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560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7 : 제주도
4ㆍ3항쟁의 현장
제주의 역사에서 가장 큰 상처를 남겼으면서도 한동안 누구도 말할 수 없던 사건이 있었다. 바로 4ㆍ3항쟁이다. 4ㆍ19혁명 직후 겨우 일기 시작한 진상규명운동은 이듬해 발생한 5ㆍ16 군사 정변으로 된서리를 맞았다. 4ㆍ3항쟁 진상규명을 요구했던 사람들은 옥고를 치렀고, 4ㆍ3항쟁에 관한 글은 판금되거나 필화 사건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군부독재정권은 4ㆍ3항쟁을 은폐 왜곡했고 철저히 금기시 했다. 유족들은 억울함을 호소하기는커녕 부모가 토벌대에게 총살당했다는 이유 하나로 어려서부터 ‘폭도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연좌제’의 사슬에 묶여 장래가 막혔다. 깡그리 불태워져 잿더미가 된 마을로 돌아온 후 굶주림에 벗어나기 위해 맨손으로 척박한 땅을 일구며 몸부림쳤다.
그러나 국민들은 고립무원의 섬에서 발생한 이 처절한 학살극에 대해 사건 당시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교과서는 왜곡된 내용만을 전달했고 언론도 오랫동안 침묵으로 일관해 왔다.
1948년 4월 3일 오전 2시! 어둠을 가르는 한 발의 총성은 순식간에 제주도를 흔들어 전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한라산의 봉우리마다 붉은 봉화가 오르고 이상한 공기가 제주도 전체에 감돌았다. ‘탕’하는 총성은 5ㆍ10 망국선거를 실력으로 저지하기 위한 전무장 세력에 대한 공격 개시의 신호임과 동시에 제주도민 전체의 궐기를 촉구하는 호소였다. 그것은 또 폭력에 의하여 단독 정권을 수립하려는 자들에 대한 일대 철퇴이며 제주 민중의 대대적인 궐기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1. 미군은 즉시 철수하라.2. 망국 단독선거 절대 반대.3. 투옥 중인 애국자를 무조건 즉시 석방하라.4.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은 즉각 돌아가라.5. 이승만 매국도당을 타도하자.6. 경찰대와 테러집단을 즉시 철수시켜라.7. 한국 통일 독립 만세.이러한 슬로건과 함께 3000여 명의 무장ㆍ비무장대원들은 각지의 산봉우리부터 일제히 올려진 봉화와 총성에 동서남북으로 호응하여 봉기의 포문을 열었다.은밀하게 산에서 내려온 여러 무장대는 전격적인 공격을 가하여 순식간에 제주도 전체를 완전하게 제압했다.
- 박세길 『다시 쓰는 현대사』 중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에 한라산 정상과 한라산 일대 주요 오름에서 일제히 타오른 봉홧불을 신호로 무장한 세력들이 경찰관서와 우익단체의 사무실에 불을 지르고, 경찰관과 지역유지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당시 제주도에 경찰관서가 20군데가 있었는데, 14곳이 불에 탔다.이 사건을 접한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 놈들은 모조리 죽이시오”라고 했고, 조병옥은 “대한민국을 위해 전 도(道)에 휘발유를 부어 30만 도민을 모두 죽이고, 모든 것을 태워 버려라”라고 명령을 내렸다. 신성모는 그보다 한 술 더 떠서 “제주도의 30만 도민이 없어지더라도 대한민국의 존립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했다.
곧바로 미 군정청과 국방경비대의 대대적인 토벌이 시작되었다. 제주도 전역에 초토화 작전과 대량 학살이 이루어졌다. 유격대는 1949년 초 신년 대공세를 펼쳤지만 토벌군의 압도적인 우세와 지리적인 고립, 그리고 병력보충과 보급품 조달이 중단되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야기되었고, 결국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4ㆍ3항쟁으로 제주도는 쑥대밭이 되었다. 그때 희생된 사람이 8만 8000명에 이르렀고, 1만 5000호가 불에 태워졌다. 7만 8000두의 소와 2만 2000필의 말 및 2만 9000마리의 돼지가 도살되었다. 곡류 13만 5000석, 고구마 420만 관, 면화 9만 9000관, 소채 90만 관이 소각되었다.
움직이는 것은 모두 우리의 적이었지만동시에 그들의 적이기도 했다.그러나우리는 보고 쏘았지만그들은 보지 않고 쏘았다.학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그날하늘에서는 정찰기가 살인 예고장을 살포하고바다에서는 함대가 경적을 울리고육지에서는 기마대가 총칼을 휘두르며모든 처형장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던 그날,빨갱이마을이라 하여 80여 남녀 중학생들을 금학벌판으로 몰고 가집단 몰살하고 수장한 데 이어정방폭포에서는 발가벗긴 빨치산의 젊은 아내와 딸들을 나무기둥에 묶어두고표창 연습으로 삼다가 마침내 젖가슴을 도려내 폭포 속으로 던져 버린 그날 (······)서귀포 임시감옥소에서는 게릴라들의 손톱과 발톱 밑에 못을 박고몽키 스페너로 혓바닥까지 뽑아버리던 그날, 바로 그날,관덕정 인민광장 앞에는 사지가 갈가리 찢어져목이 짤린 얼굴은 얼굴대로팔은 팔대로다리는 다리대로몸통은 몸통대로전봇대에 전시되어 있었다.
- 이산하의 시 『한라산』 중
그때 제주도에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중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밤에는 마을 출신 공비들이 나타나 입산하지 않는 자는 반동이라고 대창으로 찔러 죽이고, 낮에는 토벌대와 경찰들이 찾아와 도피자 검색을 했다. 결국 마을의 남정네들은 낮이나 밤이나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다. 4ㆍ3항쟁으로 제주도가 입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전체 마을 169군데 가운데 130여 군데가 피해를 입었고, 1만 5188가구가 피해를 입었다. 제주 인구의 10퍼센트가 죽거나 다친 4ㆍ3항쟁은 지금도 제주 사람들의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다.
한날한시에 이집 저집 제사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이날 우리 집 할아버지 제사는 고모의 울음소리부터 시작되는 것이었다. 이어 큰어머니가 부엌일을 보다 말고 나와 울음을 터트리면 당숙모가 그 뒤를 따랐다. 아, 한날한시에 이집 저집에서 터져 나오던 곡성소리,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 낮에는 이곳저곳에서 추렴 돼지가 먹 구술나무에 목매달려 죽는 소리에 온 마을이 시끌벅적했고, 5백 위도 넘는 귀신들이 밥 먹으려 강신하는 한밤중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그러나 철부지 우리 어린 것들은 이 골목 저 골목 흔해진 죽은 돼지 오줌통을 가져다가 오줌 지린내를 참으며 보릿짚대로 바람을 탱탱하게 불어넣어 축구공 삼아 신나게 차고 놀곤 했다. 우리는 그 한밤중의 그 지긋지긋한 곡성 소리가 딱 질색이었다. 자정 넘어 제사 시간을 기다리며 듣던 소각 당시의 그 비참한 이야기도 싫었다. 하도 들어서 귀에 박힌 이야기, 왜 어른들은 아직 아이인 우리에게 그런 끔찍한 이야기를 되풀이해서 들려주었을까?
현기영의 『순이 삼촌』에 실린 글이다.1949년 4월에 대대적으로 벌인 토벌작전으로 우두머리인 이덕구가 사살되었고, 그들의 주요 근거지를 점령했다. 토벌대들이 그들의 무기를 빼앗으면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산으로 숨어든 그들은 4년이 지난 1954년까지 저항을 그치지 않았다. 9월 21일에야 스무 명쯤으로 줄어들어 저항 능력을 상실하면서 4ㆍ3항쟁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지만 마지막 폭도가 잡힌 것은 1957년이었다.세월이 흐른 지금도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로 남아 가끔씩 들쑤시고 일어나는 것이 4ㆍ3항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