백인대장처럼 겸손한 믿음을 고백하며 주님의 성체를 모실 때 공동체의 일치와 치유의 은총이겠습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아멘.
----------------------------------------------------
24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처럼 나 그럴 수 있기를>
차마
바라볼 수조차 없다고
고백하는 이에게
기꺼이
보여주시는
당신처럼
나 그럴 수 있기를
차마
말씀드릴 수조차 없다고
고백하는 이에게
기꺼이
들어주시는
당신처럼
나 그럴 수 있기를
차마
모실 수조차 없다고
고백하는 이에게
기꺼이
다가가시는
당신처럼
나 그럴 수 있기를
차마
마주할 수조차 없다고
고백하는 이에게
기꺼이
마주하시는
당신처럼
나 그럴 수 있기를
차마
함께할 수조차 없다고
고백하는 이에게
기꺼이
함께하시는
당신처럼
나 그럴 수 있기를
차마
품을 수조차 없다고
고백하는 이에게
기꺼이
안기시는
당신처럼
나 그럴 수 있기를
----------------------------------------------------
24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백성에게 들려주시던 말씀들을 모두 마치신 다음,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다. 마침 어떤 백인대장의 노예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는 주인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루카 7,1-2)
예수님께서 원수 사랑을 몸소 보여 주시다
이방인 백인대장이 노예를 고쳐 주십사고 청합니다. 이는 치명적인 욕정에 병들었거나 세속의 노예로 묶인 뭇 민족이 주님의 축복으로 깨끗해진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가 죽어 가고 있다는 복음사가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닙니디. 그리스도께서 고쳐 주지 않으셨으면 죽었을 태니까요. 그분은 거룩한 사랑의 다스림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원수까지 사랑하여 죽음에서 건져 주시고 구원의 희망을 품게 하셨습니다.
-암브로시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10 하느님은 기뻐하고, 고난을 겪고, 복을 주고, 위로하신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이사 49,13).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요한 8,12)
여기서 엑카르트는 출애굽기와 요한 복음의 진술, 곧 “나는 세상의 빛이다”를 치밀하게 연결하면서 “나는 ~이다”와 빛을 결합한다. 빛은 창조주가 만든 피조물 가운데 첫 번째 것이었다(창세 1,3 참조). 빛은 숨어 있는 하느님을 드러낸다. 빛은 초막절의 상징이다. 예수는 초막절에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했다. 빛은 지혜의 상징이기도 하다. 요한 복음 9장에서, 예수는 눈먼 사랍의 시력 - 곧, 빛 - 을 회복시켜 준다. 예수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밝힌 다음에 빛을 회복시켜 주는 행동을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빛을 따라 걷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존재의 빛이자 생명의 빛이며, “안에서 타는 빛, 자기 속으로 녹아드는 빛, 빛 속의 빛”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사람도 더 이상 슬픔 속을 걸을 필요가 없다. 또한 빛은 메시아 시대의 상징이기도 하고, 메시아 시대가 그 도래를 알리는 생명과 기쁨의 상징이기도 하다. 하느님은 웃고, 기뻐 뛰고, 고난을 겪고, 결국에는 위로하는 정념과 감정의 빛이다. 그러한 위로는 생색내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적인 고난의 자리에서 태어나는 위로이기 때문이다. 거기에서는 정념이 자비보다 앞선다. 오직 이 신적인 빛만이 이 세상을 위한 진정한 위로의 빛이다.(240)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루카 18,9-17.28-30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예수님께서는 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다
사람들이 아이들까지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아이들을 가까이 불러 놓고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따름과 보상
그때에 베드로가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가진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
24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7,7)
사람이 사람을 만나 살아가는 게 인생살이지만, 내가 만난 그 사람으로 인해 내 삶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그 사람이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었기에 그렇지 않을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을 통해서 문득 다가온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은 헨리 W 롱펠로우의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라는 시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 항상 푸른 잎새로 살아가는 사람을 오늘 만나고 싶다. (...) 언제 보아도 언제 바람으로 스쳐 만나도 마음이 따뜻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서 나도 그런 아름다운 마음으로 살고 싶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방인 백인대장과 백인대장의 부탁을 받고 예수님께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는 유다 원로들, 물론 이들의 진솔한 말을 듣고 먼 길 마다하지 않으시고 죽어가고 있는 백인대장의 종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한걸음에 달려가시는 예수님, 이 모든 분은 참으로 아름다운 분들이시며, 오늘 우리가 이분들을 만남으로 우리의 삶이 아름답고 우리 또한 그런 아름다운 마음으로 살고 싶지 않나요.
물론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자신의 종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원로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자기 종을 살려 달라고 부탁한다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며 더욱이 그런 마음을 가졌다는 그 사실 만으로도 정말 감동적이지 않나요. 그런 백인대장의 평소 삶과 그의 진심을 알고 있는 원로들 역시 거절하지 않고 예수님께 다가와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7,4.5)라는 말씀을 듣고 자초지종을 묻지도 않은 채 예수님 또한 기꺼이 그들과 함께 가셨습니다. 회당을 지어 준 것도 잘한 일이지만 이방인인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한다, 는 그 말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자기 종을 아끼고 염려하는 그 마음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훌륭한 성품을 겸비한 사람이었기에 예수님께서 직접 자기 집으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들을 보내어 그들 편에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7,7)라고 청합니다. 이방인 백인대장의 예수님께 대한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공경하는 마음과 겸손한 말마디가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또한 그 진정성에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전혀 들어 보지 못한 진심 어린 말과 전혀 느껴보지 못한 당신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더 나아가서,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7,8)라는 말에 그의 인품과 삶에서 우러나오는 진솔함과 진정성을 예수님은 알아보십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은 감탄하시어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7,9)하고 그를 칭찬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찬사는 정말 당신에게도 이 백인대장의 믿음으로 많은 위로와 힘을 얻게 된 계기가 되었을지 모릅니다. 이는 곧 세상을 살면서 아름다운 사람을 만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에게 다시금 마음 깊이 새기게 합니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하고 예수님께서 그의 겸손하고 확고한 믿음을 인정해 주셨기에 그랬을지 모르지만, 그 백인대장의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주십시오.”(7,6.7)라는 표현은 미사 전례 안의 영성체를 모시기 전의 기도문에 삽입되어 지속되어오고 있습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하지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라는 기도문으로 백인대장의 주님께 대한 믿음은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백인대장처럼 마음이 아름다운 예수님의 마음에 머물면서 우리도 그런 아름다운 마음으로 살고 싶다, 고 고백하는 하루가 됩시다. “노예는 이미 건강한 몸이 되어 있었다.” (7,10)
----------------------------------------------------
24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그 유명한 백인대장의 신앙 고백에서 /
박윤식 [big-llight] 240915 21:03 ㅣNo.175988
우리는 가끔 자신이 스스로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착각할 수도. 하느님께 청하는 기도가 당연히 나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허나 그러한 판단 여부는 오로지 하느님께서 온전히 판단하실 게다. 그 척도는 믿음이다. 그 은총을 받을 근거는 우리가 이웃에게 베푼 선행으로 파악된단다. 우리 실천을 하늘의 천사들이 기억하고, 그곳의 보물 창고에 잘 보관하니까.
우리가 받을 은총은 믿음 안에서만 충분히 커지리라. 카파르나움의 백인대장 노예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유다의 원로들을 그분께 보내어, 제발 오셔서 그를 살려 주십사고 청했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이입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 그 백인대장의 청은 ‘예수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고, 물론 당신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게도 군사들이 있어서, 그들을 이리 가라 하면 가고 저리 오라 하면 또 옵니다. 이처럼 제 집의 노예에게도 언제나 예외는 없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감탄하시며 말씀하셨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러한 믿음을 본 일이 없다.”
그래서 백인대장의 청으로 심부름 왔던 이가 돌아가 보니, 그 병들어 죽게 된 종은 이미 건강한 몸이 되어 있었단다. 자신의 종인 노예를 살려 달라고 하는 백인대장의 그 인품은 참으로 훌륭해 보인다. 자신의 아들이 아닌, 한낱 종을 위해 예수님께 부탁을 하는 저 백인대장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너무도 강했나보다. 정말 그의 믿음은 깊었었다. 그분께서 얼마나 거룩하신 분인지를 제대로 아는 이는, 감히 예수님을 직접 모실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우리는 어떤가? 잘났기에 주님 이름 부르며, 그저 그분 몸 모시는 게 아니다. 여러 가지로 부족한 우리를 주님께서 초대해 주시니,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일 게다. 백인대장은 비록 그가 데리고 있는 종이지만, 그 딱한 처지를 십분 헤아릴 줄 아는 이방인이었다. 자신을 위해 일하는 종이었지만 생명의 존엄성을 아는 이방인이다. 그는 예수님을 비롯해 모든 이에게 정말 따뜻한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교회는 이 백인대장의 청원을 전례 안에서 바친다.
예수님께서는 노예의 병을 고쳐 달라고 간곡히 청하는 로마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다. 그는 예수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기에 유다인의 원로들을 예수님께 보내었다. 또한 자신이 밑에 있는 이에게 시키면 시킨 대로 하듯, 예수님께서도 굳이 직접 오실 필요 없이 한 말씀만 하시라고 하는 것처럼, 그는 배려와 겸손을 몸에 배인 아주 경건한 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고 하시며 그를 칭찬하신다. 하느님께서는 공정하시다. 유다인, 이방인의 구별 없이 더 노력하는 이에게 더 큰 믿음을 상으로 담뿍 내리신다.
이 얼마나 정성어린 신앙고백인가? 우리는 성체성사로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실 때마다, 인품을 두루 갖춘 그 백인대장을 본받자.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부름 받았다. 따라서 그 뜻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또한 자신을 낮추어 예수님 마음을 움직이도록 고백해야 할 게다. ‘주님, 제 안에 당신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라고.
----------------------------------------------------
24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의 성찬과 관련하여,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1코린 11,20)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들의 성찬이 공동체의 사랑과 일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빈부의 차이를 드러내고 다른 이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신 사람들이라면,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성찬은 교회의 신자들이 하나임을 드러내야 하고,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신 사람은 이웃을 위하여 자신을 내줄 수 있어야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공동체가 성찬을 거행하기에,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기에 합당할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백인대장이,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미사 때마다 영성체를 앞두고 하는 말입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그런데 이 말은, 개인들만이 아니라 성찬을 거행하는 공동체들도 주님 앞에서 바쳐야 하는 고백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도 상처는 있고, 우리가 그 일치를 거슬러 저지르는 잘못들도 있습니다.
영성체를 앞두고 공동체의 양심을 성찰한다면, 혼자서 양심을 성찰할 때 못지않은 부당함을 보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백인대장과 같이 치유를 청하며,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라고 간청하여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의, 우리 교회의 부족함을 고백하면서, 우리의 부당함에도 주님께서 당신의 한 말씀으로 우리를 낫게 하여 주시기를 청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