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의 「표해록」은 앞서 「조선 명저 기행」에서 이미 소개한 적이 있다. 「표해록」은 문관인 최
부가 추쇄경차관에 제수되어 도망친 노비들을 추포하기 위해 제주도에 갔다가, 부친의 부음을 받고
나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한 내력을 자세하게 기록한 책이다. 이종호는 최부(1454~1504)를
세종 대의 이순지, 정조 대의 정약용과 함께 조선의 3대 천재로 꼽고 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저자
최부와 「표해록」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은, 그가 갑자사화 때 역모로 몰려 죽으면서 그가
지은 모든 기록이 금서로 묶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부는 24세에 성균관에 들어가 사림파 영수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김종직의 문하생들
은 성종 13년에 실시된 친시문과 급제자 8명 중 최부를 포함하여 4명이나 되었다. 그 빼어난 실력으
로 최부는 성종 17년에 실시된 문과중시에도 거뜬히 합격하여 이듬해 추쇄경차관에 제수되었던 것이
다. 최부 일행은 표류 중 중국 연안에 닿아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다 빼앗기고 목숨만 겨우 부지하여
장장 4천㎞를 강행군한 끝에 구사일생으로 귀국했다.
최부는 소주‧소흥‧항주 등 중국 강남지역의 명승지를 차례로 거쳐 왔는데, 그 지역에 얽힌 역사적 사
건과 풍속과 전설 등을 자세히 기록하여 중국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을 엿볼 수 있다. 명나라 효종
연간의 사회상, 해금(海禁. 연안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하도록 금한 중국의 법규)과 해안방어시설 등
도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최부는 넉 달 넘게 걸려 대운하지역을 통과했는데, 수백 개에 달하는 역참
의 이름 및 생김새와 주변 지세까지 빠짐없이 수록해놓았다. 그는 그 모든 것을 오로지 기억에 의존
하여 상세한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중국의 학자들도 「표해록」을 중국의 3대 여행기로 평가할 정
도로 주요 사료로 대접하고 있다.
중국의 남방 사람들은 세심하고 북방 사람들은 호방하다는 차이점과 함께 여러 가지 공통점도 서술
되어 있다. 문헌의 가치는 그 정확성에 있는데, 「표해록」은 일시‧장소‧인물 등이 구체적으로 명기
되어 있다. 또한 직접 체험한 것과 중국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구분하여 기록함으로써 객관성을
더했다. 천재적인 기억력과 예리한 관찰력의 백미는 각 지역이나 역참 이름과 그 사이의 거리다. 최
부는 중국 강남에서부터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이르는 4천여㎞ 사이에 있는 모든 지명과 지역 간의
거리는 물론 중간에 설치되어 있는 각종 시설의 이름과 용도와 생김새까지 빠짐없이 나열해놓았다.
최부는 귀국하자마자 성종을 알현하여 그간의 정황을 낱낱이 보고한 뒤, 임지를 무단이탈한 죄에 대
해 벌을 청했다. 성종은 불가항력이었으니 죄를 묻지 않겠다고 하교한 다음, 지금 말했던 내용을 보
고서로 작성하여 올리라고 명했다. 「표해록」은 성종의 명에 따라 단 8일 동안 순전히 기억에 의존
하여 불철주야 써내려간 한자 5만 자 분량의 보고서다. 「표해록」 중 ⅔는 중국 강남에서 북경까지
8800여 리를 걸어오면서 직접 보고 들은 내용이다.
「표해록」이 나오기 전에 조선에는 사신들이 중국을 다녀오면서 작성한 보고서인 「연행록」이 이
미 407종이나 간행되어 있었다. 그 「연행록」과 구별하기 위해 제목을 「표해록」으로 붙였다. 왕
명에 의한 보고서이므로 처음에는 서문과 발문 없이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재미에 빠져 밤을 새워
「표해록」을 끝까지 읽어본 성종은 그 방대하고도 상세한 기록에 깊이 매료되어 최부에게 특별히
말 한 필과 포 50필을 하사했다. 이후 선조 2년(1569), 평안도 관찰사 유희춘이 「표해록」을 목판본
으로 간행하여 전국에 널리 보급되었다.
성종이 최부를 사헌부 지평(정오품)에 제수하자 사간원에서 왕명에 비토를 놓았다. 최부가 상중(喪
中)에 「표해록」을 썼다는 이유였다. 최부는 부친의 부음을 듣고 제주에서 나주로 가던 도중 풍랑을
만났던 것이니, 귀국하여 「표해록」을 쓸 때도 분명 상중이었다. 성종이 왕명에 의해 「표해록」을
썼기 때문에 최부에게는 죄가 없다고 두둔했지만, 사간원은 몽니를 거두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성
종은 1년을 기다렸다가 하루 만에 최부를 홍문관 교리(정오품)→홍문관 부응교(종사품)→예문관 응
교(정사품)에 제수하여 사간원을 무색케 했다.
연산군이 보위에 오른 뒤 최부는 정승들의 실정(失政)을 간하여 고관대작들의 눈 밖에 난 결과 무오
사화에 얽혀 유배형을 받았다. 이후에도 바른 소리를 계속하던 최부는 갑자사화 때 역모의 누명을 쓰
고 노비로 강등되어 유배를 가다가, 도중에 잡혀 와 참형을 당했다. 이때 「표해록」도 회수되어 분
서(焚書)에 처해졌다. 훗날 『연산군일기』를 쓴 사관은 최부를 ‘남이나 조광조처럼 능력도 탁월했고
맡은 일도 원만하게 처결했으되, 고관대작들에 대해 예외 없이 법대로만 처리하다가 미움을 사서 스
스로 명을 단축했다’고 평가했다.
글의 말미에 저자 이종호는 최부를 과학자 반열에 올려놓은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해놓았다.
‘남극이나 북극을 탐험한 뒤 논문을 제출한 사람들도 모두 과학자로 분류한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에어컨 냉방증에 걸려 종종 기침과 재채기가 여전 합니다. 하루종일 에어콘이 작동되는 곳에서 그것도 몇차레 냉탕만을 들락거리니 그럴만한 원인제공 입니다. 그래도 아침.저녁으로는 시원하여 문만 열어 놓으면 지낼만 합니다. 이러다 청명한 하늘과 함께 가을이 성큼 오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침 나절 주변 산책도 하시며 즐겁게 일상을 맞이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