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인(1967∼ )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수료
2000년 《경향신문》으로 등단
1967년 인천 출생. 1988년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 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 200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ㅎ방직공장의 소녀들」이 당선되어 등단.
ㅎ 방직공장의 소녀들 / 이기인
목화송이처럼 눈은 내리고
ㅎ방직공장의 어린 소녀들은 우르르
몰려나와 따뜻한 분식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제 가슴에 실밥
묻은 줄 모르고,
공장의 긴 담벽과 가로수는 빈 화장품 그릇처럼
은은한 향기의 그녀들을 따라오라 하였네
걸음을 멈추고
작은 눈
뭉치를 하나 만들었을 뿐인데,
묻지도 않은 고향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늘어놓으면서 어느덧
뚱뚱한 눈사람이 하나 생겨나서
그
어린 손목을 붙잡아버렸네
그녀가 난생 처음 박아 준 눈사람의 웃음은 더 없이
행복해 보였네
어둠과 소녀들이 교차하는 시간, 눈꺼풀이 내려왔네
ㅎ방직공장의 피곤한 소녀들에게
영원한 메뉴는 사랑이 아닐까,
라면 혹은 김밥을 주문한 분식집에서
생산라인의 한 소녀는 봉숭아 물든 손을 싹싹 비벼대네
오늘도 나무젓가락을 쪼개어 소년에 대한
소녀의 사랑을 점치고 싶어 하네
뜨거운 국물에 나무젓가락이 둥둥
떠서, 흘러가고 소녀의……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다고 분식집 뻐꾸기가 울었네
입김을 불고 있는 ㅎ방직공장의 굴뚝이,
건강한 남자의 그것처럼 보였네
소녀들이 마지막 戰線으로 총총 걸어가며 휘파람을 불었네
(2000년 경향신문 등단작)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 이기인
오랜만에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당신을 만났지요
나는 당신의 등뼈를 본 첫 번째 사랑이지요
당신의 등뼈에 붙은 살이 얼마나 얇은지 알고 있는 사랑이지요
그렇게 얇은 삶이 바람에 견딘 것을 알고
손가락으로 당신의 등을 더듬어볼 수 있도록 허락하신 일과
뒤돌아서서 날 깨우쳐주신 마른 가슴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내가 처음부터 만질 수 없었던 당신의 몸은 바람이 부는 동안
내가 사는 골목까지 날아와 기다렸지요
당신은 그때 젖은 시집 속으로 부끄러워하는 몸으로 들어왔지요
혼자서, 납작하게 살아온 당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들어줄까요
불빛처럼 아름다운 당신의 이야기를 밤새 읽다가,
몸살/ 이기인
늦봄과 초여름 사이 찾아온 감기가 좀 나아질 무렵
하루 세 번 챙겨먹은 약봉지가 식탁 위에 덩그러니 남아 있다
부스럭부스럭 찾아오신 어머니가 감기를 가지고서 고구마 줄기처럼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감기가 좀 나았다는 소식을 듣고서 소나기가 좀 억세게 오는 것 같다
윗목에 앉아 억세게 비를 맞고 계신 큰 잎사귀의 몸살을 본다
흐린 창문 밖으로 보니/ 이기인
과일장수는 사과에 앉은 먼지를 하나하나 닦아준다
사과는 금세 반짝반짝 몸의 상처를 찾아낸다 몸의 중심을 잡는다
사과 위에 사과를 사과를 사과를 올려놓으면서
한 바구니의 사과 일가가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그 앞으로 코가 빨개져서 서로 웃고 지나가는 가족이 보인다
흐린 창문 밖으로 저들의 무릎이 더 반짝인다
뭉쳐진 숨소리/ 이기인
긁는 효자손 배고픈 등을 긁다 뼈를 긁다 네 벽의 조용함을 긁긁 긁다
눈먼 감자의 뇌를 수저로 긁긁 긁어놓는다
잊었던 숨을 다시 잇고 감자가 입안에서 으깨어지는 소리를 자세히 긁긁 집어삼킨다
‘배고프다’
뜨거운 감자에 쇠젓가락이 달려가 꽂히는 소리가 긁긁긁긁
극적으로 감자의 세계 끝까지 밀고 나아가서 쇠젓가락이 빠져나온다
감자를 쥔 손이 그의 양식을 한 손에 들고 있다
배고픔으로 뭉쳐진 감자의 숨소리가 모락모락 감을 뿜어 낸다
감자 먹는 사람들의 동그란 그늘이 뜨겁다
실내화/ 이기인
먼지를 닦는 청소부의 중얼거림은 두 짝
앞으로 걸어간 걸음은 책상 위에 펼쳐진 의료용 기구를 정리하며 말없이 아프다
뒤쪽으로 돌아간 걸음은 환자들이 떨어뜨린 먼지를 조용히 줍는다
조용히 닳아 없어진 삶의 유혹 때문에 청소부는 매월 삼십 만원을 받으며
책상 위에 시들어가는 장미의 불안을 본다
매일매일 닦아주는 실내에서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실내화의 슬픔에 발목을 넣는다
청소부는 청진기가 놓인 책상 아래 원장님의 실내화가 있는 곳으로 정박해 떠내려간다
먼지는 그곳으로 와서 매일매일 살림을 차린다
청소부는 나란히 앉아 있는 실내화의 정적이 느릿느릿 다가오는 것이 느릿느릿 무섭다
몸을 숙여서 끌고 가는 실내화의 아픈 발끝으로 그의 새벽 미열이 내려와서 뜨겁다
달의 공장/ 이기인
공장 밖으로 심부름 나온 달빛
심부름을 나온 바람,
심부름을 나온 소녀가 슈퍼에서 쪼글쪼글한 귤을 한 봉지 산다
슈퍼 주인 할아버지가 자기 방식으로 귤을 센다
늘어진 전깃줄에서 나온 백열등이 귤을 또 센다
초코파이가 들어와 부풀어 오른 비닐봉투 배가 불룩하다
'이게 모두 얼마예요' 그래서 '이게 모두 다 얼마예요'
'이게 모두 얼마예요' 와 '이게 모두 다 얼마예요' 라는
말을 들은 귤과 초코파이의 몸이 욱신욱신 속이 상해서 비닐봉투에 들어 있다
자정이 넘어서 귤을 벗기고 있는 소녀와 소녀를 벗기고 있는 기계소리가 아프다
'오늘밤이 지나면 얼마를 줄 거예요?'
귤을 벗긴 이의 손톱은 달을 파먹은 것처럼 노랗게 물이 들었다
무심한 달빛이 공장 지붕을 아프게 지나간다
생의 한가운데로 떨어지는 빗소리/ 이기인
이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아니었는데 하는 미련의 저녁
문밖의 빗소리 출렁출렁 귀로 넘치고
오래된 둑을 무너뜨리고
못생긴 돌멩이와 땅에 박힌 나무뿌리를 뽑아가지고 어데로 간다고 출렁출렁 비가 온다
이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이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아프고 아프다고
돌멩이와 나무뿌리가 뽑혀서 질질 끌려가지 않으려고 한다
먼 데 사는 이의 집이 많이 젖을까 싶어 텔레비전 화면을 틀었을 때
비 맞은 현대식 건물에서 정규직이 아닌 이들이 와르르 어데로 가라고 빗물처럼 쓸려나온다
이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아니었는데 빗소리가 이상하게 내 집 지붕 위로도 떨어진다
울음소리와 신음소리와 웃음소리의 구별이 힘들어진 늦은 저녁 빗소리
밤새 차가운 지붕을 둥둥 두드린다
마른 눈동자의 정규직 아닌 이들이 나의 한가운데로 떨어지는 빗소리 속에서
잠이 또 깬다
송곳이 놓여있는 자리/ 이기인
저녁에 동그란 상처를 가진 이들이 모여들었다
누군가 라면상자에서 꺼낸 서류철을 보며 그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기 시작한다
송곳으로 뚫어서 묶어놓은 명단의 이름은 길고 긴 밭고랑처럼 길고 순하다
송곳하나 후빌 땅이 없어서 마음에 구멍을 하나씩 만들고 죽은 사람들이다
이제 이들은 죽어서 검은 표지의 송곳 구멍을 하나씩 갖게 되었다
나는 오늘 송곳 끝에 매달린 빛을 보다 책상 위의 핏자국을 하나 지운다
구멍이 많은 하늘이 빛을 흘리고 있다
소금꽃/ 이기인
그날에
당신의 생일을 축하하러 가지 못한 것은 공장에 피어 있는 꽃 생각 때문이네
오직 나를 위해 피어난 꽃그늘이 있는데
그 꽃들은 생일도 없이 한줄기 꽃으로 혼자서 피어 있네
일하는 사람의 젖은 작업복을 보면서 한나절을 걱정한 적 있는데
그의 등에 소금꽃이 하얗게 핀 걸 나중에 나중에야 보았네
등에 핀 꽃을 보지 못하였던 이, 밥풀냄새 나는 젖은 가슴을 안고서
그날에
버석버석한 웃음 흘리며 한송이 꽃처럼 흔들, 흔들거렸네
그날에 그의 생일을 축하해주러 온 이는
공장에서부터 따라와 그의 등에 미안하게 앉아있는 하얀 소금꽃이었네
어깨 위로 떨어지는 사소한 편지/ 이기인
균형을 잃어버리고 있는 내가 당신의 어깨를 본다
내일은 소리 없이 더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
나는 초조를 잃어버리고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더 좋은 표정을 지을 수 있다
첫눈이 쌓여서 가는 길이 환하고 넓어질 것 같다
소처럼 미안하게 걸어 다니는 일이 이어지지만 끝까지 정든 집으로 몸을 끌고 갈 수 있을 것 같다
나를 닮아가는 구두짝을 우스꽝스럽게 벗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밤늦게 지붕을 걸어 다니는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가만히 껴안아 줄 수 있을 것 같다
벽에 걸어놓은 옷에서 흘러내리는 주름 같은 말을 알아듣고
벗어놓은 양말에 뭉쳐진 검정 언어를 잘 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매트리스에서 튀어나오지 않은 삐걱삐걱 고백을 오늘밤에는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요구하지 않았지만 당신의 어깨는 초라한 편지를 쓰는 불빛을 걱정하다가
아득한 절벽에 놓인 방의 열쇠를 나에게 주었다
자기중심을 잃어버린 별들이 옥상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본다
뒤척이는 불빛이 나비처럼 긴 밤을 간다
소녀의 꽃무늬 혁명/ 이기인
소녀는 꽃무늬 혁명을 하나 떠야 한다고 했지요
왼편의 대바늘과 오른편의 대바늘 사이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붉은 실타래는
소녀의 혁명을 돕기도 했지요
아버지의 혁명은
아버지의 구식 혁명으로 끝나버리고
한 코 한 코 풀어지면서
새로운 혁명을 끌어내야 한다고
털옷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장롱 속에서 나왔죠
낡은 털실은 팽팽한 긴장감을 놓지 않으면서
혁명가를 계속 불렀지요
그 옆에서 소녀의 꽃무늬 혁명은
계속 줄기를 뻗어나갔지요
풀어진 아버지의 혁명은
새 혁명의 넝쿨로 이어졌죠
소녀의 꽃무늬 혁명이 성공을 거둔다면
이 겨울도 이젠 춥지 않을 거라 믿었죠
붉은 실타래의 아우성이 무릎 위에 놓여 있다
차가운 책상다리 밑으로 기어들어갔죠
어두운 그곳에서 뭐해?
혁명을 꿈꾸는 실타래가 다시 뒹굴뒹굴 나오면서
실오라기 하나를 데리고 나왔죠
문득문득 소녀의 혁명이 모자라지 않나,
소 눈동자만 해진 털실을 바라보며 불안했죠
어서어서 꽃무늬 혁명을 하나 떠서,
추위에 떠는 당신께 가야 한다고 말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