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장교라고 함은, 해군병학교/해군기관학교 졸업생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밑바닥에서 올라갈 수는 없었다.
사실, 메이지 시대 때 밑바닥에서 올라올 수 있는 최고계급은 병조장이었다. 혼란스럽게도, 메이지 시대의 병조장이라 함은 해군소위와 동등한 계급이었다. 준사관의 계급은 상등병조였다. 아무리 우수한 자도 학력이 없는지는 병조장에서 말뚝 박을 수밖에 없었다. 단, 전시특례로 하사관에서 장교가 되는 길이 있었다.
그 때의 사령(명령서)은,
해군병조장 ×야마 凹요시 해군중위에 임명한다.
이와 같이, 소위를 건너뛰어 중위가 되었다. 메이지 시대(1866년~1911년)에는 병조장과 소위가 같은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다이쇼(1911년~) 시대가 되어서, 우수한 전문가를, 병조장에서 더 진급을 못하게 된 것을 견딜 수 없다는 의론이 일었다. 해군의 기계화와 근대화가 진행되어, 실무가의 지위가 상승한 것이다. 같은 시기 육군에서도 우수한 특무조장은, 발탁되어 소위가 되는 제도가 생겨났다. 소위후보자 제도라 부르고 다이쇼 7년(1918년)에 발족한다.
육군의 냉정한 점은 소위후보자 출신자도 육군사관학교 출신자도 소위가 되면 모두 평등하게 취급되었다. 뭐랄까, 소위후보자 출신자라도 육군대학교의 수험자격을 수여받았다. 사실 소위후보자 출신으로서 육대(육군대학)의 재심까지 간 사람도 몇 명은 있다. 유감이지만, 입교한 사람은 제로였지만,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가 대대장이나 사단포병대장이 된 사람은 이상할 것 없었다. 육군은, 사실상 자유주의적이었다.
이 때 해군도 육군처럼 밑바닥에서 올라온 자에게 장교의 자격을 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학력차별을 너무 좋아한 해군당국은 장교와는 다른 특무사관이라고 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병조장(다이쇼 시대(1911년~)의 병조장은, 준사관으로서 상등병조는 폐지되었다.)에서 진급한 자는, 해군소위가 아니라, 해군특무소위라고 했다. 그리고 특무사관은, 대위까지였다.
이 때, 병조장은, 소위대우였기 때문에, 특무사관제도가 생겼을 때, 각자의 경력에 따라서, 특무대위~소위로 승진되었다. 경력이 화려한 자는 병조장에서 갑자기 해군특무대위가 되었다.
어째서 특무사관제도를 만들 필요성이 있었던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다. 골수까지 스며든 학력차별의식 이외에는 없다. 특무사관제도 따위가 있으니까 군령승행이라고 하는 정말로 불합리한 문제가 생겼다.
군령승행이라고 함은, 전시에 지휘권의 위양을 정한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래와 같다.
병과장교 → 기관과장교 → 여비역사관 → 특무사관
의 순으로 지휘권이 위양된 것이다.
무엇보다, 원칙으로서 독립된 지휘권을 가진 자는 해군장교로 한정되었다.
격전으로 사관의 태반이 사망해서, 코흘리개 소위와, 기관대좌가 살아남은 경우, 소위가 지휘를 잡는 것이 되었다.
육전대를 편성할 때, 특무대위와 소위가 있을 경우, 독립된 지휘권은 해군장교만이 지니기 때문에, 소위가 중대장이 되는 것이다.
뭔가 장이 뒤틀릴 소리였다.
富岡定俊 해군소장은(패전시의 군령부 제1부장)
“자승자박의 그림을 그린 듯 한 규칙이었다.” 라고, 군령승행을 회상해서 말했다.
거기다가, 이등병조와 군의대좌가 살아남았을 경우, 어느 쪽이 지휘를 잡을 것인가?
군의는 지휘권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이등병조가 지휘를 잡는다.
물론, 육군은 이런 말도 안 되는 규칙이 없었다. 육군의 경우, 계급이 절대적이 된다.
병학교 선수과 학생
준사관(병조장)은5년 이상 근무하면 특무사관에 선발될 자격이 있다. 그러나 그 이외 특무사관으로 승진하는 방법으로서 병학교에 가는 초 엘리트 코스도 있었다. 이것은 일등병조/병조장에서 시험을 봐서 선발하는 것으로, 병학교 생도에 준하는 교육을 받았다.
같은 특무사관이라도 선수학생출신자는 사무라이배치를 받을 수 있었다. 보통의 특무사관은 특정분야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업무전체를 통괄하는 직무에는 맞지 않았다.
즉, 포술과일 경우 장포장은 대포관리 실무의 전문가이지만, 포술장의 직무를 보좌하여 포술전체를 지휘 감독하는 직무는 아니다. 이런 전체통괄의 업무는 해군장교의 보직인 포술사였다. 사(士)가 붙어있기 때문에 사무라이배치라고 했다.
사무라이배치의 예를 들면, 아래와 같다.
포술과 포술장 포술사 장포장
砲術科 砲術長 砲術士 掌砲長
항해과 항해장 항해사 장항해장 신호장 조타장
航海科 航海長 航海士 掌航海長 信号長 操舵長
수뢰과 수뢰장 수뢰사 장수뢰장
水雷科 水雷長 水雷士 掌水雷長
기관과 기관장 기관사 장기장 기계장 전기장
機関科 機関長 機関士 掌機長 機械長 電気長
통신과 통신장 통신사 장통신장
通信科 通信長 通信士 掌通信長
군의과 군의장 군의장 소속 장간호장
軍医科 軍医長 軍医長付き 掌看護長
주계과 주계장 서무주임 장경리장 장의량장
主計科 主計長 庶務主任 掌経理長 掌衣糧長
본래, 특무사관은 장장(掌長)배치에 한정되었지만 병학교 선수 학생출신자에 한해 사무라이배치(士)에 둔 것으로 볼 때 엄청난 엘리트였다. 다이쇼 9년(1920년)부터, 선수학생제도는 시작되었다고 하니 특무사관제도의 발족과 거의 같은 시기였다. 쇼와 8년(1933년) 까지는 매년 30명 정도밖에 채용이 되지 않았다고 하니 얼마나 우수했는지 알 수 있다. 교육기간은 1년 8개월이었지만, 이후에 단축되었다. 성적 우수자에게는 은사의 단검이 수여되었기 때문에, 취급은 병학교 졸업생과 동등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이후에 특무대위에서 소좌에 진급하는 자가 잇따르는데, 이들의 다수는 선수학생출신자였다.
소좌로의 진급이라고 함은, 사실 해군부 안에서는 경천동지의 사태였다.
소좌가 되면 장교의 신분을 얻게 되었다. 병학교 졸업자와 동등하게 된다. 그 군령승행의 속박에서 벋어나는 것으로 더 이상 코흘리개 소위의 지휘 하에서 괴롭게 땀 흘리는 일은 없다.
해군 창군된 이레, 밑바닥에서 시작하여 소좌가 된 자 제1호는, 쇼와 2년(1927년)의 일이었다. 명예의 승진자는 주계과였다. 그 후, 몇 명이 소좌가 되었지만 거의가 단문소좌(団門少佐)로, 사실상 소좌로서의 직무에 취임한 사람은 없었다.
명실공히, 해군 소좌가 되어 항공대의 부장이라고 하는 지위에 취임한 사람이 나온 것은 지나사변 이후의 일이었다. 쇼와19년(1944년)에는 밑바닥에서 진급해한 중좌가 3명 출현한다.
그 중 壇原 袈裟由(난바라 케사요시)라고 하는 사람은, 메이지 40년(1907년)에 해군오등수병이 되어 35간년의 꾸준한 근무 후 해군중좌가 되었다. 쇼와 13년(1938년)에 특무대위에서 소좌로 진급했다. 훈장은 놀랍게도 욱일의 8등과 서보장의 3등을 수여받았다. 욱일장은, 하사관 시절, 제1차 세계대전의 전과로 수여받았고, 서보장은, 다년간의 직무정려(職務精励)로 수여받았다고 한다. 보통 3등은 대좌 급에서 받는다. 소장의 경우도 3등은 이상할 것이 없다. 드물게 중장에서 3등을 받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소좌로서 3등이라고 함은, 놀라울 정도로 직무정려인 것이었다.
해군의 병대원수[兵隊元帥] (오등병에서 소좌까지는, 13계급。소위후보생에서 원수 까지는 11계급이기 때문에, 사실상 병대원수는 그냥 원수보다도 훨씬 높다.)는 아래의 3명 이었다.
壇原 袈裟由 쇼와13년(1938년)11월15일 해군소좌
쇼와19년(1944년)5월1일 해군중좌 종전까지 현역
三沢 千一 쇼와15년(1940년)11월15일 해군소좌
쇼와19년(1944년)10월15일 해군중좌
쇼와19년(1944년)12월5日 여비역편입 즉일소집
酒井 常十 쇼와14년(1939년)11월15일 해군기관소좌
쇼와19년(1944년)10월15일 기관장교인 해군중좌
쇼와19년(1944년)12월5일 여비역편입
ヤクルト(야쿠르트) 명감독으로서 이름 높은 広岡氏의 厳父(엄부)는 5등 기관병에서 점차 진급해서 종전때는 ポツダム(포츠담)중좌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진위는 확인해보지 않았다.
전쟁 국면도 말기가 되어, 패전의 색이 짙어질 무렵, 특무사관에서 해군장교로 전관하는 길도 열리게 되었다. 쇼와19년(1944년) 4월, 비행여과연습생의 출신자에 한해서 ‘해군항공특무대위에서, 해군대위’ 로 특별 선발하는 제도가 만들어져 6명의 항공특무대위가 해군대위로 전관했다.
거기다, 쇼와 20년(1945년) 5월에는, 항공특무중위/소위에서도 해군중위/소위로 전관의 길이 열렸다. (이 시점에서 항공특무사관이라고 하는 호칭은 없었지만 실제로는 ‘특무사관인 중위’ 라고 부르는 관습이 남아있었다.)
특공이라는 필사대를 만들어 인재의 개죽음을 계속해 온 해군이 이제 와서 이게 뭔가! 라고 하는 기색도 있지만, 좌우지간 비행기를 조종하는 쪽에서는 특무사관과 장교와의 벽은 낮아져 있었다.
뭣보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된다. 이처럼 조금식이라도 특무사관의 대우개선이 이루어졌을 때는 국토는 소이탄으로 폐허가 되어버렸고, 해군에는 움직이는 군함도 없어 비참한 패전5분전 이었다. 해군은 이렇게 될 때까지도 아직 제도의 발본개혁이 불가능 했다.
일본인은 차분히 자기개혁을 할 수 없는 민족이라고 통감할 뿐이었다. 이 원고를 쓰고 있을 때 (헤이세이15년 1월) 부용(芙蓉)출판에서, 존재 그 자체가 환상이라고 말하는 쇼와17년(1942년)의 해군의제회 회원명부가 부각 발간되었다. 소좌의 란을 봐도, 중좌의 명부를 봐도, 壇原氏나 酒井氏의 이름이 없다. 겨우 정신이 들었다. 결국, 좌관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취급은 어디까지나 특준(特准)이었던 것은 아닌가? 해군은, 최후의 최후까지 밑바닥에서 올라온 자를 장교로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 얼마나 무서운 조직인가?
그럼, 마지막으로 특무하사관이란 무엇인가?
하사관의 최고지위는, 선임위병오장이었다. 함내나 부대의 풍기관리의 감독이었다. 선임위병오장의 밑에는, 위병오장이 있다. 이 사람들은 병과 하사관이었다.
군함 총인원의 3분의 1은, 기관과였다. 기관과에는 갑판에는 없는, 독립의 생활이나 풍습이 있어, 병과의 사람에게는 알 수 없는 것도 많다.
움움, 구글에 특무사관으로 검색하니 제일 첫페이지에 뜨는군요. 이제야 그놈의 '특무'가 뭔지 속시원히 알겠습니다.
육군의 경우 특무조장(=준위)만 있었습니다. 보병부대 중대의 실제 지휘를 하는 자를 가리키는 단어이지요.
해군의 경우는 해군병학교나 해군기관학교를 나오지 않고, 밑바닥에서 진급해서 올라온 경우를 특무사관이라고 했군요. 특무사관은 장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또 특징적이네요.
특무하사관은 기관과의 풍기관리를 하는 하사관을 가리키는 단어였군요.
결국 특무라고 함은 특수신분 혹은 보직명이었군요.
비록 육군의 특무조장(=준위)이 조장보다 한단계 높은 계급이기는 하지만 특무(신분 or 보직) + 조장(계급)으로 이와 유사한 경우가 오장근무상등병이 있습니다. 오장근무(보직) + 상등병(계급)으로 이후에 병장이 신설됩니다.
오장근무상등병은 평시편제로써, 전시때에는 그냥 상등병이 됩니다. 병장은 병졸(사병)의 신분으로 상등병보다 높고 상위 신분의 최하위 계급인 오장보다 낮은 계급입니다. 병장 그 자체는 병졸의 신분이고, 분대장이나 당번하사의 업무를 수행하는 오장근무병장이라는 '보직'이 생겨났습니다. 계급명칭이 아닌 단지 보직인 뿐이라는 점이 특징입니다.
첫댓글 포술반의 장포장이라는 단어는 한국해군도 사용하던 용어입니다. 한국전 당시 백두산함의 직별명단을 보면 주포 장포장 최석린 병조장이라는게 보입니다.
하두 말이 많아 전쟁 말기엔 '특무'란 말을 공식적으로 없앴지요. 예를 들면, 비행특무중위를 그냥 중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