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중 외출] 정병경.
ㅡ명동길ㅡ
비오는 날에 대한 추억을 그려본다. 친구 내원과 용진의 차로 빗길을 가르며 맛집으로 나선다. 가을비 치고는 제법 많은 양이다.
명동교자집 앞은 칼국수를 먹기 위해 점심 때부터 인산인해다.
젊은 시절 크리스마스 전날 목적 없이 누빈 명동 밤길, 눈에 선하다. 근래에는 특별한 일없어 시내 발걸음이 뜸하다. 모처럼 빌딩 숲을 들어서니 설레임이 앞선다.
국수 그릇에 담긴 뽀얀 국물을 보니 눈이 먼저 식감을 느낀다. 역시 맛으로는 일품요리다. 만두 한접시와 국수 한그릇씩을 단숨에 비웠다. 소화를 시킬 겸 성당길을 걸었다. 내 생전에 흠씬 맞은 비로는 손꼽을 정도다. 바짓가랭이와 구두 속까지 빗물이 고인다. 점점 무게감이 느껴진다. 광풍까지 겹쳐 우산살이 꺾인다. 가던 길을 포기했다. 성당길은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서야 했다. 시 한 수 얹는다.
[느낌]
장안의 으뜸 요리
칼국수 명동 교자
한나절 노동 댓가
한끼로 만족이다
국수의
속깊은 뜻은
맛을 보니 알겠네.
나에겐 모처럼 목구멍으로 넘긴 칼국수가 싯구절처럼 구구절절한 사연이 담겼다. 어머니께서 비오는 날 홍두께로 밀가루 반죽을 민다.
썰고 남은 칼국수 자투리를 아궁이에 구우면 공갈빵이 된다. 고소한 맛이 어린 시절엔 별미였다. 호박을 썰어 넣은 칼국수 한 그릇에 마음이 풍요로웠다. 낭만이 따로 없다.
ㅡ부암동으로ㅡ
세종로를 뒤로하고 빗길을 달린다. 소싯적에 월세를 살았다는 용진의 이야기가 담긴 효자동을 지난다. 나에게도 추억이 서린 경복고 담장을 끼고 부암동으로 향한다. 바람은 비구름을 연신 밀어낸다.
비오는 날 부암동付岩洞《산모퉁이》 찻집에서 솟는 차향기가 코를 자극한다. 구름이 머문 북악산을 감상하기 위해 3층을 오르내리며 사진 찍기에 바쁘다. 인왕제색도의 주인공 겸재 정선이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산수화 한 폭 쯤 남길 것이다.
찻집 벽에 耕雲釣月(경운조월) 편액이 걸렸다(구름밭은 갈아도 거둘게 없고, 달을 낚아도 잡히는 게 없다).
원문을 살펴본다.
"俗人耕地 神仙耕雲
俗人釣魚 神仙釣月
(속인경지 신선경운
속인조어 신선조월).
속인은 밭을 갈고
신선은 구름밭을 간다.
속인은 물고기를 낚고
신선은 달을 낚는다."
앞의 구句를 생략해도
의미가 살아나는 시구절이다.
'白石淸泉백석청천' 편액과 마주 하고 있다(하얀 바위 맑은 샘).
구름 없이 햇살 가득한 날의 경치가 비오는 날 만 못하다.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선생의 친필이다. 추사체와 흡사해 착각했다.
지난 복중에 도성길을 돌다가 숙정문으로 내려갔다. 가을이 오기 전 다녀 올 창의문 구간을 부암동 찻집에서 한눈에 정상까지 본다. 가파른 산 봉우리에 걸린 구름은 떠날 기색 없이 한참 머문다. 비오는 날 세검정으로 나서보라고 다산茶山이 이른다. 비구름이 퍼포먼스 하는 이유를 찾았다.
[부암동에서]
북악을 삼킨 구름
장대비 토해 내고
수줍던 '산모퉁이'
햇살에 몸 말린다
세검정
계곡 물소리
옛 선인의 한탄가
골谷마다 가득히 구름이 멈추어 있다. 청허 휴정선사(서산대사)의 구름 시 한 수 보탠다. "흰 구름으로 옛벗을 삼고 밝은 달이야 한 생애일레. 만학천봉에서 사람을 만나면 차를 권하리."
북악산ㆍ인왕산은 구름밭이다. 우중雨中에 카페에서 바라보는 북악산의 경치가 또 기다려진다.
2021.08.20.
첫댓글 어머니가 비오는날 홍두깨로 밀어서 만들어 주셨던 칼국수가 생각나는 멋진시조!! 잘 감상했습니다.
명동 교자 만두도 먹고 싶고 산모퉁이 카페도 가고 싶군요.
그곳에 그런 멋진 싯귀가 걸려있는 줄 몰랐어요
네에, 굿은 날은 볼 만 하더군요.
북악산ㆍ인왕산은 구름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