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외의 '외'는 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외아들·외딴집 할 때의 그 '외'다. 영어로도 참외는 'me-lone'이다.
“Are you lonesome tonight?” 할 때의 그 'lone'이니 역시 '혼자'라는 뜻이다.
한자의 외로울 고孤자에도 참외 하나瓜가 들어앉아 이쪽을 말갛게 건너다본다.
우리말과 영어, 한자를 만든 이들이 함께 모여 회의를 한 것도 아니련만 '혼자'라는 의미에 똑같이 '외'라는 과일을 사용한 건 희한한 일이다. '슬기'가 '슬기-롭다'가 되고 '지혜'가 '지혜-롭다'가 되는 우리말 구조를 따져보면 '외-롭다'는 '외'로부터 나온 게 확실하다. 그들은 왜 '외로움'이란 의미를 밭에 돋아 홀로 열매가 굵어가는 저 보잘것없는 초본식물로부터 만들어 냈을까.
경상도 안동 말을 쓰던 엄마는 오이를 '물외'라고 부르고 참외는 그냥 '외'라고 불렀다.
오이는 영어로 ‘cucumber’이고 한자로 황과(黃瓜)며, 수박은 ‘water-melon’이고 수과(水瓜)다. 오이와 수박도 외롭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박목-박과에 속한 식물들이지만 다른 성질들이 우세해서 세 언어 공히 같은 이름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참외만은 ‘참’이라고 진짜임을 강조하는 모자까지 척 쓰고 ‘외로움’의 절대강자가 되어 수천 년을(아마도!) 버텨오고 있다. 참외가 단순히 단물 가득한 과일이 아니고 ‘외로움’을 표상하게 된 비밀을 나는 다석 유영모 선생의 제자인 박영호 선생에게 처음 들었다.
외는 마디 하나에 꽃이 하나씩만 핀다. 다른 식물은 대개 쌍으로 꽃이 피어 열매도 쌍으로 달리는데 박과 식물만은 홀로 꽃 피니 열매도 하나뿐이다. 사과도 배도 대추도 감도 곁의 놈에게 의지하건만 외만은 아니다. 홀로 피어야 열매가 둥글게 자랄 수 있다. 방해받지 않고 마음껏 몸이 굵어질 수 있다. 몸 안에 단맛을 충분히 저장할 수 있다. 외가 홀로 비와 어둠과 바람과 땡볕을 견디고 또 누리는 것은 그 길만이 안에서 익어가는 성숙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외'의 진정한 의미다.
그런데 나는 언제부턴가 일상 언어생활에서 이 오래되고 의연한 말을 사용하지 않게 됐다. 뱉어놓고 보면 외롭다는 말에는 뭔지 얄팍하고 덜덜하고 끈적대는 기운이 느껴졌다. 그 결핍감과 의존성이 번번이 민망했다.
말이란 동시대인의 철학과 정서가 고스란히 담기는 그릇이다. 원래 홀로 꽃 피어 열매 맺는 '외'를 보고 '외-롭다'란 말을 만들었을 시대의 '외로움'이란 당당하게 홀로섬을 선택한다는 의미가 강했을 것이다. '~롭다'란 말 앞에 대개 긍정적인 추상명사가 붙는 걸로 유추해도 그렇고 참외가 익어가는 양을 오랜 세월 관찰해서 언어를 만들어 냈을 고대인의 심리를 짐작해 봐도 그렇다.
현대의 외로움엔 원래의 의미 대신 상당량의 '당분'과 '센티멘털'이 가미돼 버렸다. 시장과 매스미디어는 외로움을 와인이나 초콜릿, 커피 같은 기호식품에 끼워 팔고 드라마와 가요는 외로움을 달달하게 과잉 포장해서 흔하고 값싸게 유통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우린 진정한 외로움을 잃어버렸다.
외꽃이 하나인 건 원래 둘이었던 것의 결핍이 아니라 홀로됨을 기꺼이 선택해 성숙에 이르기 위함이다.
주변 젊은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다석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다. 자신이 죽는 날을 미리 잡아놓고 하루를 일생처럼 사는 일일일생주의一日一生主義를 견결하게 실천했던 다석 같은 선각을 잃어버렸으니 참 외로움도 사라질 수밖에! 다석은 사모하던 남강 이승훈 선생만큼만 살기로 작정해 자신의 수명을 66세로 정했었다.
존경과 사모와 사숙이 희귀해진 세상에도 여전히 참외는 익는다. 자라는 아이의 함량을 키우려면, 남의 잣대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고요하게 종심소욕從心所欲하려면 홀로 견디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전철역 입구에 세운 트럭 안에 아무렇게나 뒹구는 참외의 참 외로움을 본받아야 한다. 온 세상에 땡볕이 가득하다. 그렇지만 이건 내게 단물을 들이기 위한 시간일 뿐!
(김서령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