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뿟따 존자가 계율 제정을 요청하다
안거 중에 사리뿟따 존자가 부처님께 어떤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지속되었고, 어떤 부
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지속되지 못했는지를 여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리뿟따 존자에
게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위빳시 부처님, 시키 부처님, 웻사부 부처님은 가르침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셨다. 당시
중생들이 지혜가 예리했기 때문에 한 구절만 들어도 곧바로 그 가르침을 이해했기 때문이
다. 게다가 비구 제자들이 악업을 짓지 않았기 때문에 권위계목[ānā pātimokkha]을 제정
할 필요가 없이 훈계계목만 낭송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과 직계 제자들이 열반에 들고
난 후에 가르침이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1)
반면에 까꾸산다 부처님, 꼬나가마나 부처님, 깟사빠 부처님은 가르침을 자세히 설하셨다.
또한 율법을 제정하여 권위계목을 낭송했다. 그렇게 때문에 부처님과 직계 제자들이 열반
에 들고 난 후에도 그 가르침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2)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사리뿟따 존자가 청하였습니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지속될 수 있도록 계율을 제정하여 주십시오. 권
위걔목을 암송하여 포살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사리뿟따여,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않았다. 승가에 허물을 범한 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승가에 허물이 나타나면 그때 계율을 제정할 것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안거가 끝난 해제 날, 자자[pavāranā 自恣]를 하고 나서 관례에 따라 초청자
인 웨란자 바라문에게 떠나겠다는 인사를 하셨습니다. 웨란자 바라문은 그제서야 부처님을
초청해 놓고 한번도 공양을 올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허물을 사과했습니다.
다음날 바라문은 3개월 동안 올리지 않았던 공양을 하루에 다 올리려는 듯이 부처님과 비
구들에게 훌륭한 음식과 가사를 공양 올렸습니다. 그 후 부처님께서는 웨란자를 떠나 지친
비구들을 위해 여러 도시들을 거치지 않고 바로 빠야가payāga 나루터에서 강가 강을 건너
바라나시에 한동안 머무시다가 웨살리로 가서 마하와나의 꾸따가라살라[중각강당]에 머무
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웨살리에 머무실 때 깔란다Kalanda 마을에 사는 수딘나Sudinna가 부모의 반
대를 무릅쓰고 출가를 했습니다. 이 수딘나 비구는 그 후로부터 8년후에 왓지Vajji 국에 기
근이 들었을 때 다시 고향으로 가서 전처와 음행을 범하게 되며 그 일로 인해 부처님 교단
에서 처음으로 계율이 제정됩니다. 3)
1)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는 것은 여러 세대의 제자들을 통해 지속되지
않고 2대 제자까지만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위빳시 부처님의 수명은 8만년이었
고, 그 제자와 그 제자의 수명도 각각 8만년이었다. 따라서 위빳시 부처님의 가르침은 16만
년이나 지속되었다. 즉 여러 세대에 걸쳐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는 것이지 햇수로 짧았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고따마 부처님의 가르침은 제자의 세대로는 오래 지속되었지만 햇수
로는 5,000년 정도만 지속된다고 한다. 《대불전경》 Ⅶ , p.101참조
2)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지속되었다는 것은 수명의 길이와 제자들의 세대 등 두 가지
측면 모두 오래 지속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대불전경》 Ⅶ , p.101참조
3)수단나가 출가한 것은 12안거 때이고, 음행을 저질러 계목이 처음 제정된 것은 그로부터
8년후, 부처님의 20안거 때이다. 이 설명은 《Mahābuddawin》 제4권, p.168에 따른 것이다.
같은 부분에 해당되는 《대불전경》Ⅶ, p.133에는 이 부분이 해석되어 있지 않다.
첫댓글 사두 사두 사두_()_
사두 사두 사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