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투데이라는 사이트의 나도 평론가라는 코너에 올라 왔던 글들입니다. 참고 되셨으면 하네요.(참고로 제가 쓴 글도 있습니다...^^;)
-------------------------------------------------------------------
제목: 환타지, 무협, 문학인가 아닌가
콘텐츠미디어 편집부 편집장 양수연
전철 속에 앉아 문득 주위를 둘러본다. 신문을 보는 사람들, 잠을 청해보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이로 여기저기 책을 보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심심한 김에 무슨 책을 읽는 것인가 슬쩍 눈에 힘을 모으고 주시해본다. 폴라리스 랩소디,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 비뢰도, 마왕의 육아일기, 묵향... 약 세 권 당 두 권은 환타지 아니면 무협 소설들이다. 실은 이렇게 말을 하는 나의 가방 안에도 무협소설 한 권이 반듯하게 누워 있다.
어차피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 그 분주한 생활 속의 짧은 휴식 시간을 잘라내 <니체의 철학적 사상 고찰>이라든가 <역사적 고적 발굴에 대한 인류학적 시각> 같은 책들을 읽기는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이를 차치하고라도 환타지와 무협 소설을 포함한 장르문학은 이미 만화책 못지 않게 대중문화의 여기저기에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이렇게 된 저변에는 퇴마록을 기조로 한 통신문학의 발달과 대여점 문화라는 든든한 배후지원이 자리를 잡고 있으나, 장르문학의 마력이라는 것도 톡톡히 그 몫을 다하고 있다.
장르문학이 사람들에게 읽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쉽고 재미있고 때로는 감동적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기저기 퍼져있는 대여점을 통해서 부담 없이 빌려볼 수도 있고, 통신이나 인터넷에 접속하면 곳곳에서 연재되는 작품들을 무료로 읽어볼 수도 있다. 특히 학생들이나 젊은 세대들에 있어 이 장르문학이란 것은 '읽는 것'만이 아닌 즐거운 '쓰기'의 기회로 여겨지기도 해서, 일부 장르의 작가 평균 연령은 20대 이하의 젊은 학생층으로 떨어지는 기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제 상당수의 학생들은 교과서나 대 문학전집 속의 순수소설보다는 대여점에 꽂힌 환타지, 무협 소설로부터 문학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하고 있다.
환타지와 무협소설이 문학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많다. 장르문학이 순수문학에 비해 그 시장성만큼이나 천대를 받아 왔다는 점은, 일전의 동인문학상 심사 논쟁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해볼 수 있다. 조선일보 2001년 5월 7일자 신문을 참조해보면, 동인문학상의 심사위원들은 "최근 일각에서 진행되고 있는 대중/본격 문학 논쟁은 대중문학을 문학의 한 파트너로 삼아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문제를 일으킨다는 점을 재확인시킨 계기였다"고 그 입장을 밝히고 있다. 또한 심사위원들은 "대중/통속 소설을 붙들고 싸워주는 것만 해도 그들을 격상시켜주는 결과를 낳는다"면서 "대중문학을 아예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해외 본격문단의 분위기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즉, 장르문학을 중심으로 한 대중문학은 '문학적 평가'의 후보로 논의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논쟁을 두고 각 장르문학을 주축으로 한 게시판이나 소모임, 동호회 등에서는 장르문학의 문학성에 대해 한동안 불이 붙었었다. 물론 대부분의 결론은 '대중들에게 팔리는 문학이 곧 대중문학인데, 순수문학은 대중과 괴리되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렇게 평할 자격이 없다', 혹은 '읽히지 않는 소설은 가치가 없다' 등으로 귀결되었지만, 한 번쯤은 장르문학이 왜 그리 천시 받는 것인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선 무협소설을 지난 긴 세월동안 통속적이고 천박한 소설로 천대받게 만들어온 이전의 대본소 생산 체제, 그리고 대필이나 가필의 공장식 생산과정, 더불어 주제의식 없는 성적인 묘사 등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신무협'이라 지칭되는 현재의 무협소설들과 환타지 소설들이 문학의 장르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만화와 다를 게 뭐냐'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적에는 앞부분을 조금 보면 결말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틀에 짜인 전개, 과장된 묘사와 문장력의 부족, 글 전체에 묻어나는 통신문학 특유의 가벼움, 전형적인 캐릭터와 현실성이 떨어지는 구성적 장치들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이 일반적인 기준이라는 것은 개개의 대상에 적용해볼 경우 너무나 다른 진술인 경우가 많다. 일부의 환타지 소설이나 무협소설 역시 그렇고, '만화적'이라는 표현 역시 그렇다. 장르문학의 독자들, 그리고 만화를 많이 읽어본 독자들이라면, "얼마나 문학적인 감동을 주는 환타지 소설(혹은 무협소설)이 많은데!", 혹은 "얼마나 수준 높고 치밀하며 감동적인 만화가 많은데!"라고 반박을 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
일단 '만화적'이라는 지적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틀에 짜인 전개'가 문제시되는 것은 그 자체로는 크게 지적할만한 요소가 아닐지도 모른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햄릿>, <죄와 벌> 같은 소설이 명작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뒤를 예측할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뻔하게 예측이 되는 상황에서도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 때문이 아닐까. 장르문학에서 틀에 짜인 전개가 문제시된다면, 그것은 그 전개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스토리 전개와 재미 외의 어떤 감동의 요소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더 이상 세상에 새로운 소재는 없다'라는 말이 있다. 같은 소재, 같은 주제와 결말을 가지고도 어떻게 풀어 가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뻔한 전개인데도 사람들이 계속 읽는 것, 게다가 현실성이 떨어지는 듯한 구성이나 내용에서 감동을 얻는 것만으로도 장르문학은 아직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통신문학 특유의 가벼움, 과장된 묘사와 문장력의 부족 같은 것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미 통신문학 내에서도 자체적인 정화작용을 거치며 상당부분이 개선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형적인 캐릭터의 문제는 기존의 순수문학에서 나타나는 것과 동일한 문제이니, 따로 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된다.
과거를 돌아보자. 클래식도 초창기에는 대중음악이었고, 재즈는 처음 등장했을 때 악마의 음악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고려가요들은 불태워졌으며, 판소리 소설은 아녀자들이나 읽는 것이라고 간주되었던 때가 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어느 누가 이것들을 '예술성이 없는 쓰레기'라고 비난하는가.
장르문학의 역사는 아직 길지 않다. 아직까지 대부분의 장르문학 소설들은 '재미'라는 것을 빼놓고 볼 때 여러 면에서 가볍고 부족할지 모른다. 그래도 최소한 이 소설들은 많은 사람들이 활발하게 즐기고, 논의하고, 고민하고 있다. 아직은 장르문학의 미래를 단언할 수 없지만, 대중에게는 '대중' 나름의 정화작용과 안목이 있다. 예술성과 가능성은, 대중들 속에서 나올 때만이 그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르문학을 두고 "대중문학을 아예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해외 본격문단의 분위기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좀 더 기다려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
위에서 문제제기 했던 환타지따위의 글들... 그리고 원태연을 위시한 노래가사같은 글들의 모음... 이러한 것들을, 드래곤 라자 같은 것들을 문학이라고 할수 있을까?
가장 기본적인 사고로 돌아가서, 고등학교 문학책에 보면, 문학이란 인간의 감정을 절제된 글들로 표현한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유명인들의, 클래식한 작가들의 글들만을 문학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제기하는 문제점은 환타지, 무협따위가 얼마나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우리들의 현재 생활을 대변하고 있냐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글들이 미래의 한50여년후의 세상모습을 미리 보여준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비문학. 그렇다 이를 비문학이라고 하면 적당할 것이다. 과연 이러한 글들에 현재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라던지 삶의 모습들을 그 단편이라도 볼수 있을까? 대답은 아니다. 너무도 허무맹랑하고 어이가 없어서 거기에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인다. 사실 이러한 비판의 글을 올리려면 환타지나 무협을 읽어보고 왜 그것이 비문학이라고 밖에 치부할수 없는지 근거를 밝혀야 하겠지만 전혀 읽고 싶은 맘이 없기에 그냥 의견을 적은 것이다. 비문학으로 간주하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거기에 등장하는 삶의 모습은 우리가 아니다. 이 간단한 이유만으로도 이를 문학이라는 범주에 넣을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이들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비문학임에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여러 글들이 있다. 이들을(환타지, 무협...) 차라리 그렇게 생각했으면 한다. 이들이 문학이 아님은 자명한 것이다.
------------------------------------------------------------------
다시 이글에 대한 반박 리플 세개입니다.
------------------------------------------------------------------
제목: 문학임
순천효천고등학교 졸업반 학생 조종현
'인간의 감성'을 절제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문학이라면, 그것은 유치원 또는 초등학생이 방학때 쓰는 그림일기 부터 임종을 목전에 둔 노인의 유서까지 모두를 아우를 것입니다.
일단 문제가 되고 있는 환타지 소설 '드래곤 라자'는 제가 읽은 소설이므로 얘기해 보죠. 이 소설은 보통 소설이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로만 이루어져, 인간 개체 또는 한 민족, 즉 인간의 부분 부분만을 비추었던 것이 대부분 이었던 것에 비해, 다른 종족간의 관계, 대조에서 나타나는 인간 전체의 특성 즉, 감성을 보여줍니다.
읽어보신다면 한낱 심심풀이 땅콩으로 치부하시던 글나부랭이에 옛 삼국지를 방불하는 스케일과 섬세한 감정묘사,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으실겁니다. 언제나 작품에 대한 음미 없이는 작품에 대한 바람직하지 못한 이해를 낳기 마련이죠. 자기의 관觀을 비껴가는 것들에 대해서는 일단 쌍지팡이 짚고 막아서는게 사람 심리 아닌가요? 이상의 오감도가 처음 개제되었을 때의 사람들 반응을 떠올려 보세요. 또, 적절한 비유가 될진 모르겠지만, 조이스의 오디세이가 처음 나왔을때 그 작품을 두고 얼마나 분쟁이 많았습니까?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지만서도, 새로운 것에 대한 사람의 거부감이 이렇게 심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꿈을 꿉니다. 발은 대지에 대고 있지만 언제나 눈은 하늘로 향해있는 것이 인간이죠. 언제나 현실 속에서만 살 수는 없습니다. 환타지는 꿈에 속하는 문학입니다.
또한 환타지를 문학으로 보지 않으신다면 sf계열의 작품은 모두 문학이 아닐 것이고 수많은 걸출한 작가들이 사라지겠네요. '반지의 제왕' 또는 '반지의 전쟁' 이라는 환타지 소설의 효시가 되는 소설의 작가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작가임을 밝혀둡니다.
------------------------------------------------------------------
제목 : 현실을 실제적으로 반영한 것만이 문학일까요?
부산국제고등학교 박덕봉
현실을 실제적으로 반영해야만 문학이라는 사고는 잘못된 것이라 봅니다.
"문학이란 인간의 감정을 절제된 글들로 표현한것을 말한다"는 정의에는 인간의 현실 생활 모습을 사실적으로 반영해야 한다는 뜻은 없습니다. 인간의 감정을 어떤 수단으로 나타내야 한다는 법은 없다는 말이죠. 그 수단에 따라서 문학의 장르를 구분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수단에 따라 문학 비문학을 구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가 그 당시 사람들의 실생활을 대변한 것일까요.
밀턴의 실낙원은 비문학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어떻습니까.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나 1984도 문학이라 부를수 없을까요.
환상 문학의 종류는 광범위합니다. 현대에 이르면 카프카의 변신이나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도 환상문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 같은 작품도 한 예죠.
그런 작품들은 최소한의 현실적 설정이 있다고 반론을 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국내의 소드월드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거나 무협물도 환상문학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을것입니다.
환상문학의 질이 문제라면 순수문학 중에서도 수준에 못미치는 작품들이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내 환상문학의 종류가 소위 판타지물과 무협에 국한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저변으로 해 언젠가 수준 높은 작품이 탄생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환상문학은 결코 쓰레기 따위가 아닙니다.
------------------------------------------------------------------
제목 : 그런 생각은 그저 부르주와지의 쓸데없는 추억.
포항공과대학교 학부생 이선휴
먼저, "소비자를 염두에 두지 않은 '예술'은 사기"입니다.
<백남준>
오오, "순수"문학이라니. 그런 게 존재하기는 했단 말인가?
소위 "순수문학"이라는 것들은, 그저 구시대에
전문 예술인집단에 의해 창작된 예술의
주된 향유자(부르주와지?)가 즐겨 소비하던
그런 문학의 적손(嫡孫)일 뿐입니다.
이제 종가는 완전히 퇴락하여,
문전옥답과 고래등같은 저택은 온데간데 없고,
초가 삼간만 남아서 늙고 병든 종손이 거기에
살고 있습니다.
분명히 자기 가문의 천명이 다하여, 조정에
나아가서 국사를 좌우하던 시절이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이 늙다리 몰락양반은 "천석고황" 이니,
"연하고질" 하는 청담이나 읇조리며 조을고 있습니다.
제 배에서는 쪼르륵 소리조차 나지 않은지 오래인데,
"조정의 간신배들의 이전투구가 더러워서"
관직에 나아가지 않는다고 자위를 합니다.
어쩌다가 인삼장사하는 거상인 먼 친척 한사람이
쌀가마나 갖다주면, 속으로는 좋아하면서도
겉으로는 있는 위엄 없는 체면 다 짜내면서
상놈앞에 양반 행세를 합니다.
신문연재소설이나 끄적대는 상업작가 도스토옙프스키,
멜로드라마나 쓰는 3류작가 찰스 디킨스,
이런 따위로 이루어진 기존문학의 전통이라면야,
대중문학을 재단할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위에서 언급된 도스토엡프스키나 디킨스에 대한 모욕적
평가는, 당대 평론가들 일반에 의한 것입니다.
지극히 당연히, 이런 평가는 당시 평론가들의
속물스러운 정예의식에 사로잡힌 것일 테죠.
그러면 당신은?
대중문학을 삿대질하는 당신의 손,
손가락 셋은 당신을 가리킵니다.
(사족: 제가 좋아하는 "서포만필"의 유명한 부분.
수능에도 나왔던가...?)
......사람의 마음이 입으로 표현된 것이 말이요, 말의 가락에 있는 것이 시가문부(詩歌文賦)이다. 사방의 말이 비록 같지는 않더라도 진실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각각 그 말에 따라 가락을 맞춘다면, 다같이 천지를 감동시키고 귀신을 통할 수가 있는 것은 유독 중국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시문은 자기말을 버려 두고 다른 나라말을 배워서 표현한 것이니, 설사 아주 비슷하다 하더라도 이는 단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거이다. 여염집 골목길에서 나뭇꾼이나 물 긷는 아낙네들이 에야디야 하며 서로 주고 받는 노래가 비록 저속하다 하여도 그 진가(眞假)를 따진다면, 정녕 학사(學士) 대부(大夫)들의 이른바 시부(詩賦)라고 하는 것과 같은 입장에서 논할 수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