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슬아치 격식 깬 ‘담백함’…청빈의 삶 고스란히
용와종택 제청과 안채 사이에서 뒤뜰을 올려다보면 류승현과 류관현의 아버지 류봉시가 두 아들의 교육을 위해 무실에서 위동으로 이사한 후 지은 삼가정과 류승현이 지은 침간정이 보인다.
4대의 신위를 모신 용와종택의 제청에는 류승현이 후사로 삼은 동생 류관현의 아들 노애 류도원의 편액이 걸려 있다.
용와종택의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제청. 감실 등을 갖춘 제청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6칸 건물이다.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 문화재 마을의 주인공은 전주 류씨 수곡파(일명 무실 유씨) 사람들이다.
경북 안동시 임동면 무실, 박실, 한들에서 동성마을을 이뤘던 전주 류씨 수곡파는 양반의 고장, 안동에서도 유명한 유림집안이다.
그 때문에 유교적 관습을 매우 중히 여겼다.
이들은 의성 김씨, 진성 이씨, 안동 김씨, 안동 권씨, 동래 정씨, 재령 이씨 등과 혼인관계를 이뤘다.
선조로부터 이어진 가학과 불천위제 등 유교적 제례는 후손들에 의해 유교적 관습으로 남았다.
명절이면 가방을 싸들고 해외로 여행을 가기 바쁜 오늘날에도 이들 전주 류씨 수곡파는 용와 류승현, 정재 류치명, 호고와 류휘문의 불천위 제사와 시조위 회전시제, 각 문파별 제사를 통해 유교적 삶을 실천하고 있다.
이번 편에는 일선리 문화재 마을로 이주한 전주 류씨 수곡파 사람들이 임하댐 수몰 전까지 안동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살펴보고, 가학의 정점에 섰던 용와 류승현의 용와종택을 소개한다.
◆의성 김씨의 사위로 안동에 입향
1500년대 초 영천(지금의 영주)에 살던 선비 류성은 안동의 명문인 의성 김씨의 사위로 안동에 입향한다.
다섯 부자(父子)가 과거에 합격한 당대 최고의 집안인 청계공 김진의 사위가 된 것.
이후 500여 년간 지금의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일대인 무실과 박실, 한들 마을에 정착해 ‘부(富)는 삼백 석, 벼슬은 참판’이라는 안동지역 말이 입증하듯이, 큰 부자가 나거나 높은 관직은 하지 않았어도 학자를 많이 배출한 명문으로 자리 잡았다.
선비 류성은 명문가의 사위가 될 만큼 당대의 빼어난 동량이었지만, 불행히도 일찍 죽고 만다.
그는 복기(호 기봉)와 복립(호 묵계) 형제를 두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탓에 복기, 복립 형제는 외가에 맡겨져 자랐다.
이들을 슬하에 두고 가르친 이는 외삼촌인 학봉 김성일이다.
조선 중기 때 학자로 임진왜란 때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퇴계 이황의 적전제자이며, 선조 5년에는 상소를 올려 사육신을 복권시킨 인물이다.
또 의정부 사인으로 있을 때, 황윤길과 함께 일본 사정을 탐지하고자 부사로 파견돼 “왜국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파직됐었다.
그는 민심이 혼란해지는 것을 막고자 이 같이 보고했다고 해명했다.
이는 “오늘날 두려운 것은 섬나라 도적이 아니라 민심의 향배이니, 민심을 잃으면 견고한 성과 무기가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며 내치에 힘쓸 것을 상소했다는 점에서 일리가 있는 해명이다.
경상도가 왜군에 의해 유린당하자 경상도 초유사로 임명돼 곽재우, 김면, 정인홍 등을 의병장으로 삼아 피폐해진 경상도 지역의 행정을 바로 세우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복기와 복립은 이처럼 유학의 기본인 충(忠)을 강조한 외가의 배경에서 성장했다.
큰아들인 복기는 임진왜란 때 외삼촌 김성일과 함께 여강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남 일대에서 큰 공을 세웠다.
또 전쟁 중에는 의병들이 사용할 목적으로 8폭짜리 전국 지도를 만들기도 했다.
후에 정3품인 예빈시정을 지냈으며, 말년에는 기양서당을 짓고 학문을 닦으면서 후진을 양성했다.
성의 둘째 아들인 복립도 김성일 휘하에서 임진왜란을 헤쳐나간 인물이다.
복립은 김성일과 함께 진주성을 방어하다가 성이 함락되자 의병장 김천일 장군 등과 함께 자결했다.
후에 충신으로 정려돼 후대에 전한다.
이처럼 복립이 전장에서 자결하면서 류성의 남은 자손은 장남 복기뿐이었다.
그래서 안동 땅 전주 류씨들 대부분은 복기의 자손들인 셈이다.
다만, 무실과 이웃한 박실에는 입향조인 류성의 동생 류원이 마을을 일궈 ‘수남위파’라는 종파를 이루며 살았다.
다행히 류성의 장남인 복기는 6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들의 후손들이 무실 인근과 멀리는 청송 진보와 부남에까지 분가해 새로이 터를 잡고 살면서 박실 수남위파와 함께 향촌을 지배한 호족 세력으로 성장했다.
그 세력이 얼마나 컸던지, 안동 땅에 사는 전주 류씨들을 무실 류씨라 따로 부를 정도이다.
자손이 많은 만큼 배출한 인재도 많았다.
임하댐 건설에 앞서 실시한 임하댐 침수지역 문화재지표조사 보고서에는 “임동면의 무실, 박실, 한들 등 아래위 세 개 마을을 터전으로 동성마을을 이루고 세거한 전주 류씨는 정착 300여 년에 과환(과거급제와 벼슬)도 많았지만, 학행을 숭상해 도학과 예학의 대가를 많이 내고, 행실과 문한을 갖춘 선비가 잇달아, 무실 류씨라 일컬어지는 이들은 영남에서도 손꼽히는 명문으로서의 지체를 다져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주 류씨 수곡파는 불망기본이라 해 조상을 숭배하는 일을 근본으로 삼아 제사와 예를 숭상하기로 이름난 집안이었다.
한 터전에서 대대로 살았으니 무실 류씨들이 남긴 문물도 많다.
가문의 상징인 대종가를 비롯해 지파들의 종택들은 한결같이 조선시대 양반들의 살림집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며, 기양서당과 동암정ㆍ만령초당ㆍ침간정ㆍ삼가정 등은 가학 중심으로 학문을 숭상한 이들의 강학당으로 관심을 끈다.
◆형제를 대과에 급제시킨 류봉시
벼슬을 하기보다는 학문에 더 정진했던 전주 류씨 수곡파 사람들이지만, 과거에 급제해 중앙으로 진출한 이들도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류봉시의 아들인 승현과 관현이다.
류봉시는 맏형인 류종시가 일찍 죽어 혼자 집안 살림을 책임지느라 청춘을 보내야만 했다.
당연히 어려운 형편에 과거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그는 종친이 살고 있는 무실에서 분가해 살다가, 두 아들의 공부를 위해 위동으로 이사를 했다.
두 아들의 공부를 위해 삼가정을 짓고 지성으로 가르치기를 10년, 장남 승현이 1719년(숙종 45년)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형인 승현에게서 수학한 동생 관현도 1735년(영조 11년)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했다.
집안을 살피느라 하지 못한 공부의 한을 자식들에게서 풀게 된 셈이다.
장남인 승현은 아버지 류봉시가 장남 역할을 하느라 기회를 얻을 수 없었던 과거에 응시한다.
관직에 진출하겠다는 생각보다 지성으로 가르치는 아버지에게 효도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해 괴나리봇짐을 메고 한양에 과거를 보러 갔다.
그런데 과거시험장에 들어선 후 크게 실망한다.
과거시험장이 마치 시장바닥처럼 어수선하고 과거를 보러 온 사람들의 행실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승현은 “학문하는 사람들이 어찌 저리 가벼울 수 있는가. 글공부나 더 하는 것이 낫겠다”며 시험도 보지 않은 채 낙향했다.
물론, 이 일로 아버지 류봉시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 류봉시는 그를 다독여 다시금 시험을 보게 한다.
이듬해 승현은 27세가 되던 해에 대과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서게 된다.
그는 태학관을 시작으로 사헌부 장령, 종성부사, 공조 참의, 영해부사, 풍기군수 등을 지냈다.
그는 재직 중 목민관으로 선정을 베풀어 사림의 중망을 받았다.
또 1728년 이인좌와 정희량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영남인이 반역에 가담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이를 토벌할 의병을 일으키고 의병대장을 맡았다.
이 일로 종성부사로 임명될 때 왕으로부터 활과 화살을 하사받았으며, 죽은 후에는 이조 참판에 추증됐다.
그는 45세 되던 해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박실마을에 작은 집을 짓고 자신의 호를 따 ‘용와’라고 불렀다.
벼슬보다는 학문에 뜻이 깊었기 때문이다.
목민관으로 선정을 베풀었지만, 관직에 벼슬에 회의를 느낄 때면 이 핑계 저 핑계를 둘러대며 27번이나 사직상소를 올렸다고 한다.
한편, 동생 관현은 형 승현이 외직으로 나갔다가 죽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뒤에 장령과 형조 참의 등에 제수됐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는 경성판관으로 재직 때, 어려운 이들의 세금을 감면해주고 흉년에 1천여 석의 쌀을 풀어 굶주린 주민을 구제하는 등 목민관으로 선정을 베풀어 ‘목민심서’에도 그의 치적이 나타나 있다.
고향으로 돌아와선 학문을 연마하고 생업에 근실하며 여유가 있으면 가난한 친척을 구하는 데 쓰니 그 토지를 ‘의전(義田)’이라 불렀다.
또 사도세자의 시강관으로 있을 때는 역도촬요를 만들어 세자에게 주역을 가르치기도 했다.
저서로는 양파집 두 권이 있다.
◆게으른 사람이 사는 움집용와종택
가을의 문턱에 선 8월 말. 일선리 문화재 마을 오른편 위쪽에 자리한 용와종택을 찾았다.
기록에 따르면, 이 집은 용와 류승현이 45세에 홀연히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지은 작은 집이라고 한다.
활짝 열린 사주문을 따라 들어서면, 먼저 제청이 눈에 들어온다.
높은 벼슬을 지낸 이들이나 한양 벼슬아치 집들과 같은 그런 격식을 갖추지 않았다.
제청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6칸 건물이다.
좌측 2칸이 방인데 감실(신위 등을 모신 곳)을 만들고 4대의 위패를 봉안했다.
가묘를 대신하는 셈이다.
3칸은 대청이고 나머지 1칸이 방이다.
감실 위로 동생의 아들 노애 류도원(승현이 후사로 삼았다)의 편액이 걸려 있다.
제청 옆 담을 따라 배롱나무가 분홍색 꽃을 피우고 있다.
제청 왼편을 따라가면 안채와 사랑채가 나온다.
안채는 왼쪽부터 부엌, 안방, 대청, 건넌방 순으로 정면 6칸 측면 간반통(아래 칸과 위 칸을 칸 살로 막지 않고 하나로 터서 지은 방)이고, 부엌 천장 위에는 다락이 있다.
방과 대청 앞으로 툇간이 계속된다.
부엌 앞마당으로 고방과 외양간이 나란히 있는데 1칸씩이다.
약간의 사이를 두고 사랑채로 이어지는데, 좌측부터 고방, 문간방, 중문간이고 그 우측에 사랑채가 있다.
정면 3칸 측면 간반통이나 방 뒤쪽에 반반칸 반침(수납장)이 처마밑에 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간격에 담장을 두르고 중간에 사주문을 만들어 출입하게 했다.
종택이라 하기에 작은 규모다.
그는 고위 관료를 지낸 이의 집이라고 보기에는 초라하다고 말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사람들아, 깊은 처마 넓은 방을 말하지 마라, 이 방도 무릎 용납할만한 방보다 더 넓다”라고 시로 훈계했다.
사욕을 버리고 담백하게 살고자 했던 류승현의 청빈한 삶이 그대로 나타난 집이다.
현재 용와종택의 종손은 이곳이 아닌 서울에 살고 있다.
하지만, 불천위제나 제사를 지낼 때면 조상을 모시고자 어김없이 용와종택을 찾는다고 마을 이장인 류완성씨는 말한다.
가문의 전통을 계승해서일까. 용와의 후손들은 모두 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현재 종손이 불교 공부를 하겠다고 해서 집안에 난리가 나긴 했지만, 지금은 서울 한 불교재단에서 중요 역할을 맡고 있다.
종손의 남동생은 현재 카이스트와 강원대 교수로 재직 중이며, 누이도 영남대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도움=권삼문 여헌기념관 학예연구실장
류완성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 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