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559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7 : 제주도
삼별초의 난
제주의 역사는 한의 역사이고, 고난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주에서는 크고 작은 난이 셀 수도 없이 많이 일어났다. 그중 가장 큰 사건이 바로 삼별초의 난이다. 삼별초 난의 현장인 항파두성은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와 상귀리에 걸쳐 있는 성으로 이 성은 안팎 겹성이다.진도에서 몽골군과 격전 중이던 김통정 장군이 별장 이문경(李文京)을 시켜서 확보한 제주로 들어왔다.
1271년 5월에 이 성을 쌓은 뒤 성안에 궁궐과 관아를 두었다. 그러나 그다음 해 1273년 4월에 여몽연합군에게 패한 뒤 폐허가 되어 700여 년의 세월을 수풀 속에 묻혀 있다가 1978년에야 다시 정비되었다. 그들의 뜻을 기리어 항몽순의비(抗蒙殉義碑)를 세웠다. 항파두성의 안쪽 성은 돌로, 바깥 성은 흙으로 쌓아 민가를 두었다. 그 둘레가 15리나 되었는데, 거의 없어지고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제주도의 묘제주도 묘의 특징은 완만하고 둥글다. 그리고 사람 무릎 높이의 돌담이 사각형으로 둘러싸여 있다.
삼별초의 난은 고려가 몽골에 대하여 복속 관계에 들어가는 초기에 일어난 군대의 반란이다. 삼별초란 좌별초(左別抄)ㆍ우별초(右別抄)ㆍ신의군(神義軍)의 3개 별초군을 총칭하는 것이다. 삼별초는 원래 용맹한 사람을 선발하여 조직한 특수한 군대 조직으로 전시의 임시적 군대편성이었다. 고려 고종 때 최이가 자기의 권력을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해 별초를 설립하여 상비군의 역할을 맡겼다.
삼별초는 선택된 특수군으로 나라에서 많은 봉급을 주었고, 공을 세우면 죄인들의 재산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러다 보니 무신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다. 삼별초는 그 주인의 지시를 받기도 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주인을 내몰기도 했다. 최이ㆍ김준ㆍ임연ㆍ임유무를 몰아내는데 동원되었던 삼별초는 정작 강력한 무신정권이 등장하지 않자 그들에게 주어졌던 일도, 특권도 사라졌다.그러한 상황 속에 몽골의 지원을 받은 원종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자 삼별초가 이에 반항했고, 임금은 삼별초를 해산한다는 조서를 발표했다.
조정이 환도를 결정한 뒤 강화에 임시로 터를 잡고 살았던 고려의 관리들과 백성들이 짐을 싸 배를 타고 개경으로 나가기 시작했다.삼별초의 배중손(裵仲孫)과 야별초의 노영희(盧永禧)가 “오랑캐 군사들이 대거 밀려와 백성들을 살육하니 무릇 나라를 돕고자 하는 사람들은 구정(毬庭)으로 모이라”고 했다. 그들의 말에 동조한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삼별초의 군사들은 바닷가로 나가서 “배에서 내리지 않는 사람은 모조리 베어 죽이겠다”고 했지만 이미 대세는 개경으로의 환도였다.
강화를 오래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한 배중손과 노영희(盧永禧)는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때가 1270년 6월이었다.당시 일반 민중들은 친몽적인 왕실파의 패배주의적 태도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민간인들의 여론에 힘입어 삼별초는 반몽골ㆍ반정부의 자주독립 수호를 내세워 원종을 폐하고, 왕족인 승화후 온(承化侯 溫)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한 뒤 관부를 설치했다.
항몽순의비애월읍 고성리에 항몽순의비가 있다. 이곳은 본래 삼별초군의 본영이 있었던 대궐터로, 삼별초군의 항몽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삼별초는 끝까지 강화도에서 버틸 생각을 하지 않고, 반란 3일 뒤에는 공사 재물을 접수했다. 강화도에 남아 있는 귀족 고관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고 배를 태워 진도로 옮겼다. 이때 동원한 선박이 1천여 척이었고, 그 배에 재물과 군사와 가족들을 태웠는데 인질들도 많아 통곡이 하늘을 뒤덮었다고 한다.그들이 강화에서 옮기기 전 태사국(太史局)의 관리인 안방열(安邦悅)에게 개경 환도를 두고 점을 치게 했다. 그때 점괘가 “반은 보존하고 반은 망한다”는 점괘가 나왔다. 이 말을 들은 그들은 나라가 둘로 나눌 것이라고 여겼다.
또 떠돌던 말이 고려는 제12대에서 망하고 남쪽에 가서 도읍을 정하면 고려의 뒤를 잇는 왕조가 들어설 것이라는 내용이었다.근거지를 진도로 옮긴 그들은 몽골군의 반격을 예상하고 섬에 강력한 군사기지를 설치하여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했다. 그것은 해전에 약한 몽골군에 대항하여 전략상 우세한 위치를 확보하려는 작전이었다. 진도에 이동한 삼별초는 곧 전라도 일대를 제압했다. 해안 도서지방은 물론 내륙지방도 점차로 삼별초의 세력권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스스로 진도에 있는 삼별초의 본거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복속의 뜻을 표하는 세력들도 있었다.하지만 삼별초는 초반의 우세를 계속적으로 잇지 못했다. 1271년 5월에 새로 홍다구(洪茶丘)가 몽골군 지휘관에 임명되었다.
김방경ㆍ혼도ㆍ홍다구의 지휘 아래 고려ㆍ몽골 연합군이 진도에 총공격을 가하여 함락시켰다. 이때 승화후 온은 홍다구의 손에 죽고 배중손도 전사하고 말았다.진도가 함락되던 당시 남녀의 포로가 1만여 명이 넘었다. 그중에는 인질로 잡힌 귀족과 고관의 가족들이 많았다. 삼별초는 재기불능이라 보일 정도로 큰 타격을 받았으나 완전히 굴복하지는 않았다.살아남은 삼별초군은 김통정(金通精)을 우두머리로, 본거지를 멀리 제주도로 옮겨 항전을 계속했다.
제주도로 이동한 그해에는 방어진지의 구축에 바빠 크게 활약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272년부터는 맹활동을 전개하여 본토를 자주 공격하고 전라도와 경상도의 요지는 큰 피해를 입었다.『고려사』에 실린 내용을 보자.
6월 무자일, 왕이 봉은사에 갔다. 전라도 지휘사의 보고에 ‘삼별초 전선 6척이 안행량을 지나 서울로 향하였다’고 하여 경성(개성) 사람들이 놀라서 인심이 흉흉하였다. (······) 이 달 14일에 도망해 나온 노효제라는 자가 이번에 보고하기를, “역적들이 배 11척에다 군사 390명을 나누어 싣고 경상ㆍ전라도의 조세 운반선을 빼앗으려고 꾀하고 있으며, 또 바닷가의 주(州)ㆍ현(縣)들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려 하고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이 삼별초는 최후까지 선전 분투했으나 기울어진 대세는 어찌할 수 없었다. 마지막 총공세가 펼쳐진 것은 1273년 4월이었다.『고려사』의 기록을 다시 보자.
병오일, 왕이 현성사에 가서 5교량종의 승도들을 모아 남산궁에 도장을 베풀고 역적들을 토벌 평정할 것을 축원하라 했다.경술일에 김방경ㆍ혼도ㆍ홍다구 등과 더불어 전라도의 병선 160척과 수륙군(水陸軍) 1만 명(고려군 6000, 몽골군 2000, 한군 2000)의 병력으로 탐라에 이르러 역적들과 싸웠다. 죽거나 포로가 된 적이 심히 많았으므로 역적들의 무리가 크게 붕괴되었다. 김원윤 등 6명을 죽이고 항복한 자 1300여 명을 여러 배에다 나누어 실었다. 이때 역적들이 모두 평정되었으므로 장군 송보연 등을 남겨두어 지키게 했다.
김통정은 산중으로 피신했다가 자결했는데 삼별초의 반란이 시작된 지 약 3년 만인 1273년 4월 28일이었다.그해 6월 대장군 김수(金綬)를 파견하여 탐라에 있던 역적들을 평정한 것을 보고하게 했다. “바다의 역적들의 기세가 바야흐로 치열하여 온 나라가 크게 걱정하고 있을 때에 당신의 군대가 가는 곳마다 위력을 발휘하여 적을 격멸하였습니다. 생각하건대 오로지 당신의 지극한 사랑을 입어 옛 서울로 나와 살게 되었습니다.
”김통정의 시신을 발견하였다는 송보연의 보고가 올라왔고, 숨어 있던 김혁정과 이기 등을 체포하여 홍다구에게 보내자 홍다구가 그들을 모두 죽였다는 보고가 올라왔다.삼별초가 고려ㆍ몽골 연합군의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3년이라는 오랜 기간을 버릴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사실 삼별초 자체가 무척 우수한 전투 병력이었다. 또한 그 배후에는, 남도 각 지역의 농민들이 삼별초의 항거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정부와 몽골군에 대하여 투쟁하려는 굳은 결의가 높이 고양되어 있었다.
삼별초의 항쟁에 대한 평가는 저마다 다르다. 중요한 것은 무신정권의 하수인이었다가 나라에 반기를 들었던 삼별초의 역사가 이곳 제주 지역 곳곳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