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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의 아름다운 삶 (벧전2:11-12절)
지혜로운 사람은 다음 몇 가지의 문제를 생각하고 깨달아 아는 사람입니다.
첫째는 내가 누구냐 하는 문제입니다.
나의 나 됨의 존재 문제입니다. 지금 나의 현주소가 어디입니까. 나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아담은 자신이 다른 동물들과 같이 흙으로 지음받은 비천한 존재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셔서 육체가 살아 있는 영체가 되게 해주신 고귀한 존재인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자기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이 아담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아담이 진실로 그 사실을 깨달았더라면 그는 하나님을 높이고 공경하며, 동시에 만물보다 존귀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지고 훌륭한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누구인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그 말씀을 불순종하는 죄를 범했던 것입니다. 그 후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며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담이 숨은 곳을 몰라서 마치 부모가 잃어버린 어린아이를 찾듯이 그의 소재를 물으신 것이 아니라 아담의 존재성, 그의 본질을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다만 자신의 현재 상황에 대해 답변합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선악과를 먹고 지혜를 상실한 사람답게 동문서답을 한 것입니다. 그 후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무엇을 알기를 원하고 일생을 부지런히 배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정작 배우고 깨달아야 할 것은 세상의 학문이나 지식이 아니라 ‘내가 누구냐’ 하는 자신의 정체성 문제입니다. ‘아이덴티티’ ‘정체성’이 문제입니다. 손자병법에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는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다른 것을 알아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먼저 나 자신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둘째는 자신의 나이를 아는 것입니다.
나이를 아는 것이 지혜 중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시90:3-4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여기 ‘사람’이라는 말 ‘에노쉬’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존재로서 한 번은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생을 의미합니다. 즉 인생의 유한성, 일시성, 덧없는 존재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모세는 인생의 일생이 밤의 한 순간이라고 정의합니다. 밤의 한 순간은 잠을 자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실로 인생은 일장춘몽이라는 말과 같이 일생이 한 순간 잠을 자는 것 같으며 그 후에는 티끌로 돌아가는 존재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모세는 이어서 말하기를 9절에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다.’고 한 후에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간다.’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또 하나님 앞에 간곡히 기도하기를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인생의 허망함과 짧음을 깨달은 사람은 영원을 사모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의 품 안에서 자족함을 누리게 됩니다. 여기 ‘지혜’는 신령한 가르침을 통해 얻는 영적 열매와 같습니다. 짧은 인생이 끝나기 전에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아 인생의 본분을 알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 나이를 셀 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제 나이를 바로 아는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금 년에 우리의 나이는 몇 살 입니까. 젊은이가 늙은 척하는 것은 좀 건방져 보이고, 늙은이가 젊은 척하는 것은 주책스러워 보입니다. 자신의 나이에 꼭 알맞게 처신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요즈음 시대는 나는 아직 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실은 세월이 다 지나갔는데, 머리에는 흰 구름이 이미 덮혔는데 지나간 과거에 매달려 착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반대로 나는 너무 늙어서 이제는 아무 것도 못해. 하면서 미리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래서 사람은 자신의 나이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나아가 자신이 지금 자기 일생의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자신의 삶의 시간표를 알고 있다면 우리는 보다 나은 인생의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로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가려 살아가는 일이 지혜입니다. 또한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분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과 실력을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남이 한다고 나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남이 가졌다고 나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소유, 내게 주어진 지식, 내게 주어진 능력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인생의 한계, 나아가 나의 한계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넷째는 자신의 본래성과 궁극성을 아는 것입니다.
사람은 현재에 삽니다. 그런데도 과거가 있었고 미래가 있습니다. 나는 본래 어떤 사람이었나. 인간이란 본래 무엇이었나. 즉 인생의 뿌리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속이 어디인지를 찾는 것입니다.
*시71:5-6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오 나의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내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이것이 본래성입니다. 바울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간증할 때에 자신은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조상의 유전에 열심이 있었지마는 자신의 어머니의 태로부터 자기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을 알았다.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궁극에는 어떻게 되는가. 그 마지막도 알아야 합니다. 10년 후에는, 20년 후에는, 내 인생의 마지막 종착점은 어디인가 하는 것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시39:4-6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시간 시간, 하루 하루 자신이 종말론적 인생임을 깨닫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평범하면서도 아주 귀중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선택된 사람들의 특별한 지위에 대해 언급한 베드로는 이제 그 사람들을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성도들은 나그네와 거류민입니다. 이 나그네라는 헬라어는 ‘파로이쿠스’ 로서 일시적으로 거주하면서 법적인 권리를 가지지 못한 자를 말합니다. 즉 타향살이를 하는 자, 낯선 사람을 뜻합니다. 이 사람의 시민권은 다른 나라에 있으면서 일시적으로, 시한부로 남의 땅에 와서 사는 사람입니다. 또 거류민이라는 헬라어는 ‘파레피데무스’ 는 거쳐 지나가는 길손입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 머물지 않는 사람, 곧 과객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왕 다윗도 한 때는 중한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시39:12-13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다윗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는 객이요 거류자라 하였습니다.
기독교인은 이중적인 의미로 나그네와 행인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이 땅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세상 사람들은 듣지 못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고 기뻐하는 일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세상 사람들이 슬퍼하고 당황하는 일을 오히려 기뻐합니다. 별로 잘못한 것도 없는데 항상 회개하고 세상의 향락을 부정하고 오히려 고난을 기쁨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이 세상의 것들을 별로 사랑하지 않고 세상의 것들에 소망을 두지 않으며 알 수 없는 천국을 기다립니다. 그러니까 일반 사람들에게 이상한 사람으로 비칩니다. 즉 세상 사람들에게는 낯선 사람같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생의 본질적 내용과 궁극적 최종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은 데려감을 당한 자입니다. 버려둠을 당한 자의 눈에는 부득이 낯선 자로, 이상한 자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외국인이요, 나그네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그러하였습니다. 요사이 보면 이혼하는 부부가 날로 많아지고 있습니다. 통계적으로 종교 문제로 이혼하는 경우가 제일 많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결혼하면 99%가 이혼합니다. 크리스챤은 이 지상을 영원한 곳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언제나 멀리 하늘나라에 가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는 임시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며 나그네로, 순례자로 살아갑니다. 이 나그네의 삶, 순례자의 삶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그에 합당한 법칙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육체에 해당하는 헬라어 ‘사르키콘’은 단순한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악한 본성을 말합니다. 육체의 정욕이란 세상에 이끌리는 본성적 마음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훌륭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갈5:19-21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것들은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것들을 배격하고 삽니다. 육체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 다시 말하면 육체 주도적인 사람과 성령의 주도적인 사람은 완전히 다릅니다. 육체 주도적인 사람에 대하여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전했습니다.
*렘17:5-6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육에 속한 사람은 먹고 마시는 것, 세상적인 향락에 주도되어 살아갑니다. 그는 혈육을 믿으며 사람으로 권력을 삼고 자신의 이익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상관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 대하여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을 보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저주받은 인생으로 살아갑니다. 또한 그들의 마지막은 둘째 사망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계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은 이와는 정반대입니다.
*렘17:7-8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정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성령이 주도하는 사람은 사람의 생각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모든 일에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붙잡힌 바 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합니다. 어디에 살든지, 어떻게 살든지 개의하지 않습니다. 누구와 살든지, 어떤 방법으로 살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하여 기뻐합니다. 그는 복을 받으며 항상 푸르고 싱싱하며 결실하는 인생으로 살아갑니다. 그의 눈에는 다시는 눈물이 없으며 아픔이나 고통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절망은 없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희망으로 넘치고 그의 가는 길에 영광이 풍성합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전혀 다른 세계에 살면서 한데 모여 있습니다. 인생은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합니다. 육체의 정욕은 일시적이요, 임시적이며, 가변적이요, 순간적입니다. 과거에 속한 마음과, 가식적인 겉치례와, 이생의 자랑과 금생의 욕망입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 육체에 연연하는 마음, 이 세상에 머물고자 하는 마음, 이 모든 육체의 정욕은 다 쓸데없는 것이니 버리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땅의 나그네입니다. 나그네가 주인 행세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곧 떠날 사람이 오래 있을 사람처럼 행세하는 것은 보기에도 좋지 않습니다.
2.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그네 인생을 잘못 생각하여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일시적이요, 가변적인 인생을 가볍게 여기고 잠시 머물다 가는 세상이라고 적당히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나그네 인생에서 적극적인 선을 행하라고 하십니다. 이방인과 섞여 살아가는 현실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우리가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선한 일을 보고 하나님의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십니다. 여기 ‘선’ 이라는 헬라어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가소스’ 인데 단순한 선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칼로스’ 인데 ‘사랑 더하기 선’ 입니다. 이 선은 나타내는 선한 모양뿐 아니라 그 본성까지도 선한 것을 말합니다.
*히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즉 선한 양심이 바탕이 되어 우러나오는 선한 행실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선이 아니라 아주 아름다운 것, 매력적인 것, 사랑스러운 것을 의미합니다.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것, 지식적인 것이 아니라 행동적인 선을 말합니다. 선을 행하라는 것은 아름다운 나그네로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 인도의 선교사로 일했던 맥스웰은 언어 습득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인도는 마을마다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이웃 마을로 선교지를 옮길 때면 반드시 그 마을의 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어느 마을에 들어가서 그 곳 힌두교 사람을 붙들어 ‘돈을 내겠습니다. 말을 좀 가르쳐 주십시오’ ‘예수를 믿든 안 믿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언어를 좀 지도해 주십시오.’ 그런데 이 힌두교인이 거절을 합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우습습니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그리스도인이 안 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싫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이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누구나 이 사람과 같이 되고 싶어집니다. 이 사람을 만나면 누구나 기독교인이 됩니다. 내가 머무는 곳이라면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되기를 바라고 내가 믿는 신앙을 갖기를 바라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저 사람을 보면 교회 나가고 싶지 않아.’ ‘저게 무슨 믿는 사람인가.’ ‘예수 믿는 것은 아주 잘 못 되었어.’ 이런 소리를 듣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그네 인생을 좀 더 매력 있게 삽시다. 선하게 아름답게 삽시다. 잠시 잠간의 인생이기에 더욱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얼마 안 되는 이 시간을 가장 아름답게, 가장 귀하고 가장 선하게 보내야 할 것 아닙니까. 사랑하며 살기에도 모자라는 인생입니다. 화평하기에도 너무나 부족한 인생입니다. 이제 남은 시간은 더더욱 짧습니다. 이 남은 인생을 정성을 다하여, 가장 아름답게, 매력 있게 사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선한 일에는 비방이 따릅니다. 이방인의 눈에는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이 이상하게 비칩니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방이나 비난이 따릅니다. 오해도 따릅니다. 나아가 우리를 악하다고 혹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감수하고 참아야 합니다.
오늘 본분에 보면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참고 이겨나가면 궁극에 가서는 아름다운 일이 찬양을 받을 것입니다. 선한 일의 결과가 아름답게 꽃이 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해를 받아도, 비난을 받아도 끝까지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 옛날 프러시아 제국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기독교를 박해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일삼아 그리스도인을 죽였고 말을 할 때마다 예수를 비난하였습니다. 어느 날 신하들을 모아 놓고 예수를 비난하고 있는데 그 말을 듣고 있던 장군 한 사람이 왕 앞에 나섰습니다. ‘폐하! 폐하께서는 제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저는 38번이나 전쟁에 출전하여 폐하와 나라를 위하여 싸웠습니다. 저는 이제 더 이상 폐하의 신하가 아닙니다. 더 이상 폐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습니다. 이유는 폐하께서 비웃으시는 그 그리스도 앞으로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나이 많고 이제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비난하시는 예수를 이제 만나러 가야겠기에 이 직위를 하직합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더 이상 기독교인을 박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직도 불신자의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쏟아지는 오해와 비난의 날들이 너무 오래다고 생각되십니까.
*눅19: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의 날을 알지 못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위로와 해방을 주시는 날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시고 하나님의 권고하시는 날은 곧 나타날 것입니다. 그 날을 바라보고 선한 행실에 전념하시기 바랍니다. 썩어질 육체만을 위하여 살 것이 아니라, 어차피 떠나야 할 세상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나그네 인생을 착하고 선하게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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