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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다
막 14:12-21
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13 예수께서 제자 중의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14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5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16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니라
17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20 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막 14:12-21 / [최후의 만찬;마26:17-30,눅22:7-20,요13:26-30] 무교절 잔치의 첫날은 유월절 양을 잡는 날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선생님께서 드실 유월절 음식을 저희가 어디다가 차려야 할까요' 하고 물었다. 13) 예수께서 제자 두 사람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시며 말씀하셨다. `성안에 들어가면 물동이를 들고 너희를 향해 걸어오는 사람을 만날 테니 그를 따라 가라. 14) 그리고 그 사람이 들어가는 집주인에게 `우리 선생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방이 준비되어 있는지 알아보라고 하십니다' 하고 말하라. 15) 그러면 그가 이미 자리가 다 마련된 큰 다락방으로 너희를 안내할 것이다. 거기에다 준비해 놓으라.' 16) 두 제자가 성안에 들어가 보니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다 마련되어 있었다. 그들은 거기서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였다. 17) 저녁때가 되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집으로 가셨다. 18) 그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고 있을 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분명히 말한다. 지금 나와 함께 식사하고 있는 너희 가운데 한사람이 나를 배신할 것이다.' 19) 그 순간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제자들은 근심스럽게 저마다 물었다. `설마 저는 아니겠지요?' 20)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 열두 사람 중의 하나인데 지금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21) 인자는 오래 전에 예언자가 선포한 대로 죽음의 길을 가겠지만 인자를 배신한 그는 참으로 불행하다. 그는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유월절을 준비시키시고 가룟 유다에게는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유월절 준비(12)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을 제정하시면서 양을 잡아 불에 구워먹을 것과 그와 함께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도록 명하셨습니다(출 12:9). 유월절은 애굽에서 고통당하던 때와 그 가운데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며 감사하는 사건으로, 유월절의 희생제물인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신약시대에는 성찬식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출 12:1-14; 고전 5:7;). 성찬식은 온 인류의 죄를 친히 담당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거룩한 예식이기 때문입니다(요 1:29; 눅 22:14-20; 고전 11:23-27). 그리고 유월절 음식은 예루살렘 사면 성벽 안에서 먹어야 했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서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기를 원하는지 질문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13-16)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 즉 베드로와 요한에게 성내로 들어가 물동이를 이고 가는 한 사람을 따라가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나눌 수 있는 방을 청할 것을 명하십니다(눅 22:8). 이 당시 물동이를 이고 다니는 일은 여인들이 하는 일이었으므로 남자가 물동이를 이고 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예수께서 명하신 말씀대로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두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또한 당시 유대인의 관습에는 자신의 집에 여분의 방이 있으면 집 주인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머물 곳을 찾는 순례객들에게 방을 빌려주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17-2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함께하는 최후의 유월절 식사자리에서 제자에 의해 팔릴 것을 말씀하십니다. 유월절은 가족과 친구들이 함께 모여 즐겁게 무교병, 포도주, 쓴 나물, 양들을 나누는 축제로서 특별한 예법이 있는 식사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사랑하는 제자들 중에 한 사람에 의해 자신이 팔리게 될 것과, 그 사람은 자신과 함께 떡 그릇에 함께 손을 넣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그릇을 함께 사용할 만큼 가까운 사람이었지만, 그런 사람에 의해 배신당하며(시 41:9, “차라리 그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 이라며 자기를 파는 사람의 운명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적용: 당신은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습니까? 혹여나 기복적인 신앙으로 세속적인 욕망을 위함이 아닌가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저녁을 드십니다. 자신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자신을 팔 줄 알면서도 함께 음식을 나누십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자신을 팔 자에게도 떡과 잔을 나누셨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담긴 것은 떡과 포도주를 넘어선 사랑과 희생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눈앞의 명절을 찬미하지만 주님은 눈앞에 죽음을 앞두시고 사랑 가득한 눈으로 제자들을 바라보십니다. "너희도 나처럼 가서 사랑하라. 가서 나누어라." 예수님의 목소리가 어두운 감람산의 구석구석을 울리듯 우리의 가슴에도 메아리칩니다. 내 마음속에도 예수님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고 있습니까?
< 설 교 >
마지막 기회를 주시는 예수님
김영주 목사
본문에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사건이 나와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지만 본문은 좀 특별한 의미에서 예수님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본문을 전체적으로 묵상하면서 참 예수님은 우리 같은 사람들하고는 다르구나 하는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게 하는 본문이었습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아주 이해가 안가는 사건이 있습니다. 13-14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여러분, 이 부분을 읽으면서 드는 첫인상은 무엇입니까? 저는 마치 무슨 스파이영화나 007영화를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살짝 성으로 들어가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봅니다. 그러면서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찾습니다. 그리고 발견하고 살짝 따라갑니다. 집에 들어갈 때까지 아무 말 없이 따라간 다음 집주인에게 말합니다. "선생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묻겠습니다. 제자들이 나갔을 때 물 한 동이 가지고 가는 사람을 쉽게 만났을까요? 어렵게 만났을까요? 물 한 동이 가지고 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이렇게 물을 나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니 누가 누군지 어떻게 알아봅니까? 생김새를 말해준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어렵지 않게 만났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쉽게 만났을까요?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은 남자였기 때문입니다. 이것 참 이상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풍습을 보면 물동이는 여자가 운반합니다. 남자들은 이런 것 안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남자가 이 일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대번에 눈에 띄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 우리 나라는 수돗물이 안나올 때 여자들이 물동이에 물을 담아 머리에 이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남자들이 머리에 물을 이고 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우습기도 하고 특이하기도 하단 말입니다. 그러니 바로 발견하죠.
여러분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왜 많고 많은 여인들 다 놔두고 이렇게 평범을 뛰어넘는 사건을 통해서 주님의 유월절을 준비하기 원하십니까? 여기에 메시지가 있습니다. 본문의 시간을 볼 때 이제 내일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 자체가 평범을 뛰어넘는 사건입니다. 어떻게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죄인을 위해 죽습니까?
하나님은 죽어서는 안됩니다.
신이 죽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제 죽게되었단 말입니다.
그것도 자기 죄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죽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 이해가 가세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죄인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너무도 크시기에 이런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자체가 상식을 뛰어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평범하게 사랑하지 않습니다. 특별하게 사랑하십니다.
15-16절에서 우리는 한 가지 기쁜 장면을 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한 집 다락방에서 유월절 잔치를 예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시킨 대로 전했는데 주인은 두 말하지 않았습니다. 큰 다락방을 주님을 위해 제공했습니다. 물론 이 주인은 예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두 말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 자신의 다락방을 내어 드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주목할 일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있을 때, 이런 몇 몇 사람들의 헌신이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했습니다.
첫째는, 나귀새끼의 주인입니다. 마21장1-9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데 타고 갈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 예수님은 감람산 겟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러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마21:2-3)
말씀대로 나귀 주인은 주님이 쓰신다니까 두 말없이 내줬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했습니다. 비록 나귀새끼는 탔지만 그 날은 대단한 날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앞에서고 뒤에서고 하면서 예루살렘이 떠라가도록 소리지르며 찬송했기 때문입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면서 외쳤습니다.
이 사건이 죽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시는 주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주님이 쓰신다했을 때 나귀 새끼를 두 말없이 내준 그 믿음, 내가 가진 것을 주님이 써주신다는 것에 감사했던 그 마음, 헌신이 너무 흐뭇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막14:1-9절에 나오는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모습입니다. 주님을 생각하면서 몇 년 동안 정성껏 옥합에다 가장 순전한 나드 향을 모았습니다. 다른 용도로 사용할 생각이 왜 없었겠습니까? 결혼 자금으로 쓰고 싶은 생각이 왜 없었겠습니까? 아니면 이것가지고 하고 싶은 일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주저 없이 주님께 드렸습니다. 전부 부어버리고 옥합까지 깨뜨려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화냈지만 예수님은 기뻐했습니다. '저가 내게 좋을 일을 하였다'말씀하셨습니다. 역시 이 사건도 주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데 큰 기쁨을 주었던 사건입니다.
세 번째는 본문에 나오는 다락방 주인의 모습입니다. 자신이 소유한 다락방을 주님의 유월절 만찬을 위해 드렸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하는 최후의 만찬을 할 수 있게 해드렸습니다. 15절을 보시면 이 사람의 수고도 나타나있습니다.
"그리하면 자리를 베풀고 예비 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그 주인이 친히 자리를 베풀었습니다. 가구를 가져다 놓고, 청소하고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쓰시도록 주님께 드렸습니다.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자기들이 가진 것을 주님께 드렸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나귀새끼를 드렸고, 한 사람은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드렸고, 한 사람은 다락방을 드렸습니다. 이들이 만약 뭘 만들어서 드리려 했다면 드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냥 가진 것 중에서 주님께 드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없는 것으로 드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 중에서 드리면 됩니다. 주님께 드린다고 해서 뭐 초호화 판으로 꾸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부담스러워서 못 계실 것입니다. 또 아무리 호화판으로 꾸며 드린다고 해도 천국에 있는 것보다는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내려오시기 전에 이미 천국의 삶을 살아보셨기에 이 땅의 어떤 것에 감동 받으실 분 아닙니다. 주님이 감동 받으시는 것은 사람들의 헌신과 사랑의 마음이지 물질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을 주님께 드리십시오. 헌신이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것을 주님이 쓰시도록 드리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교훈은 사람이 없어서 못 드리는 경우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아무리 없는 사람도 한가지씩은 다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건강이 있으면 건강을, 지식이 있으면 지식을, 재능이 있으면 재능을 드리면 됩니다. 사람이 드리려고만 하면 어떤 것이나 한 가지는 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없는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있는 것을 드리면 됩니다. 위에 나온 나귀새끼 한 마리 그렇게 비싼 것 아닙니다. 뭘 대단한 것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 드리니까 유명해졌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마다 두고두고 기억하게 된 동물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나귀새끼가 한 두 마리 였습니까?
그런데 주님을 태운 나귀새끼는 이 나귀밖에 없었단 말입니다. 주인은 나귀새끼 한 마리 잘 드려서 복 받았고, 나귀새끼는 예수님 한 번 태워서 유명해 졌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향유 가진 사람이 이 마리아밖에 없었겠습니까?
더 많이 가진 사람, 더 좋은 그릇에 담아 보관하고 있는 사람들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 드려지지 않으니까 기억도 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다락방 가진 사람이 한 둘 아니겠죠?
그런데 주님께 드려진 다락방은 이 다락방밖에 없단 말입니다. 있다고 다 드리는 것 아닙니다. 있어도 믿음 없으면 마음 없으면 못 드리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향유나 다락방이나 이들이 다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본문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알게 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18-21절의 배반에 대한 경고입니다. 18절을 보시죠.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이걸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 중에 한 사람이 배신할 것을 미리 알고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못하게 해야죠. 알면서도 왜 중지시키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그럴만한 힘도 있고 능력도 있었습니다. 아니면 그 자리에서 남은 제자들에게 말해버리면 될 것 아닙니까?
'저 사람이 나를 배신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누가 배신할 것인지 말씀만 하면 그 사람은 아마 살아서 다락방을 나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머지 제자들이 가만두겠어요? 특히 성질 급한 베드로 같은 경우 당장에 무슨 일 저지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직접 그 제자--가룟유다--를 가르키거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부드럽게 표현하셨습니다. 다시 볼까요?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표현도 보면 부드러운 표현입니다. 사나운 표현을 안 썼어요. 이런 상황이라면 거친 소리가 나올 수 있잖아요? 예를 들면,
'아주 인간 같지 않은 놈이 있는데 그 놈이 나를 팔 것이다. 그 놈은 사람도 아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너무 온유한 표현을 썼습니다. 어떻게 보면 좀 답답한 기분이 들 정도입니다.
19절에 보시면 제자들도 애매모호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희가 근심하여 하나씩 여짜오되 내니이까?" 정말 근심해야 할 유다는 가만있는데 나머지 제자들이 더 불안했습니다. 혹시 나인가? 하면서 조심스럽게 주님께 물어봤습니다. 차례차례 물어본 것입니다. 내니이까?, 내니이까?, 이렇게 하면서 11제자가 다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확한 답변을 안 하신단 말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가룟 유다 뿐입니다. 이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다들 유다 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혹시 저 사람인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로 말입니다. 그런데 안 물어보면 이상하잖아요. 결국, 유다도 물어봤습니다. "내니이까?"
그런데 유다 속에 있는 생각을 이미 아시는 주님께서 넘어가 주십니다. 속아주시는 것입니다. 20절에 보시면 예수님은 직접적인 답을 안 하십니다.
"이르시되 열 둘 중 하나 곧 나와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이 말씀이 직접적인 답변이 안 되는 것은 12제자 모두 다 그릇에 손을 넣었단 말입니다. 이 그릇은 과일 찧은 것하고 초로 만든 국물이 담긴 그릇입니다. 이 그릇에다 사람들은 떡을 찍어 먹었습니다. 다 찍어 먹었기 때문에 누구나 다 해당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21절에서는 경고만 하고 계십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왜 예수님은 이렇게 간접적으로, 온유하게 말씀하셨을까요?
그 자리에서 지적하시고 혼내시면 될텐데.
그러면 혹시 가룟 유다가 정신을 차리고 무서워서라도 맘을 바꿀 수 있을텐데......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읽게됩니다. 예수님은 유다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의 마음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어떤 은혜의 자리에 있어도 마음이 열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래도 주님은 혹시나 하면서 기회를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배신의 마음으로 너무나 단단하게 굳어있는 유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혹시 이 사랑에 녹아질까? 이렇게 하면 마음이 바뀔까? 하시면서 더러운 발을 씻겨 주신 것입니다. 세족식을 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그 분위기가 얼마나 뜨겁습니까? 얼마나 진지합니까? 저도 어느 모임에 가서 세족식을 하면서 마음이 녹아지고 열린 경험이 있습니다. 그 단단한 마음, 상처받은 마음들이 열리더라구요. 큰 은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너무 진지하고 너무 거룩한 분위기이기에 감히 저항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있습니다. 그 분위기에 압도됩니다.
더구나 선생이신 예수님이 친히 발을 씻겨 주시잖아요. 윗사람이 친히 무릎꿇고 낮은 자리에 앉아서 씻겨 주잖아요. 이런 황송한 분위기에 마음이 열리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안 깨지는 사람도 있단 말입니다. 어떤 말씀, 어떤 신령한 프로그램도 마음이 열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씀이 약해서도 아닙니다. 분위기가 냉랭해서도 아닙니다. 프로그램이 미흡해서도 아닙니다. 그 마음이 너무 단단하게 자물쇠가 잠겨져 있어서 그렇습니다. 가룟 유다가 그랬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하셔도 은혜 못 받는데 어디 가서 은혜 받겠습니까?
저는 여기서 어떤 의미에서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설교나 성경공부나 이런 것들에서 은혜 받지 못하면 부담이 되었거든요. 내 책임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이 해도 은혜 못 받는 사람이 있더라구요. 예수님도 안 되는데 제 설교에 은혜 못 받는 사람 있는 것은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내용이나 전하는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듣는 사람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 장면을 잘 보십시오.
이미 마귀는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습니다. 유다는 마귀가 넣어준 그 생각에 잡혀서 다른 것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때였습니다. 유다가 마음을 바꿀 가능성이 아주 적은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기회를 주십니다.
12제자가 다 돌아가면서 '내니이까?' 물어봤지만 온유하게 표현하시면서 기회를 주시고 있습니다. 이렇게만 말해도 유다가 다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 이것 보면 예수님의 인내와 기다리심에 감탄이 됩니다.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을 기다리시고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사단에게 잡힌 사람에게도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룟 유다 같은 우리를 믿어주시고 기회를 주십니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토라집니까?
--얼마나 자주 불평합니까?
--우리는 얼마나 자주 부정적인 생각, 비겁한 생각을 합니까?
--얼마나 쉽게 은혜를 까먹습니까?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마귀가 주는 생각을 붙들고 그것에 전부인양 고집부릴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아마 이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기 시작한다면 성한 사람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기다려주십니다.
배반의 마음을 가져도 기다려 주시고, 원망해도 기다려주시고, 헌신한다고 했다가 시험 들어서 내가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살아도 기다려주십니다. 단지 기다려주시는 것만 아니라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회복할 수 있는 기회, 은혜 받을 수 있는 기회, 돌아설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이 사람 없어서 우리를 기다려주시는 것 아니잖아요?
능력 없어서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 아니잖아요?
우리 아니라도 얼마든지 좋은 사람 많고, 하나님 혼자서도 다 하실 수 있지만 기다려주시고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무작정 기다려주시는 것만은 아닙니다. 경고하며 호소하고 있습니다. 제자들 앞에서 부드럽게 말씀하신 이유는 경고와 동시에 호소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유다는 어떤 모양으로든 응답해야만 합니다. 마음을 돌이킬 수도 있고, 무시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고 그 결정에 대해서 자신이 책임을 져야합니다. 지금 여기서 유다는 돌아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잡았습니다. 돌아서기만 하면 모든 것은 다 회복됩니다. 지금까지의 일은 없었던 일이 됩니다.
분명 이때 유다의 마음에는 두 마음이 왔다 갔다 했을 것입니다.
'지금 주님의 사랑에 응답할까?' 하는 마음과 '에이 아냐, 어차피 벌어진 일 갈대로 가보자' 하는 마음입니다. 한 편으로는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 양심의 소리가 들려오고 한편으로는 사단이 주는 생각이 들려왔습니다. 어떤 생각을 붙드느냐에 따라 그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천국과 지옥이 결정됩니다. 안타깝게도 유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버리고 사단이 주슨 생각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뻔히 후회할 줄 알면서 말입니다.
여러분 지금 혹시 어떤 이유로 인해서든 마음이 닫히고 은혜가 안 되는 분 있습니까? 분노와 상처, 감정, 복수심, 배신감을 느끼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생각을 붙잡으십시오. 사단의 속삭임에 마음을 주지 마십시오.
혹시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과 마귀가 주는 생각사이에 고민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을 붙드십시오. 하나님께 돌아서십시오. 돌아서면, 아무리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모든 것을 회복 시켜주십니다. 아무리 상처가 커도, 아무리 잃은 것이 많아도, 주님은 다시 회복시켜주십니다. 잃었던 평화와 기쁨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은혜로 지키면 생명을 얻습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유월절 음식을 드신 예수님
마가복음 14:17-21 / 박상훈 목사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유월절 음식을 드시면서, 제자들과 함께 대화하셨던 내용입니다. 때는 목요일 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 밤이었습니다. 그리고 장소는 예루살렘 성내에 있는 어느 다락방이었습니다.
눅22:15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이 유월절 음식을 드시기를 몹시도 원하셨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그 날 밤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서 하셔야 될 일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유월절을 마감하시고, 그것을 대체할 성찬을 제정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요한복음 13장부터 16장에 나오는 말씀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말씀으로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요13:1이 말씀하듯이,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서도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변함없는 사랑을 제자들에게 베푸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실 수 있는 끝까지, 곧 최대한의 사랑을 제자들에게 베푸셨습니다.
그 날 밤 사랑으로 예수님은 모든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할 것을 아시면서도, 사랑으로 그의 발을 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을 아시면서도, 사랑으로 그의 발을 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도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할 것임을 아시면서도, 사랑으로 그들의 발도 씻으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에 두고 슬퍼하는 제자들을 사랑으로 위로하셨습니다.
계속해서 사랑으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실 것도 약속하셨습니다. 그 뒤 마지막으로 사랑으로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뜻밖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막14:17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날이 저물었습니다. 그 날 아침 예수님은 두 제자 곧 베드로와 요한을 베다니에서 예루살렘 성내로 보내셨습니다. 그들에게 유월절을 준비케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두 제자는 성내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물 한 동이 가지고 가는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그를 따라가서, 그가 들어가는 집 주인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집 주인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자, 집 주인은 그들에게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그 곳에서 유월절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유월절 준비가 다 끝나자, 그들은 베다니로 되돌아 왔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날이 저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데리시고, 유월절 음식이 준비되어 있는 예루살렘 성내의 다락방으로 가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호시탐탐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길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디서 예수님이 유월절 음식을 드시는지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막14: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다 앉아 먹을 때에.” 출12:11 말씀을 보면, 본시 유월절 음식은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관습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는 앉아서, 오래토록 유월절 음식을 먹었습니다.
아무튼 이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 편에서 보면, 이는 전연 뜻밖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 편에서 보면, 이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 참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물며 예수님이 이처럼 강조하시면서 말씀하셨으니까, 이 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틀림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곧이어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다음과 같은 뜻밖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들은 이중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너희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팔 사람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One of you!”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태연하게 유월절 음식을 다 먹고 나서, 곧바로 예수님을 판다는 것은 너무도 가증스러운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까? 이는 순전히 제자들을 위해서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제자들의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음식을 드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는 대야에 물을 떠서, 열두 제자들의 발을 모두 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겸손과 섬김과 사랑의 본을 몸소 보이셨습니다.
그런 후 요13:17에서 예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앞으로 제자들은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하게 남을 섬기며 사랑함으로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여기에 해당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요13:18에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예수님은 실수로 가룟 유다를 잘못 택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것임을 처음부터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가룟 유다를 택하신 것은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성경의 어떤 말씀입니까?
시41:9에 있는 말씀, 곧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는 말씀입니다. 남의 떡을 먹는다는 것은 그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발꿈치를 든다는 것은 발로 찬다, 또는 발로 목을 짓밟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는 엄청난 배신입니다.
시편 41편의 배경이 사무엘하 15장∼17장에 나옵니다. 다윗에게 아히도벨이라는 모사가 있었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 아히도벨은 압살롬의 편에 섰습니다. 그러나 아히도벨은 자신의 계략이 시행되지 않자,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아히도벨이 다윗을 배반한 것처럼,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다가 아히도벨이 스스로 목매어 죽은 것처럼, 가룟 유다도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과 가룟 유다의 관계는 다윗과 아히도벨의 관계에서 미리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요13:19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제자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시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셨습니다.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생각해봅니다. 만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룟 유다의 배반을 미리 말씀해주지 아니하셨더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룟 유다를 택하신 것은 실수였으며 잘못이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자연히 그들의 믿음은 약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인해서 제자들의 믿음이 약하여지는 것을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믿음으로 견고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비록 충격적인 사실이기는 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룟 유다의 배반을 미리 알리신 것입니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헬라어 성경에는 “그”라는 대명사기 나오지 않습니다. 원어로는 “에고 에이미”입니다. 이는 “I am,” 곧 “나다”라는 뜻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 있는 말씀처럼, 이는 바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것을 처음부터 아셨습니다. 전지성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전능성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영원성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마다 함께 하십니다. 전재성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전지성과 전능성, 그리고 영원성과 전재성을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그인 줄, 곧 하나님이신 줄 그들이 믿게 하려 하심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반을 미리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의 믿음을 돈독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요13:20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그들의 사명도 확고하게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대사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을 영접하는 자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높이셨습니다.
그 날 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요한복음 16장까지 이어집니다. 그 결론이 요16:33에 나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뜻밖의 환난을 당했더라도 낙심하지 맙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세월 지나 갈수록 의지할 것뿐 일세 무슨 일을 당해도 예수 의지합니다.” 예수님을 힘껏 의지합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김을 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근심했습니다.
막14:19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그들이 근심하며.” 만일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팔 것이라면, 제자들은 별반 놀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들 중의 한 사람, 곧 예수님과 함께 먹는 자가 예수님을 팔 것이라는 말씀에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믿음이 작다고, 또한 때로는 깨닫지를 못한다고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책망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박해를 받을 때, 행여 자기가 예수님을 배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씩 하나씩 예수님에게 여쭈었습니다. “나는 아니지요.” 그들은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해주시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래. 너는 아니다.” 아무튼 그들은 자기들 중의 누가 예수님을 배반할 것인지 전연 예측하지를 못했습니다.
마26:25 말씀을 보면, 이 때 가룟 유다도 “나는 아니지요”라고 예수님에게 여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가룟 유다만 듣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면 다른 제자들이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리라고 공개적으로 밝히지를 않으셨습니까?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회개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진실로 예수님의 사랑은 무한하십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끝끝내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철저한 위선자였습니다. 그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의 가르침을 똑같이 받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기도 할 때, 그도 함께 기도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그도 함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상 마귀였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는 가라지의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은 밭에 좋은 씨를 뿌렸습니다. 그런데 밭에 곡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보였습니다. 그래서 종들이 의아스럽게 여기며, 주인에게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느냐고 물었습니다.
마13:28∼29 말씀입니다.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원수 곧 마귀가 가라지를 덧뿌렸습니다. 따라서 곡식이 있는 곳에는 가라지도 있기 마련입니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였지만, 그 안에는 곡식이 아닌 가라지도 있습니다.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곡식과 가라지가 자라나는 동안은 둘 사이의 구분이 제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로서는 위선자를 구별해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속을 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가룟 유다의 실체를 전연 눈치 채지를 못했습니다. 그만큼 가룟 유다는 능숙하게 자기의 속을 감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가라지임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단지 예수님은 제자들이 다칠까봐, 때가 될 때까지 그를 내버려두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가룟 유다에 대한 미움에 사로잡히면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듯 곡식과 가라지는 함께 자랍니다. 그러나 곡식과 가라지가 구별될 때가 있습니다. 추수 때입니다. 추수 때가 되면 각자의 운명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곡식은 모아서 주인의 곳간에 넣습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거두어 불에 사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근심했습니다. 스스로 자신들의 부족과 연약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곧바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실로 그들은 연약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그들은 잠들고 말았습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이 그들을 깨우셨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잠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자,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예수님이 공회 앞에서 심문을 당하시는 동안, 베드로는 여종에게 또한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만큼 제자들은 하나같이 연약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을 찾아주시고, 그들에게 성령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순교하기까지 힘써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우리도 연약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근심하면서 예수님에게 여쭐 수밖에 없습니다. “주여, 나는 가라지가 아니지요?” 비록 우리는 연약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하면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우리가 연약할수록, 예수님은 우리를 더욱 귀히 여기십니다. “세상 사는 동안에 나와 함께 하시고, 세상 떠나가는 날 천국 가게 하소서.” 이와 같이 늘 예수님을 소망 삼고, 예수님을 의지하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제자들은 각자 자신을 살펴보아야 했습니다.
막14:20 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제자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아니지요.” 이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예수님은 구체적인 지명은 피하시고, 그저 암시적으로만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열둘 중의 하나가 예수님을 팔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열두 제자들 모두가 가라지는 아니었습니다. 나머지 열한 제자는 곡식이었습니다. 단지 한 제자만이 가라지로서, 가라지인 그 한 제자가 예수님을 배반할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예수님을 팔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식탁에는 양념을 담는 그릇이 놓여 있었습니다. 카로셋이라고 불리는 양념은 여러 과일과 견과류를 으깨어 식초에 버무린 것이었습니다.
이는 애굽에서 벽돌을 만들 때 사용했던 진흙을 상징했습니다. 유월절 음식을 먹을 때, 떡과 쓴 나물을 양념에 적셔 먹었습니다. 양념 그릇은 두세 사람이 공유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었다는 것은 예수님 바로 곁에 앉았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 애틋한 정을 보이시면서, 그가 돌이키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바라심을 저버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세도 전연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막14:21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예수님은 시41:9에 기록된 말씀 곧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하신 대로, 예수님과 함께 먹으며 예수님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에 의하여 팔리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예컨대 시편 22편은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했으며, 이사야 53장은 십자가의 의미를 상세하게 밝혔습니다.
또한 슥11:12 말씀을 읽어봅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은 은 삼십에 팔리셨습니다.
계속해서 슥11:13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고 난 뒤에 어떻게 행했습니까?
마27:3∼10 말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가룟 유다는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에게 돌려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받지 않자, 그는 그 돈을 성소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은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습니다.
이렇듯 성경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하여 세세한 부분까지 다 기록했습니다. 고전15:3 말씀과 같이, 실로 예수님은 성경대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팔리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는 어떻게 됩니까?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룟 유다에게는 화가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못에 던져졌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영혼을 은 삼십에 판 셈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 대해서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영원히 화를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지 아니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이미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기정사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이었습니까? 회개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3장 말씀을 보면, 그는 바로 이 시점에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는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14:1 말씀과 같이,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가룟 유다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도 없었고, 또한 내세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모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각자가 스스로 돌아보면서, 늘 하나님을 경외하고 내세를 소망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마른 막대기와 같습니다. 마른 막대기는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것을 들고 쓰시면, 홍해를 가르기도 하고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게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면, 우리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큰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아주소서.” 우리의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드립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용하셔서 홍해를 가르시고,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실 것입니다. 이와 같이 큰 역사를 날마다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다가 남기고 간 것은(1)
마태복음 27:3-8, 전도서 12:13-14 / 안효관 목사
오늘은 교회력으로 대림절(待臨節, The Advent, 대강절, 강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표현 그대로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비행기를 타고 가겠다는 약속을 받고 공항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렇게 곧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맞을 준비를 하는 절기가 대림절입니다. 교회에서는 성탄절 전의 4주간을 이 대림절로 지킵니다. 오늘부터 4주간 우리는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신앙을 더욱 확고하게 가져야 합니다.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평화의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안나와 시므온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처럼, 우리도 그런 간절한 마음으로 아기 예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가장 필요한 것은 평화입니다. 전쟁의 아픔이 계속되고 있는 이라크에도 평화가 찾아와야 하고, 정치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서 서로를 신뢰하지 못한 채 투쟁과 파행으로 치닫고 있는 우리나라의 정치에서 평화가 찾아와야 합니다.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인해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우리 국민들의 마음에도 평화가 찾아와야 합니다. 이런 모든 곳에 평화를 가져다 주실 수 있는 분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모셔야 우리의 삶에 평화가 깃들 수 있습니다.
여기 앞에 양초가 5개 있고, 오늘은 그 중 하나에 불이 켜져 있습니다. 대림절 한 주가 지나면서 촛불이 하나씩 더 켜질 것입니다.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주님을 우리의 마음에 새기는 의미로 촛불을 켜 놓았습니다. 그리고 한 가운데 있는 하얀 초에 성탄절에 켜질 것입니다. 촛불이 하나씩 켜질 때마다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주님을 우리의 마음에 맞을 준비를 하시는 거룩한 절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대림절에 우리가 기다려야 하는 것은 주님의 재림입니다. '다시 오마' 약속하신 주님은 언젠가 반드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주님은 '도적같이 오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뜻하지 않은 때에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깨어서 준비해야 합니다.
대림절은 바로 그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주님이 언제 다시 이 땅에 오실지 모르지만, 오셔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실 때에 심판의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는 모습으로 설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대림절에는 다시 오실 주님을 맞기에 부끄럽지 않도록 우리의 죄와 허물을 회개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정결한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는 것처럼 기다림의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임재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6) 야고보 사도는 농사를 짓는 농부가 밭에 씨를 뿌려놓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은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데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고 권고해 주고 있습니다.(약 5:7-11) 사람이 "무엇을 기다리며 오늘을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누구를 기다리느냐' 하는 기다림의 대상이 무엇(누구)이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인이다.
성탄절을 앞두고 대림절 절기를 지내면서 우리는 지금 신앙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시기를 맞았습니다. 이 절기를 깊은 신앙으로 잘 준비하며 지내면 굉장한 은혜와 축복의 절기가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번 대림절 기간이 우리 모든 교우님들 한 분 한 분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시간들이요, 은혜와 축복의 절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성공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던 가롯 유다가 왜 스승 예수님을 팔아먹고 가장 불쌍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과 다음 주 두 주에 걸쳐 실패한 인생을 살다 간 유다가 남기고 간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유다처럼 실패한 인생을 되풀이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귀한 생명과 이 귀한 날들을 통해서 아름답고 영원한 것을 남기는 복된 인생을 살아가길 결단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로 가롯 유다가 남긴 유산은 아주 치욕적인 것이었습니다. 유다가 남기고 간 유산이 얼마나 되었습니까? 유다가 남기고 간 것은 고작 은 30개뿐이었습니다. 은 30개라고 하면 은 30세겔이란 말입니다. 한 세겔은 노동자의 4일 품삯입니다. 그러기에 유다가 남긴 것은 노동자가 120일 정도 일해서 벌어들일 수 있는 정도의 돈입니다. 또 은 30세겔은 노예 한 사람의 몸값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시에 황소가 노예를 받아서 죽이면 은 30세겔로 배상해 주었습니다.
더구나 유다가 자신의 인생에 마지막 갖고 있었던 이 은 30은 정상적으로 벌어들인 돈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스승인 예수님을 판 대가로 받은 것입니다. 오늘날로 표현한다면 인신매매를 해서 벌어들인 아주 추악한 돈일 뿐입니다.
인간이 벌어들인 돈 가운데서 가장 추악한 돈이 다른 사람을 팔아 벌어들인 돈입니다. 강도처럼 강제로 남의 돈을 빼앗는 것도 추악한 짓이지만, 더욱 추악한 것은 다른 사람을 팔아서 치부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IMF가 시작되면서 살기가 힘들어지자, 어떤 부모는 자기의 딸을 윤락가에 팔아서 돈을 받아먹는 일도 있었습니다. 사채업자들 가운데는 사채를 빌려 쓴 사람에게 '신체포기각서'라는 것을 쓰게 해서, 돈을 갚지 못한 사람을 윤락가에 팔아먹기도 해 큰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 하는 참담한 생각까지 듭니다. 몸은 단지 육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영혼과 정신과 인격 모두를 담고 있는 그릇입니다. 그러기에 몸을 천히 여기는 것은 인격과 영혼과 사람됨 그 자체를 천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인간의 몸을, 그것도 다른 사람의 몸을 팔아서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고 한다는 것은 참으로 치욕스러운 짓입니다.
가롯 유다가 그랬습니다. 그는 스승을 팔아서 은 30개를 얻었습니다. 스승을 죽음으로 내몰고, 스승의 목숨의 대가로 받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은 30개는 참으로 더러운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나중에 가롯 유다는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들에게 정죄받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이 한 짓이 얼마나 못된 짓이었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찾아가서 자신이 스승을 팔아서 받은 돈 은 30을 되돌려주려고 했습니다. 물론 종교지도자들은 그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 돈이 더러운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유다는 그 돈을 성전에 헌금을 하겠다고 합니다. 물론 종교지도자들은 그 돈은 헌금으로도 받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 더러운 돈을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서 헌금으로 받을 수 없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겠습니까? 유다가 가져온 돈이 어떤 돈인지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스승을 판 값으로 자신들에게 받아간 돈이었습니다. 배신의 대가입니다. 비록 자신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유다에게 준 것이었지만, 유다의 손에 들려진 이상 그 돈은 이제 더러운 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 돈을 헌금으로 받을 수 있겠습니까?
종교지도자들이 그 돈을 받으려 하지 않자 가룟 유다는 그 돈을 성소에 집어 던져놓고는 돌아왔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그 더러운 돈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다가, 도저히 성전을 위해서 쓸 수 없는 돈이라고 판단하고는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공동묘지를 만들었습니다. 그 공동묘지의 이름은 '피밭'입니다. 스승의 피를 팔아먹은 유다의 더러운 돈으로 산 묘지라는 뜻이고, 자살한 유다의 더러운 피가 묻어 있는 묘지라는 뜻입니다.
유다가 남긴 은 30은 결국 시체들을 장사하는 묘지로 쓰여진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는 얼마의 재산이 있습니까? 그 재산으로 무엇을 남기시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재산을 많이 모아서 자식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식에게 재물로 유산을 물려주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부모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고서 그 재산을 잘 관리하고 좋은 곳에 쓴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100이면 90 이상은 부모의 재산을 제대로 관리하지도 못하고 다 탕진해버리고 맙니다. 재산만 탕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생은 실패하고 비참해지고 말 것입니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선진국은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습니다. 재산 대신에 지식을 물려주고, 공부하거나 기술을 익혀서 자기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으로 가르쳐줍니다. 그것으로 부모가 할 일은 다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나 대학교만 마치면 자식들에게 뒷돈을 대주지 않습니다. 가르칠 만큼 가르쳤으니까 제 앞길은 이제 제 스스로 알아서 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돈은 전부 사회에 환원을 합니다. 복지사업에 기부한다든지, 교회에 기부해서 교회나 복지사업기관에서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데 쓰게 만듭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지 모릅니다. 어렵게 벌어들인 돈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정말 값지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후진국일수록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려고 합니다. 유산을 많이 물려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자식들에게 물려줄 재산이 얼마나 있습니까? 자식들에게 물려줄 재산이 없다면 그것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단지 자식들을 공부시킬 수 있을 만큼만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지들이 알아서 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게 정말 자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식들의 인생을 망치지 않고, 그들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 갈 수 있도록 그들의 인생을 살려주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참으로 값진 헌금이 들어왔습니다. 지난해 연초에 교회당 건축을 위해서 3천만원을 작정하고 첫 번째로 천만원을 헌금한 분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우리 교인들 가운데 몇 천만원씩 헌금할 수 있을 정도로 여력이 있는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작년 연초에 천만원을 헌금하면서 2년 안에 3천만원을 헌금하겠다고 작정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해 말에 두 번째 천만원을 헌금했고, 지난주에 마지막 천만원을 헌금했습니다. 본인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헌금을 했습니다만, 이 적은 숫자에서 누가 헌금을 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지금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면서 돈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하는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매달 일정 금액을 적금을 했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아무리 돈이 필요해도 그 돈만은 이미 하나님께 드린 헌금이기 때문에 절대로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천만원을 만들어 헌금한 것입니다. 그 천만원은 그분의 형편을 생각하면 몇 억, 몇 십억의 가치가 있는 정성어린 헌금입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어린 자식들을 위해서 몇 억을 은행에 저축해 놓은 것보다 더 아름다운 일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믿음의 부모를 둔 자녀는 부모로부터 재산을 유산으로 받지는 못할지라도, 디모데처럼 가장 위대한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받는 복된 아이들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몇 달 전에는 오랫동안 직장생활하다 퇴직하신 집사님 한 분이 퇴직금 중에서 십분지 일을 하나님께 헌금으로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몇 십, 몇 백만원도 아닌 천만원이 넘는 것을 헌금한다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많은 것으로 헌금할 수 없는 분들에게 부담을 드리기 위해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의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분들은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아는 분들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세상에는 재물보다 중요한 것이 많은데 그분들은 재물보다 더 아름다운 것, 믿음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유산으로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재산을 남기는 것은 '피밭'이라는 공동묘지, 죽음을 남기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유다를 통해서 우리가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가룟 유다는 그의 죽음을 불명예스러운 죽음으로 남기고 갔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유다의 처음 출발은 굉장히 좋았습니다. 꿈도 있었습니다. 남쪽 지방 출신이 북쪽 지방 출신인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온 용기도 대단했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거기까지는 참 좋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은 좋지 않았습니다. 스승을 배반하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는 스스로 나가서 목매어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인생을 시작하는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죽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불쌍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은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입니다. 자살하는 사람만큼 불쌍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들어오면서 나타난 병폐 가운데 하나가 생명을 경시여기는 풍조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도 소중하게 여겨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요즘에는 자신의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우리나라에서 하루에 36명이 자살을 한다고 합니다. 2시간에 세 명씩 자살하고 있는 셈입니다. 엊그제는 서울의 한 대학 음대 교수가 5층에서 투신해 자살했습니다. 노동자들은 노동자들대로 자살하고, 학생들은 성적이 좋지 않다고 자살하고, 외국인 노동자들은 인권을 무시한다고 자살하고, 이라크나 팔레스타인에서는 자살폭탄테러가 계속되고 있고. 이런 상황에서 자살이라고 하는 것이 이제는 전혀 낯설지도 않고, 뉴스거리가 되지도 않을 정도입니다.
더 한심한 것은 자살한 사람들을 추모하면서 그들을 마치 영웅처럼 취급하고 있는 사회적인 풍토입니다. 지난 4월 호텔 24층에서 투신해 자살한 홍콩의 배우 장국영씨를 추모하는 열기가 한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지난 9월에는 WTO협상에 반대하며 농민운동가 이경해씨가 멕시코 칸쿤에서 자살했는데, 국내에서는 열사라고 추앙하며 얼마나 떠들썩했는지 모릅니다. 심지어는 수능시험을 치던 도중에 첫 시험을 망쳤다고 자살한 학생을 추모하는 집회까지 열렸으니, 이 사회는 자살을 미화하는 사회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이유야 어떻든 간에 자살로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죄악이며 가장 비참한 방법을 선택한 것일 뿐, 자살은 절대로 미화되거나 추앙되어서는 안됩니다.
가룟 유다의 자살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가치 없는 자살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장 비참한 최후로 그의 인생을 마감 지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유다가 자살 때에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이렇게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 방언에 그 밭을 이르러 아켈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행 1:18-19)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죽음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만, 모든 사람에게 죽음은 부지불식간에 찾아옵니다. 그 외면할 수 없는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은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이 가장 아름다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생의 가장 비참한 때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인생의 마지막이 가장 아름다워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말씀인 전도서는 지혜의 왕 솔로몬이 쓴 글입니다. 솔로몬의 그의 인생의 마지막 때에 지혜서를 쓰면서,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는 지혜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사람입니다. 왕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력도 누려보았습니다.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돈에 구애받지 않고 풍족하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솔로몬 시대의 풍요로움을 성경은 이렇게 말해 줍니다.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와 천하 열왕보다 큰지라...왕이 예루살렘에서 은을 돌 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 같이 많게 하였더라."(왕상 10:27) 얼마나 풍족하게 썼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에게는 왕비가 700명이나 되었고, 후궁이 300명이나 되었습니다.(왕상 11:3) 천명이 되는 부인을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어느 것에나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 바로 솔로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솔로몬이 인생의 말년이 이런 탄식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심지어는 천년의 갑절을 산다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누리는 것에는 행복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전 6:6)
전도서의 말씀이 바로 그런 솔로몬의 인생 허무를 노래하는 말씀들입니다. 아무리 부요하고, 아무리 큰 권력을 가졌고, 아무리 많은 쾌락을 누렸다고 하더라도 솔로몬은 거기에서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솔로몬이 인생을 가장 참되게 살아가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입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문이니라." '내가 살아온 인생의 여정을 진솔하게 털어놓은 이야기를 다 들었는데, 정말 인생의 보람과 가치는 오직 하나 뿐이더라' 그런 말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것" 이 이상 인생을 값지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아름다운 죽음을 맞았던 많은 분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마지막까지 완성한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죽는 그 순간까지 눈이 흐리지 아니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습니다.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은 사람들에 둘려싸여 돌에 맞아 죽었지만, 그는 믿음으로 하늘을 우러러 하늘 문이 열리고 주님께서 자신을 지켜보고 계신다고 하는 황홀한 광경을 보면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런 스데반의 거룩하고 장엄한 죽음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감명을 받았고, 그의 죽음은 사울이라는 마음이 완악한 청년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습니다.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도 그의 인생의 마지막에는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아름다운 마지막 생애를 살다 간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마지막은 어떨 것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아니 어떤 마지막이고 싶으십니까? 부끄러운 재산을 남기는 것도 수치입니다. 그리고 부끄러운 죽음을 맞는 것은 더욱 큰 수치입니다. 우리의 마지막이 하나님 앞에서 조금도 부끄럽지 않도록 오늘 우리의 삶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들로, 가장 가치 있고 보람된 인생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다가 남기도 간 것은(2)
마가복음 14:17-21, 민수기 14:36-38 / 안효관 목사
우리는 지난주에 유다가 남기고 간 것들 가운데 두 가지 수치스러운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유다가 남기고 간 첫 번째 것은 은 30세겔이라는 유산이었는데, 그 은 30이라는 유산은 스승의 피를 팔고서 얻은 배신의 값이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우리 후손들에게 재물을 유산으로 남기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비록 유다와는 달리 우리가 모은 재산이 정당한 것이라 하더라도, 재산보다는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하고, 삶의 지혜를 물려주는 것이 아름다운 유산입니다. 무엇보다도 자녀들이 '우리 부모님의 삶과 신앙은 존경스럽고 본받을만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부모는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다운 유산을 남겨준 것입니다.
유다가 남기고 간 두 번째의 것은 치욕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을 살았는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가 죽음의 순간입니다. 어떤 죽음을 죽었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을 살았느냐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참으로 훌륭한 삶을 살았으면서도 인생의 마지막 한 순간에 일평생 쌓아놓은 업적을 무너뜨리고 마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 평생을 치욕스런 삶을 살았던 사람이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함으로써 오랫동안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에 남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해야 합니다. 아름다운 황혼을 준비하면서 오늘의 삶에 최선을 다할 뿐만 아니라, 내 인생의 마지막이 하나님과 교회 앞에 부끄러운 모습이 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건 연세 많으신 분들만 그렇게 준비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내 인생의 마지막이 아름답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이 어느 순간에 갑자기 닥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유다가 남기고 간 세 번째의 것을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유다가 남기고 간 세 번째의 것은 그의 치욕스런 이름입니다. 옛말에 '인사유명 호사유피(人死留名 虎死留皮)'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이름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안효관'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단순한 명칭이 아니라, 이 안효관이라는 사람의 전체를 대변해주는 이름입니다. 인격, 신앙, 사람됨, 행적 등등이 그 이름 안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안효관'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무엇이 생각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게 곧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내 인생을 대변해주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이름 앞에 단 몇 마디의 수식어를 붙일 수 있다면 어떤 수식어가 붙을 것 같습니까?
제가 교육지도 전도사로 중학생들을 지도할 때, 한 수련회를 하면서 인간관계 훈련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을 맡았던 선생님이 가장 먼저 사람들 앞에 자기 자신을 소개는 시간을 주었습니다. 자기를 소개하는데 단 한 문장으로 소개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저는 얼굴이 너무 예뻐서 고민인 아무개입니다'라는 식으로 이름 앞에 자기를 소개할만한 단어를 몇 개 넣어서 한 문장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저를 소개할 차례가 되었을 때 제가 이렇게 저를 소개한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는 안효관입니다." 물론 학생들로부터 웃음 섞인 야유를 듣기는 했습니다만, 저는 학생들에게 저를 그렇게 소개했습니다. 그 때는 그 말이 제게 가장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한 번 해 보실까요? 두 분씩 짝을 지어서 지금 옆에 계신 분에게 단어 몇 개를 넣어서 자신을 소개해 보세요.
그런데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나를 소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해 보십시다. 이제는 상대방에게 "제가 보기에 당신은 이러 이러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풍기는 그 사람의 향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향내를 풍기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매스꺼운 냄새를 풍기기에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꺼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좋은 향기가 나는 사람 곁에는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향기로운 꽃이 벌들이 모여드는 것처럼,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러나 반대로 악취를 풍기는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가까이 하려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5)라고 말해 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서 세상에 그리스도라고 하는 아름다운 이름에 걸맞는 향기를 풍겨내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겨내는 사람이라면 우리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것입니다.
조직폭력배의 두목 곁에는 폭력배들이 모여듭니다. 사기치는 데는 2등 하라면 서러울 정도로 사기치는 데 도사인 사람 곁에는 사기꾼들이 모여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겨내는 사람에게는 세상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들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진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내 주위에는 어떤 사람들이 더 많습니까? 세상에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 더 많습니까, 아니면 불평과 원망 가운데 얼굴에 '짜증'이라고 쓰여진 사람들이 더 많습니까? 내가 나를 바르게 판단하지 못한다면, 지금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 하는 것을 보면, 나를 볼 수 있습니다. 내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의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죽은 후에 우리 이름이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 이름을 들은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가치 있는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 이름 듣는 것을 거북해 하거나 이름 듣는 것조차 불쾌하게 생각한다면 나는 인생을 헛되게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제가 몇 명의 이름을 열거해 보겠습니다. 그 이름을 들을 때에 여러분의 마음에 어떤 느낌이 오는지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히틀러, 이완용, 가롯 유다." 어떤 느낌입니까? 또 다른 이름들을 열거해 보겠습니다. "슈바이처, 테레사 수녀님, 유관순 여사, 에이브러햄 링컨." 이번에는 어떤 느낌입니까?
이 사람들 앞에 붙여진 수식어만 보아도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던 사람이고, 그들이 후세 사람에게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히틀러' 그러면 우리는 '세계 대전의 원흉' '유태인을 600만 명이나 죽인 살인마' 이런 수식어가 생각납니다. '이완용' 그러면 '매국노'라는 단어가 떠오르고, '가롯 유다' 그러면 '배신자'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반대로 '슈바이처' 그러면 '아프리카의 성자' '흑인들의 아버지'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테레사 수녀' 그러면 '인도의 빈민굴에서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살다 간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링컨' 그러면 '흑인들을 노예에서 해방시켜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만큼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제가 지난 여름 미국에 갔을 때, 시카고라는 도시에서 공부를 했었습니다. 시카고는 '일리노이'라고 하는 주(州) 안에 속해 있는 미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도시입니다. 시카고에서 운행되고 있는 자동차는 '일리노이주'에서 발행한 번호판을 달고 다녀야 합니다. 그런데 일리노이주의 자동차 번호판에 한결같이 들어가 있는 문구 하나가 있습니다. "Land of Lincoln"(링컨의 땅)이란 문구입니다. 링컨은 원래 일리노이주 출신이 아닙니다. 켄터키 주에서 태어났지만,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에 일리노이주에서 주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일리노이주 사람들은 링컨 대통령이 자기들 땅에서 살았었다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링컨 대통령은 그렇게 미국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링컨은 비록 56세에 암살 당해 죽고 말았지만,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었습니다. '링컨'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그들은 마음이 설렐 정도입니다.
그런데 가롯 유다는 어떻습니까? 그는 인류 역사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그의 이름 앞에 '배신자'라는 부끄러운 꼬리표를 달고 다녀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선 그를 향해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을 사람,' 이 얼마나 수치스런 말입니까?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 아름다운 이름에 먹칠이나 하지 않았을텐데' 그런 말입니다.
'가롯'이란 말은 유다가 태어난 고향 이름입니다. 그리고 '유다'라는 말은 '찬양'이라는 뜻을 가진 너무나도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신약성경에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여럿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 가운데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동생이 있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유다서'를 쓴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사람 가운데도 유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지칭할 때에는 가롯 유다와 구별하기 위해서 "가롯인 아닌 유다"(요 14:22)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직가라 하는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행 9:11)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선지자 가운데 '유다'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유다라는 이름의 뜻이 너무 좋기 때문에 유다라는 이름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배신하고 스승을 팔아먹은 유다를 가리켜서는 '가롯 유다' '예수를 파는 자 될 유다'라는 말이 수식어로 따라다닙니다. 그는 '찬양'이라는 이름의 뜻과는 너무나도 반대되는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스승 예수님을 배신함으로써 그 이름을 치욕스럽게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가롯 유다는 자신의 이름만 수치스럽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가 태어난 고향조차도 수치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후세에 어떤 이름으로 여러분의 이름을 남기고 싶으십니까? 가롯 유다와 같이 수치스런 이름으로 남고 싶은 분은 없겠지요?
사람은 최소한 세 가지 방법으로 세상에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첫 번째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오랫 동안 기억되는 이름으로 남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있으나 마나 한 이름으로 살다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것이고, 세 번째는 가롯 유다처럼 치욕적인 이름으로 오랫 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구약성경에 보면 아름다운 자취를 남긴 두 사람의 이름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그들은 12명의 정탐꾼으로 가나안 땅에 갔다온 사람들입니다. 출애굽기 13:1절 이하에 보면 가나안 땅에 정탐꾼으로 갔던 12명의 이름들이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각 지파의 대표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12명의 이름 가운데 오늘날 우리에게 남아 있는 사람의 이름은 단 두 명밖에 없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나머지 10명은 성경에 분명히 이름이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그들의 이름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이름을 기억할만한 어떤 아름다운 모습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낙담케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불쾌하게 만들었던 사람들일 뿐입니다.
똑같은 자격으로 뽑혀서 똑같이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12명의 사람들 가운데 나머지 10명은 그 이름을 기억할 필요조차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스라엘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오늘날 성경을 읽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그들의 신앙과 정신이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우리 교회가 올해로 창립 27주년을 지냈습니다. 창립 50주년쯤 되어서 우리 교회의 역사를 책으로 편찬한다고 할 때, 과연 내 이름이 그 책에 어떻게 기록될까? 단지 역사의 한 페이지 모퉁이에 남아 있는 있으나마나 한 이름으로 남지 않을까? 아니면 누군가 후세에 내 이름을 읽으면서 내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을 수 있을까?
여러분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교회 요람에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직분을 맡은 제직들은 사진까지 곁들여서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름들 가운데는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우리 교회가 영원히 기억하고 픈 아름다운 이름들도 있을 것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어떤 분들의 이름은 있으나마나 한 이름으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교회에 유익을 끼치기는커녕 그 이름 때문에 수치가 될 이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이름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바라기는 우리 교우님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이 영원히 기억될 아름다운 이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있으나 마나 한 이름이 되지 말고, 더구나 지워버리고 싶은 이름으로 남지 않고, 모두가 우리 교회에 없어서는 안될 이름, 그 이름만 들어도 만나보고 싶은 이름, 우리 후대의 사람들이 그 이름을 듣고 한번쯤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이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의 이름이 아름다운 이름으로 남을 수 있겠습니까? 가롯 유다와 같이 수치스러운 이름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그 해답을 사도 바울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사울이라는 이름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사울이라는 청년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죽이는데 누구보다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데도, 또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는 데에도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의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에서 바울로 변했습니다.
만일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 평생을 사울로 살았다면, 성경은 사울을 예수님을 핍박한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가롯 유다 다음으로 성경 속에 수치스러운 이름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났고, 그의 생애가 바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의 이름은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아름다운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이름은 세상에 속한 이름이 아닙니다.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이 되었습니다.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은 세상 그 어느 책에 기록된 이름보다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한국을 빛낸 위인들의 이름이 기록된 위인전에 올라간 이름보다, 생명책에 우리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것이 더 명예스러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옛것을 다 포기했기 때문에 그 이름이 더욱 향기 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수많은 신앙인들이 있었지만, 사도 바울의 이름이 더 빛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이 가졌던 지난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줄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느 누구와 비견한들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출세하고 싶으면 출세할 수 있었습니다. 출세를 위한 그의 길이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명예를 얻고 싶으면 충분히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학문과 문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재산을 원했다면 그는 남부럽지 않을 만큼 재물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세상에서 가졌던 모든 것을 가치 없는 것으로 포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그 무엇보다 가치 있고 소중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기 비움'의 신앙이 사도 바울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의 이름이 세상에서나 교회 안에서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이름이기를 원한다면 우리에게도 자기 비움의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나를 내세우지 않고 남을 위해서 자신은 한없이 낮아질 때에 우리의 이름은 향기로워 집니다. 대접받으려 하지 않고 예수님을 닮아 섬기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이름이 다른 사람의 가슴에 진한 감동으로 남아 있게 됩니다. 주님을 위해서 내가 죽어질 때에 주님께서 내 안에 살아 계셔서 우리의 이름을 존경받는 이름으로 높여 주십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고,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 이게 신앙의 신비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죽으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나십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실 때에 우리는 향기 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고, 그럴 때에 우리의 이름이 향기 나는 이름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이름은 향기 나는 이름입니까, 수치스런 이름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는 성도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알렉산더 장군은 굉장히 덕망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부대원들이 알렉산더 장군을 존경 할 정도로 그는 지도력을 갖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혼자서 부대 순시를 하다가, 어느 막사에서 병사들의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병사들의 대화 내용은 이런 것 이였습니다. "알렉산더 그 녀석 말이야, 그 놈이 군인이야? 그 놈은 우리부대에 있어서는 안될 놈이야. 그런 녀석이 어떻게 우리부대에 계속 남아 있는 거야." 이 이야기를 들은 알렉산더 장군은 급히 장군 집무실로 들어와서 부관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부관에게 지금 당장 가서 그 이야기가 어떻게, 무슨 근거로 나오게 되었는지 알아오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잠시 후 부관이 돌아와서 상황을 보고했습니다. 그 내용인즉, 그 부대에는 알렉산더 장군과 똑같은 이름의 알렉산더라는 이름을 가진 병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병사는 군인으로써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하고 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다 들은 알렉산더 장군은 부관에게 그 병사가 있는 막사로 안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막사로 가보았습니다. 마침 그 막사에는 병사들이 사역을 나간 터라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없어야할 막사 안에서 술 냄새가 진동하고 한 구석에서 심하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였습니다.
그곳으로 가보았더니, 한 병사가 군복 단추를 풀어헤친 채, 술에 취해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부관이 그 병사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그러자 그 병사가 "곤한 잠에서 깨운 놈이 누구야" 라고 고함을 치며 비틀거리면서 일어났습니다. 게슴츠레 눈을 떠보니 눈앞에는 알렉산더 장군이 서 있었습니다. 장군 앞에서 이런 꼴을 보였으니 꼼짝없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 병사는 알렉산더 장군에게 살려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습니다. 알렉산더 장군이 그 병사에게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러자 그 병사가 대답을 합니다. "제 이름은 '알렉산더'입니다."
그 말은 들은 알렉산더 장군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큰소리로 말을 합니다. "알렉산더! 너는 이제 사형이다." 그러자 그 병사는 눈물을 흘리며 알렉산더 장군의 다리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알렉산더 장군이 아주 강한 어조로 말을 합니다. "이제 네가 너에게 두 가지를 명하겠노라.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 너의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며 너의 삶을 바꾸어라.(Change your name, or change your life!)"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이름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 집니다.
후포중앙교회 교인이라는 것에 부끄럽지 않게 살고 계십니까? 후포중앙교회에서 받은 직분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 이름에 합당하게 살지 못하면 내 이름 때문에 하나님의 몸된 교회인 우리 후포중앙교회가 욕을 먹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부끄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의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너의 삶을 바꾸어라."
여러분, 우리의 이름은 정말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들입니다. 이 귀한 이름에 욕이 되지 않고, 오히려 내 이름을 통해서 아름다운 감동을 나누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나뭇가지에 작은 새 한 마리가 앉았다가 날아가도 한 동안 나뭇가지가 출렁거립니다. 그럴진대 하물며 한 평생을 살다간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이름이 다른 사람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는 이름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송별회
마가복음 14:17-26 / 이필재 목사
복음서 중에서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수난에 가장 많은 비중을 두고 기록한 성경입니다. 14장에서 16장까지 예수님의 수난 내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수난이 시작되는 기록입니다. 예수님이 지난 3년 동안 12명의 제자와 함께 많은 일을 하시고 이제 모든 일에 마감을 선언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25절에 보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 자리를 마지막으로 너희들과 함께 한 모든 사역을 끝낼 것이라는 은퇴 선언을 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그 자리는 제자들과의 마지막 공식 행사요, 송별회 모임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배경으로 해서 세계에서 가장 값지고 유명한 그림이 생겼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으로서 성만찬 그림, 1495년에 그리기 시작해서 1497년에 완성한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지금 세계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며 성도들 가정에 가장 많이 걸려 있고, 원본은 이태리 밀라노 산타마리아 성당에 보관이 되어 있는데 이제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봄으로 색깔이 변색된다고 제한해서 관람할 수 있다고 합니다.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보관하는 그림이 오늘 말씀을 배경으로 작품화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하는 두 가지 성례전이 교회에 있습니다. 하나는 세례요, 하나는 성찬입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 말씀대로 기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12명의 사도 선택을 받은 이 제자들이 예수님과 똑같이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서 십자가를 져 줄 것을 요청하는 거룩한 모임이 이날 저녁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매우 심각한 분위기로 제자들을 바라보고 계신데, 하나님 나라 확장에 도움이 되라고 자신이 선택하시고 3년 동안 훈련 과정을 지내온 제자들이 과연 자신이 없는 기간에 거룩하고 고난스러운 사도의 사명을 완수해 줄 것인가 이 마지막 자리에서 조용히 생각하면서 사명의 단합대회를 심각히 진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때 제자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이 사순절 기간에 우리가 한번 조명해 보려고 합니다. 열두 제자의 그 각기 나타나는 개성이 하나님의 계획에 어떻게 쓰임을 받게 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일 첫번째 제자는 안드레였습니다. 안드레는 베드로의 동생이 됩니다. 직업은 어부였는데 본래는 세례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이 제자의 특징은 결단력이 있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어부생활을 하다가 선지자 요한이 나타나니까 그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실천에 옮겼습니다. 본래 이 안드레라는 이름의 뜻이 “남성답다”라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판단하는 진리를 향하여는 언제나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진리의 빛이 자기 앞에 비추어질 때는 주저하는 것이 없이 생애의 어떤 중요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아주 박력 있는, 이름 그대로 남성다운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로 존재하는 어느 날 세례 요한이 외치는 새로운 진리의 소리가 이 안드레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나는 메시아가 아니요 그의 길을 예비하러 온 광야의 소리로다.” 요한이 이런 말씀을 하니까 “그럼, 그 어린양이 누굽니까?” 예수를 소개했어요. 그랬더니 안드레는 새로운 진리의 빛을 따라서 또다시 결단을 하죠? 그래서 첫번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됩니다. 그러고 나서 자기의 형인 베드로에게 가서 전도했습니다. “형도 나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자. 이는 메시아다!” 그래서 자기 형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제자가 되도록 공헌한 안드레는 기독교 역사에 최초의 제자요, 전도사가 됩니다. 결단력 있는 남성다운 사람으로 특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 사역에는 바로 이렇게 안드레 같이 결단의 사람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안드레는 훌륭한 제자의 사역을 잘 감당했고 하나님의 일이라면 인생을 어떤 모험의 자리에도 던질 만큼 결단 능력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런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선교사로 떠나는 사람,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 다 이런 결단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아, 내가 이것을 위해서 몸을 던져야겠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져 왔습니다.
두번째 제자는 베드로입니다. 동생의 소개를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베드로의 특징은 공로자로 나타납니다. 지금도 카톨릭 교회에서는 “교회를 이 땅에 창립한 사람, 일대 교황이 베드로다.” 그럴 만큼 공로자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수제자라는 명칭이 따라 붙는 것입니다. 성격이 다소 다혈질적으로 실수와 잘못하는 부분도 많이 나타납니다. 그런데도 이 예수님은 베드로를 통해서 최고의 큰 수확과 기쁨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제일 큰 기쁨의 순간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하는 베드로의 고백 순간인데, 사실상 주님의 목적은 모든 사람이 그 고백을 하도록 사역하신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의 고백은 이 땅에 교회를 탄생시키는 공로자로 이렇게 특징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베드로의 고백은 이 땅에 교회의 기초가 되는 공로자로서 인정받아 주님으로부터 최고의 공로상을 받았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그랬습니다. 다소 실수의 면이 보여도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는 베드로와 같은 공로자가 필요합니다. 이 땅에 교회를 세우는 일의 공로자, 이것이 베드로의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는 요한입니다. 이 요한의 특징은 ‘사랑의 사도’로 나타납니다. 가장 어린 나이에 제자가 된 사람으로서 예수님에게 막내가 받는 사랑의 대상이 요한이었습니다. 우리가 심리학적으로 분석을 하면 원망이라든가, 불평, 문제아로 성장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고 평가를 합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필요한 때 충분한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성장 배경이 평생을 불평스럽게 사는 마음을 만들었다고 해석을 합니다. 이 요한이 사랑의 사도가 된 것은 그가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 자신이 그것을 인정하는 기록을 요한복음에 자신이 남겼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평생 받은 사랑을 전하는 사랑의 사도로서, 전설에 의하면 나이가 100살이 넘었을 때 설교하라고 제자들이 강대상에 업어다 놓으면 “사랑하라”고 하는 말 세 마디를 하고 설교를 끝냈다는 전설까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사랑의 그림자 역할을 하는 제자가 필요합니다. 하나에게서 나오는 이 사랑의 따뜻한 입김이 공동체를 편안하게 하고 온 교회를 따뜻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을 삶의 우선 선택으로 정한 하나님의 자녀, 사실 그런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우주의 법칙은 사랑이며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이 우주를 창조하신 것이다. 십자가의 정신이 뭐냐? 사랑 빼놓고는 아무 것도 없다. 행복의 첫째 조건이 뭐냐? 사랑이다. 사랑 속에 인간 존재가 들어있다. 이것을 빼놓으면 삶의 가치가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사랑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실천하고 받을 수 있는 그런 사도로 요한이 열두 사도 가운데 나타나고 있습니다.
네번째 사도는 야고보입니다. 이 제자의 특징은 희생입니다. 신기합니다. 제자 중 첫번째로 주님을 위해 피 흘리며 죽음으로 십자가 정신을 제일 먼저 실천한 제자입니다. 우리가 지금 열심히 주님을 믿고 삽니다. 그러나 그 주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죽어야 할 일이 내 앞에 다가왔을 때는 어떨까? 그 죽음의 현장을 유유히 나선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실상 이 문제는 베드로도 무서워서 피해갔지 않습니까? 천수를 누리고 자연사하는 사람들도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일인데 아주 건강한 젊음을 강제 수단에 의해서 목숨을 끊게 한다는 그런 일이 쉽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십자가입니다. 이것은 누군가는 피를 흘려 죽어야만 다른 사람이 그 혜택으로 받는 진리입니다. 야고보가 첫번째 주자가 되어 줌으로써 그 후예들이 이 땅에 수없이 많은 피를 흘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서게 된 첫번째 순교자! 야고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열두 제자 가운데 나옴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된 것입니다.
다섯번째는 빌립입니다. 이 빌립의 특징은 영적 열망의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열두 제자 중에서 예수님에게 그 영적 갈망이 너무 심해서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한 사람이 빌립입니다. 영적 체험을 중요시하고 항상 은혜를 갈망하는 상태!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누구도 시험해 본 일이 없으신데 빌립은 시험하셨습니다. 5,000명 군중이 배가 고팠을 때 “어떻게 하면 이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겠느냐? 너는 항상 영적 세계에 있기를 소원하는데 이 현실적 문제에 영적 대답을 해 보라!” 그렇게 시험해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는 영적 갈망이 많아서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설교를 들으면서 하루 종일 감격하는 사람이 있고, 교회에 들어오면 설교 제목만 보고도 눈물이 줄줄 흐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만나고 그 기쁨을 감출 수가 없어서 금방 나다나엘한테 가서 전도를 하죠?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를 내가 만났다. 와 보라!” 영적 갈망이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은 항상 “할렐루야”입니다. 항상 “할렐루야, 은혜, 감사” 날마다 그 은혜 속에서 살기를 좋아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여섯째는 도마입니다. 이 사람의 특징은 설명 없이도 우리가 잘 압니다. 의심이 많은 현실주의자! 그런데 나쁜 방향의 의심이 아닙니다. 열 명의 제자가 다 똑같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다고 말하면 그것은 도마가 믿어야 됩니다. 도마 하나를 바보 만들기 위해서 그 거룩한 일을 열 명이 짜고 거짓말을 했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도마는 절대 믿지 않습니다. “내가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지 않고 그 손에 못 자국과 옆구리에 창 자국을 만져보고 나서야 시각적, 감각적 효과 후에 믿나이다.”를 말한 믿음에 좀 인색한, 의심이 많은 사람! 하나님의 자녀 공동체는 이런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끝없이 의심 많은 신자가 있어요. 이 사람은 성경을 봐도 의심 날 것만 골라서 기억하기를 좋아합니다. 온 교회가 한 길을 가도 독야청청(獨也靑靑) 나 홀로, 나 홀로……. 임종하는 시간에도 “이제 천국으로 가시는 것입니다.” “가봐야 알지.” 끝까지 의심합니다.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쁜 방향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도 있다고 우리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일곱번째는 바돌로매입니다. 이 사람은 간사함이 없는 정직의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사실 베드로도 위급한 상황이 오니까 거짓말을 합니다. “나는 예수를 모른다.” 몇 번씩 모른다고 합니다. 이 바돌로매의 말은 보증수표입니다. 두 가지 학설이 존재하는데 바돌로매의 다른 이름이 나다나엘이라는 학설과 아니라는 학설이 있는데, 동일인이라는 학설이 유력합니다. 이 나다나엘을 보고 “이는 참 이스라엘인이요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가 그다.” 상황 따라 말을 바꾸지 않는 간사가 없어 예수님의 칭찬을 받은 사람, 진실 자체를 삶의 기본으로 삼는 제자! 아마도 이 바돌로매는 말없는 12인 공동체의 대변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의 말은 보증수표야.” “그 사람이 말했으면 그대로 되는 거야.” “그 사람이 다니는 교회라면 나도 다니고 싶다.”라는 반응을 보이는, “그 사람이 믿는 예수라면 나도 믿을 수 있는 예수” 그러니까 삶 자체가 전도가 되는 그런 사람이 바돌로매라서 예수님에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여덟번째는 마태입니다. 이 사람의 특징은 헌신과 희생입니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좋은 것을 일순간에 모두 다 무시하면서 주님의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로마는 유대 나라를 점령한 후에 매우 어려운 일에 부딪힙니다. 유대인들은 물질관이 얼마나 지독한지 나라는 빼앗겼어도 물질은 안 빼앗깁니다. 자, 어떤 강대국이 다른 나라를 점령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나라의 좋은 것을 빼앗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의 유대 나라 점령은 로마의 적자 운영을 갖다 주었습니다. 나라는 빼앗겼어도 돈은 안 빼앗긴다. 그래서 로마는 세금 걷은 관리들에게 큰 혜택을 주었습니다. 즉, 징세권 판매를 해서 삭개오 같은 사람이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입니다. 세리장이 직업입니다. 로마 정부가 혜택을 많이 주니까 자기 일을 열심히 함으로 돌아오는 것을 자기가 많이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부자가 될 수 있어서 그 당시에는 세관에 있는 사람이 사회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안정된 직업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관에 앉아있는 마태를 부르시니 곧 예수를 따랐다고 그랬습니다. 그 좋은 자리를 아낌없이 쓰레기통에 집어던져 버리고 예수의 제자가 되는 희생의 대표자 역할을 마태가 해 주었습니다. 예수의 부름이 있을 때는 어떤 희생도 아까워하지 않는 성도들! 지금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확장되어 가는 것입니다. 조금은 무모하고 무식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상식을 초월하는 희생을 주저하지 않고 드리는 주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 줌으로써 이 땅에 교회가 이렇게 발전되어 왔습니다.
아홉번째는 시몬입니다. 시몬은 몇 가지 별명이 따라옵니다. ‘가나안인’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셀롯인’이라는 설명이 따라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이름이 있는 이유가 사회 정의에 열정이 있습니다. 애국심이 강합니다. 그러니까 로마의 팔레스타인 통치에 피 끓는 사람으로 나타났습니다. 민족주의 성향의 제자가 필요합니다. 우리나라 3·1운동도 이런 제자들이 들고 일어나서 3·1운동이 성립된 것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삶을 산다는 것은 천당만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이 지상에도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세상에서도,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 정의가 승리하는 사회 창조에 공헌할 수 있는 제자! 미국에서는 ‘Social Gospel’이라는 말이 공식화 되어있는데, 이것이 사회 복음주의입니다. 나 혼자만 예수 믿고 천당 가는 것이 아니고 이 사회가 하나님을 향할 수 있는, 그런 데로 앞장서서 일하는 이런 열정적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이런 사람들이 있음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열번째 제자는 다대오입니다. 이 제자의 특징은 여성적이며 따뜻합니다. 모임에는 이런 사람이 끼워있어야 평화가 유지되고 또 평안이 주어집니다. 여인의 특징은 섬세하면서도 평온함입니다. 거친 것의 반대! 그의 언어는 항상 따뜻하고 발생하려는 불협화음을 조용히 잠재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제자가 필요합니다. 교회에서 문제가 될 듯 하는 것은 아예 미리미리 덕이 있는 말로 문제의 소재를 없애버리는 따뜻함과 평온의 사람! 여성적이며 섬세하고, 말 한마디도 문제가 될 것은 하지 아니하고 덕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만 생각합니다. 아마 다대오의 노력이 열두 명의 공동체를 항상 따뜻하게 사랑으로 이끌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열한번째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라고 그랬습니다. 이 제자의 특징은 성경에 안 나타납니다. 특징이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 역할인지 알 수도 없고 마치 없어도 괜찮은 사람 같은 그런 존재로 등장합니다. 그럼, 필요 없는가? 아니죠. 거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이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에는 특징이 없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너무 특징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보다 조용히 있는 것이 유익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있는 것도 훌륭한 제자의 역할 중에 하나인 대표적 모습이 이 알패오의 아들의 모습에서 나타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저는 오래 전에 신학교 다닐 때 친분 있는 집사님 한 분이 시계방을 운영하셨습니다. 자연히 거기에 가게 되어서 대화를 많이 하게 되었는데 그 집사님이 시계 수리를 할 때 옆에서 들여다 본 적이 많습니다. 시계 뒤 뚜껑을 열면 그 안에 부속품이 가득하게 들어있는데 그것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재미있습니다. 어떤 기계는 쉴새 없이 움직입니다. 그것을 유사라고 하던가 일초마다 쉬지 않고 계속 움직입니다. 그게 움직이지 않으면 그 시계가 안갑니다. 어떤 톱니바퀴는 한 시간에 한번 돕니다. 어떤 톱니바퀴는 일분에 한바퀴 돕니다. 어떤 톱니바퀴는 가만있습니다. 하루 종일 움직이지 않고 가만있습니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도 있고 가만히 있어야 되는 것도 있고, 그렇게 조화가 되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어떤 사람은 쉴 새 없이 움직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만 앉아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조화가 되어서 쉴 새 없이 다 뛰어다니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다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조화가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지런히 움직이고 가만히 있는 모든 기계가 다 연합해서 하는 일은 바늘 세 개를 정확하게 돌려주는 일입니다. 초침과 분침과 그리고 시간의 추를 돌려주는 일인데, 이 바늘 세 개를 왜 돌려주는가? 주인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오늘 우리들은 서로 조화 있게 움직여서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각자 사명이 있는데, 이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같이 가만히 있는 사람도 있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설명 없이도 너무나도 잘 아는 가룟 유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역사에는 이렇게 역행하는 사람도 나타난다.”입니다. 주님은 가룟 유다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하셨습니다.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다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 그랬습니다. 이런 사람도 생긴다는 것입니다. 레오나르도 이후 수많은 화가들이 성만찬 그림을 그려서 다소 차이가 나타나는데 원본의 그림을 보면 예수님의 얼굴은 눈동자가 보이지 않죠? 지긋이 감겨진 눈으로 아래만을 응시하는 듯 내려다보시는 얼굴 모습이고 얼굴 내용은 수심에 가득 찬 심각한 모습으로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마음은 무엇이 가장 괴로웠는가? 그 원작에 대한 설명은 이렇습니다. 가룟 유다 때문이라고……. 그 이유가 분명히 성경에 나타납니다.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에 대한 근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서 성만찬 기록은 마태복음 26장, 마가복음 14장, 누가복음 22장 다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열한 제자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으십니다. 가룟 유다에 대해서는 길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도 18절에서 21절까지 가룟 유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열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다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 다른 제자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오직 그 자리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가룟 유다에 대해서만 언급을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심각한 표정은 가룟 유다 때문으로 확실히 조명이 됩니다. 열한 제자는 모두 주님의 부탁대로 살았습니다. 똑같이 사명의 마지막을 종결했고 순교 당했습니다. 요한 한사람은 가장 오래 살아 요한계시록을 남기고 에베소 지방에서 자연사하였고 가룟 유다는 심판을 받고 저주스럽게 죽었습니다. 누군가는 피 흘리며 쓰러져야 이루어지는 기독교의 구원의 진리를 예수님은 자신이 이제 실천하시려 하시며 제자들에게 너희도 나와 같이, 그래서 공식적 모임을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단합대회를 하시는 것이 이 사순절에 주님이 행하신 모습이 됩니다.
어느 날 링컨 대통령은 남북 전쟁을 치루고 통일한 이후에 ‘해리엣 비쳐 스토 (Harriet Beecher Stow.)’라고 하는 아주 키가 작은 여류 작가 하나를 일부로 만났습니다. 대통령이 그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미국의 노예를 해방시킨 사람이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 해리엣 비쳐 스토는 우리가 아는 대로 목사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철저한 청교도적 훈련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어느 날 그가 삶의 현장에서 흑인들의 부당한 학대를 목격합니다. 그때부터 그는 노예들과 접촉했고, 그들의 인권에 관심을 가지고 ‘이 억울하고도 부조리한 제도에 대한 나의 할 일이 무엇인가?’ 그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서 “엉클 톰스 캐빈”이라고 하는 글을 씁니다. 그 내용은 한 노예의 삶을 발표하는 책이었는데, 거기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톰 아저씨가 자신이 받은 모든 학대와 고통을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관을 보면서 견디게 했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행복으로 그 책에 나타납니다. 마지막은 이웃을 위해서 작은 선을 베푸는 일에 학대를 받아 매를 맞고 죽어버립니다. 이 책이 미국 사회에 퍼지면서 링컨의 남북 전쟁은 하나님의 정의로운 사역으로 평가를 받아들였고 곧 국민의 호응을 받아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승리한 이후에 “남북전쟁의 승리는 당신의 엉클 톰스 캐빈 때문이요. 당신이 한 일이요.” 대통령이 그를 만나 그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사렛 갈릴리라는 시골 동네에 구차스러운 생활의 단순 노동자 몇 사람, 주님의 선택을 그 사람들이 받았더니 그 몇 사람의 십자가 헌신이 오늘의 세계를 복음으로 정복하는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심각한 표정으로 우리 모두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21세기를 누가 나를 위해서 또 그런 일을 해줄 것인가?’ 우리 모두 오늘 말씀의 주님을 생각하며 후대에 나에 대한 역사의 조명은 어느 색깔로 나타날 것인가? 열두 제자 중에서 한 사람을 빼고는 어떤 역할을 내가 감당할 것인가? 사순절 영적 사색의 시간을 가지고 조용히 주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