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6주간 수요일 강론>(2023. 10. 4. 수)(루카 9,57-62)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복음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57-62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57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59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0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61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7-58)”
여기서 ‘어떤 사람’은, 마태오복음에는 ‘한 율법학자’로 기록되어
있는데(마태 8,19), 그가 신앙인으로서 예수님을 따르고 싶어 한
것인지, 그냥 학문적인 제자가 되고 싶어 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라는 말은,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더라도” 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은 진심으로 말한 것이겠지만, 어떤 어려움을 얼마나
겪게 될지는 잘 모르고서 말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라는 말씀은,
바로 앞에 있는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을 거부한 이야기’에(루카 9,51-56) 연결됩니다.
그 마을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일행에게
잠잘 곳과 먹을 것을 제공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부름꾼들을 그 마을로 보내실 때,
그 마을에 정당한 숙식비를 내고
숙소와 음식을 미리 준비해 놓으라고 지시하셨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일행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것은, 돈이 적었기 때문이 아니라,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실 때에도 그렇게 태어나셨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외양간에서 예수님을 낳게 된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방이 없어서’,
즉 베들레헴 사람들이 요셉과 마리아에게 방을 내주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습니다(루카 2,7).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뒤에 묻히신 무덤도
‘남의 무덤’이었습니다.
아리마태아 요셉이 자신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모셨기 때문입니다(마태 27,60).
그처럼 예수님의 지상 생애는 처음부터 끝까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처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겠다고 나선 ‘어떤 사람’에게
당신의 그런 처지를 말씀하신 것은, “나를 따르려면,
나를 믿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고, 나와 같은 처지가
되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느냐?” 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예수님만’ 따라야 합니다.
여건이나 처지나 상황 같은 것은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하고, 예수님의 뒤만 따라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렵고 힘든 상황을 만날 수도 있고,
편안하고 행복한 상황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언제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간에
흔들림 없이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셨을 때, 베드로 사도가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루카 9,33).” 라는
말을 했는데, 이 말은, “이대로 영원히 이렇게
지내고 싶습니다.” 라는 뜻이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런 체험을 하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멈춰 서 버리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너무 힘들다고 주저앉아 있는 것과 너무 좋다고 주저앉아 있는
것은 사실상 같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루카 9,59-60).”
여기서 ‘다른 사람’은 이미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를 따라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도들과 같은 급의 제자로 삼으시겠다고 그를 부르신 일입니다.
그 제자가 한 말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고 금방 다시 오겠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중단하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에는 변함이 없지만,
사도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 같은 일은 못하겠다는 뜻이고,
복음 선포 활동에 참여하는 일도 못하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집으로 가지 말라는 뜻도 아니고,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지 말라는 뜻도 아닙니다.
현세의 인간적인 일 때문에 복음 선포를 하는 일꾼이 되기를
포기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일곱 봉사자 가운데 하나인
‘필리포스’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고 돌아와 예수님의 여행에 합류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1-62)”
여기서 ‘또 다른 사람’이 한 말은, 표현만 보면,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일을 ‘먼저’ 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나중에’ 하겠다는 말로 보이지만, 예수님 말씀을 근거로 해서
해석하면, ‘말로는’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을 따를 마음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현세적이고 인간적인
일에 매여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합당하지 않다.”는 “못 들어간다.”입니다.
[출처]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