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속의 세 한국인 재벌(손정의, 한창우, 유봉식)
한국인이면서 제일 성공한 사람은 뭐니뭐니해도 일본 천황일 것이다.
천황가에 대해선 전번에 글을 올렸고
이번에는 재계(財界)의 성공적인 세분의 이야기를 할까한다.
**일본의 소프트뱅크창시자 손정의(孫正義.1957년생.재일교포)
*조센진이라고 놀림을 받다
일본에서 태어난 3세대 재일교포로 소프트뱅크 대표이사 회장. 학력캘리포니아
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호적상에 한국이름인 '손정의'로 등재하려고 했을 때 거부당하자
일본인인 부인이 먼저 손씨 성으로 등재한 후 '손정의'라는 이름으로 등재할 정도로,
국적은 일본인이지만 항상 자기 자신의 혈관을 흐르는 피는 한국인임을 잊지 않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다.
일본 최고의 기업가이자 갑부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는 1957년 8월 규슈에서 태어났다.
그의 성장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할아버지와 부모가 모두 한국인인 그는 조센진이라는 놀림을 수없이 받았다.
일본 학생이 던진 돌멩이에 맞은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고 어린 손정의가 입었을
마음의 상처는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16살 때인 1974년 손정의는 부모를 두고 혼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어렵사리 미국에 도착한 그는 먼저 자신의 일본 성을 버리고 한국 성인 손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공부에 올인했다. 2주일 만에 고등학교 3년 과정을 마치고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 경제학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 1년에 250여 건의 발명품을 만들었고, 일본어를 영어로 번역해주는
번역장치를 개발해 100만 달러에 팔기도 했다.
1981년 9월, 일본 경영종합연구소와 반반씩 출자하여 자본금 1천만 엔으로 일본소프트뱅크를
설립후 1990년에 일본소프트뱅크에서 소프트뱅크(IT통신사)로 이름을
변경했고 야후와 TV아사히 지분을 인수했다.
일본내 소프트 통신사 기지국만 13만개가 넘는다고 한다.
*일본 제1의 부자
-17세에 스스로의 힘으로 가족의 반대를 이겨내고 미국으로 홀로 유학.
-교장 선생님을 설득하여 2년을 월반. 시험 감독관을 설득하면서까지 검정 시험을
치루는 의지.
-19세에 지금은 보편화된 말하는 어학사전기술을 개발하고 샤프에 특허권을 판매.
-20세에 대학생 신분으로 미국에서 창업성공.
-23세 일본으로 돌아와 현재 일본 굴지의 기업을 일구고 인터넷 비즈니스의 황제가
된 사람
-그는 제일 교포 3세로, 1981년에 소프트웨어 판매 회사인 '소프트뱅크'를 세워
10여 년 만에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들었다. 미국의 경제 잡지 포브스가 발표한
'일본의 30대 부자'에서 1위로 선정되었다. 또한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뽑히기도 했다. 열아홉 살에 '인생 50년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긴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재산은 5조 3천억원 이라한다.
*일 화
손정의가 일본에 돌아와 일본소프트뱅크를 설립할 때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는 어느날 조그만 지하실에서 아르바이트생 두 명을 앞에 두고 나무 사과상자 위에
올라갔다.
“우리는 일본을 넘어 세계 최고의 IT기업이 될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작은 중소기업이
아니라 일본을 대표하고 세계에 이름을 날리는 최고 기업이다.”
일종의 회사 창립 기념사였다.
기념사가 끝나자마자 박수대신 고함이 쏟아졌다.
“미친 놈!”
“세상물정 모르는 하룻강아지 같은 놈!”
두 명의 아르바이트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하실을 나갔다.
“내 꿈이 허황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다!..”
이후 손정의는 자신의 꿈을 향해 차근차근 회사를 키워갔다.
그리고 달콤한 열매와 성공을 손에 쥐었다.
소프트뱅크 CEO 손정의가 지난 일본 대지진과 쓰나미 피해를 입은 이재민을 위해
개인돈 100억엔(약 1291억원)을 기부한 것으로 알려져 화제다.
손정의 대표의 100억엔은 개인 기부자 중엔 최고액인 것으로 알려졌고 손 대표는 일본
프로야구 구단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오너이기도 하며 개인재산이
약 81억달러로 미국 경제지 포브스가 뽑은 일본인 1위를 기록하는 등
재일동포 중 일본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인 중 한명이다
이같은 소식을 접한 일본 누리꾼들은 "총리가 돼달라"고 요구하기도 했으며
"S사는 탈세하고 다른 쪽은 기부하는 구나" 등의 반응을 보였다.
손정의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도망쳐버린 그 아르바이트생은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일본 최고 기업의 창립멤버가 될 수도 있었던 좋은 기회를 그들은 스스로
박차고 나간 것이다.
오늘날 대기업으로 성장한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와 애플의 스티브 잡스의 출발
또한 허름한 차고였다. 비록 작고 초라한 출발이었지만 그들의 가슴 속에는 큰 꿈이
도사리고 있었다.
**마루한 창업자 한창우(韓昌祐.1931년 2월생)
*파칭코계의 왕자
1931년 2월 15일 경상남도 사천시 삼천포 출생으로 재일 한국인 기업가이다.
16살에 일본 밀항, 1947년 10월 미장일을 하던 형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다.
종전의 혼란기에 특별 영주자격을 취득, 호세이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였으나 일자리가
없는데다 차별도 심해 매형의 파친코 점에서 일을 도왔다. 얼마 후 운영난을 겪던
매형의 가게를 헐값에 인수하였고 파친코 사업에서 번 자금을 기반으로 레스토랑을 경영,
1967년에는 당시 일본에서 큰 인기를 누리던 볼링장 사업을 시작했지만 1차 오일쇼크가
터지며 볼링 인구가 급감했다. 그로 인해 5년 만에 600억 원의 부채를 지게 됐다.
그러나 1972년 ‘마루한’을 설립하고 다시 파친코 사업에 전념했다. 그 결과 10년후 그는
어마어마한 부채를 갚을 수 있었다. 1995년에는 도쿄 진출에 성공, 마루한을 최대급
파친코점으로 성공 시키게 되었으며 2002년 미국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억만장자에
일본 국내 22위에 선정되었다.
*년간 매출이 30조
일본 전국에 점포 214개와 종업원 9천여명이며 재산이 무려 1천320억엔 우리돈으로
약 1조1천억원이라고 하며
일본 마루한 그룹 창업자 겸 회장인 그는 일본 파칭코 업계 점유율 70%의 파칭코계
최고의 기업인이다.
게다가 파칭코 업계 뿐만 아니라 다방면의 엔터테인먼트, 요식, 청소용역, 광고, 건축,
보험, 은행까지 에도 발을 뻗어 경영하고 있으며
마루한이라는 이름이 생소해서 상상이 안가실텐데 얼마나 크냐면 연간 매출이 30조원에
달할 정도다.
더불어 추가 설명 드리자면, 마루한의 CEO인 한창우 회장은
경남 사천 고향에 재단을 설립하여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을 쓰시는분 이기도하다.
**일본 제일의 MK택시회사 사장 유봉식(兪奉植,1928년 6월생)
*밀항한 사나이
유봉식는 일본의 사업가이다. 택시 회사인 MK 택시를 설립했고 현재는 긴키 산업
신용조합 회장이며 경상남도 남해군에서 태어났다.
16세에 일본으로 밀항, 1943년에 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리쓰메이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1년 리쓰메이칸 대학교 법학부를 중퇴했다.
교토에서 석유장사를 시작으로 60년대 차량 10대로 택시회사 미나미택시회사를 설립,
30대를 보유하고 있던 가츠라 택시를 인수하여
미나미와 가츠라의 이니셜인 M,K를 따서 MK그룹을 설립했다. MK 택시는
시내의 택시 요금 인상을 단독으로 반대하여 요금 인하를 계속 추진하였으며,
이동의 자유를 누리기 힘든 장애인 손님을 먼저 모시도록 한 철저한 친절 교육과
전문 의상 디자이너에게 맡겨서 만든 의상을 입도록 하는 양질의 서비스로 손님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의 일생과 경영 철학은 KBS에서 1991년 12월 말 임동진이 출연한 드라마
"교토 25시"로 제작한 바 있다
일본에서 제일의 친절하고 깨끗하고 기사들이 입사하고 싶어 하는 택시 회사로
택시 지붕위에 엠케이 라는 이 하트모양의 택시를 타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한다.
전 사원은 정복으로 넥타이를 매고 근무하며 친절도가 불만족 하다고 신고 하는 고객은
승차비를 환불 받으며
일본의 자동차와 같은 대규모 회사들의 사원 교육을 사장님의 회사의 친절도 교육
받은 것을 자랑할 정도라 한다.
이런 것은 우리가 본받아 실천 하면 좋을거라..
*일 화
일본의 MK택시 회사가 한창 성장할 때의 일이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세력이 노골적인
방해를 하기 시작했다. 날마다 시위대들이 유봉식 사장의 집 앞에까지 몰려와서 시위를
벌였다. 그들이 들고 있는 피켓에는 ‘한국인을 쫓아내자’라는 문구도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적과 싸워야 하는 유봉식 사장은 견디기 힘들었다.
게다가 어떤 정당한 이유로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유봉식 사장은 왜 이렇게 방해를 하는 거냐고, 도대체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소리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느 날 밤새 잠 한숨 자지 못하고 초췌하게 앉아 있는 그에게 아내는 아침상을 차려
주면서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망하면 어때요? 다시 방 한 칸에서 시작하면 되지요.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세요. 늘 그래왔던 것처럼요. 옳은 일은 언젠가는 반드시
인정을 받게 되어 있어요. 나는 당신을 믿어요.”
유봉식 사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평소 말이 없고 큰 소리 한 번 안 내던 아내의
그 말 한 마디는 약해진 그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그는 당장 회사로 달려가 전 사원을
모아 놓고 타협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리고 다시 힘을 내어
장애물과 싸워서 위기를 넘기고 MK택시 신화를 만들었다.
유봉식 사장의 성공 뒤에는 격려의 말 한 마디를 해 주는 아내가 있었던 것이다
전후 일본도 경제가 어려워졌다. 그때만 해도 일본인들도 먹고살기에 바빠서 친절이라는
개념이 사회 저변에 깊이 인식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더구나 3D 업종의 하나인 택시
서비스는 기대 이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때 MK택시 친절경영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이다. 택시 기사들에 대한 전면 월급제를 제일 일찍 시작한 곳도 MK택시였다.
MK택시의 친절이 소문으로 퍼지면서 시민들은 가능하면 MK택시를 이용하는 일이
벌어졌고 급기야 매스컴에 오르내리면서 MK택시는 유명해졌다.
그러나 MK택시는 업계에서 질투의 대상이 되었고 경쟁 회사들의 직원 빼돌리기 작전이
펼쳐졌고 MK택시를 고사시키기 위하여 온갖 회유와 핍박으로 그리고 높은 임금을
제시하면서 기사들을 빼가기 시작한다. 당시 MK택시는 사장도 직접 차를 몰고 나가서
영업을 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결국 유봉식, 유태식(동생.부사장)형제만 남기고
거의 모든 기사들이 출근하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
하지만 여기에 굴복할 사람들이 아니었던 형제는 계속해서 직원들을 보충하면서
경영을 해나간다.
MK그룹은 지난 1960년대 일본에서 10대의 택시로 회사를 창립해 현재 2000여대의
택시와 30여개의 주유소를 보유한 일류기업이다.
또한 MK그룹은 적자에 허덕이던 긴키산업협동조합(근기산업신용조합)을 인수해 100배
성장을 이룩하는 등 금융업계 성공신화 창조와 함께 일본 대학생들이 가장 취업하고
싶은 1위 기업으로 선정된 일본 재계의 신화적 기업이다.
현재 MK택시는 2000여대의 택시를 보유하고 있으며 5000여명의 직원들이 MK정신인
친절서비스를 실천하고
교토,오사카나고야,고베등 10개의 일본도시에서 최고의 택시로 운영되고 있다.
또한 긴키 조합은 전국 32곳에 지점을 갖고 총예금 1조2054억엔, 총대출금 6173억엔,
당기순이익 40억6900만 엔의 일본 최대 규모의 신용조합이다.
유봉식 사장은 현재 비상근이사로 물러나 쉬고 있다.
위의 세분이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일까요?
저위의 세 분 말고도 일본 각계에는 한국교포들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고
온갖 질시와 차별속에서도 한계를 극복하고 일본인들을 넘어선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 한국인의 우수성인 은근과 끈기 그리고 근면성을 이어나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