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36]灑掃應待(쇄소응대)의 하루
한 집안을 지키고 살아가면서 ‘灑掃應待(쇄소응대)’가 기본이라는 것을 어제 실감했다. 小學의 기본인 ‘쇄소응대’의 掃는 비로 방안이나 마당 등을 쓴다는 뜻(입춘첩으로 쓰는 掃地黃金出 開門萬福來할 때의 ‘掃’)이며, 灑는 물을 뿌리며 청소하다는 뜻. 정읍의 ‘아름다운 선배’가 전주의 ‘貴人’과 함께 우리집을 방문한다기에 모처럼 아침부터 온집안 淸掃에 나선 것이다. 청소의 옛날말이 소쇄일 듯. 본채와 사랑채의 방과 거실 등에 물을 뿌리고 쓸고 닦으며 정리정돈을 한 게 두어 시간은 족히 됐을 듯. 이른바 손님맞이로 기분이 좋았다.
5년 연상의 선배는 家兄의 친구이고, 귀인은 한평생 周易의 大家로서 이 땅의 숨은 漢學者이다. 연전에 전주의 음식점에서 한번 만나 뵈었는데, 아주 점잖고 말수가 적은 것으로 봐 매우 샤이(shy)하신 분인 것같다. 친구들은 ‘손님’이 아닌 관계로 긴장할 필요도 없이 평소 모습대로 맞이하면 되는데, 상당히 어려운 분들이라 신경이 제법 쓰인 것이다. 아무튼, 이날의 방문 목적은 手談(바둑)을 한번 둬보자는 것. 귀인은 아마추어 高手인 듯했다. 일단 봄햇살을 맞으며 툇마루에서 2점을 갈고 나누는 수담은 얼마나 신선한 경험인가? 원래 툇마루를 놓았던 이유도 마음 맞은 분들과 바둑을 두고 주안상을 놓고 막걸리를 나누고 싶어서였다. 허나, 요즘은 바둑을 즐기는 사람도 거의 없다. 선배는 나보다 약간 手가 낮고 귀인은 수가 높았으나, 성격처럼 신중하고 무리를 하지 않았다.
반면에 나는 한때 ‘光化門 겡까도리(鬪鷄, 즉 싸움닭을 뜻하는 일본어) 3급’이었다. 쉬운 우리말로 ‘논두럭 깡패바둑’. 速棋로 휘몰아쳐 상대방의 魂을 빼 漁父之利로 이기는(대부분 기분만 좋았지 실속이 없이 지는) 바둑스타일이다. 그러니까 내 페이스로 끌어당겨버리는데, 고수를 만나면 이런 수는 통하지 않는다. 다행히 어제는 처음 두는 만큼, 귀인이 신중을 거듭하다 세 판을 내리 당했다. 3연패의 경우, 치수 고치기에 들어가는 게 불문율, 하여, 네 번째 판은 나의 定先(정선에도 3연패를 하면 互先이다)으로 시작됐으나, 아무래도 정선이 무리인 줄은 내가 더 잘 안다. ‘제대로’ 두면 나의 수는 들켜버려 창피를 당할 텐데, 처음이니까 많이 봐준 덕을 톡톡히 봤다.
선배는 나에게 두 점을 놓아야 하는 치수. 이 정도의 실력이면 3인이 리그전을 벌여도 재밌는 형국이다. 선배와 귀인은 3-4점 접바둑 치수. 아무튼,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는 신선놀음이라고 하듯, 몇 판 두지 않아도 서너 시간은 금세 가버린다.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지는데, 이렇게 우리집 툇마루에서 바둑을 둔 게 언제였더라. 가물가물. 선배는 윤태호가 그림 <미생> 만화책 8권을 가져오셨다(실은 나의 아들이 선물한 책으로 빌려드린 것). 쏙 빠지게 하는 엄청 재밌는 바둑만화책인데, 최근 윤태호 작가를 인터뷰한 친구에게 선물할 생각이다.
‘紳士게임’인 바둑은 ‘마인드 스포츠(mind sport)’이다. ‘경우의 수’(19×19)가 너무나 많아 인공지능(AI)이 아무리 발달된다해도 바둑만큼은 영원한 聖域일 줄 알았는데, 난다긴다하는 프로기사들이 모두 쓰러졌다. 천만다행인 것은, 우리의 호프 이세돌이 5판1승, 人間의 체면을 세운 것(그것도 컴퓨터의 失手였다니, 진짜 ‘오 마이 갓’이다). 이제 神算(바둑의 귀신)들이 3점을 놓고 뒤는 데도 이기기 어렵다고 하니, 그 세계는 또 무슨 세계인지, 앞으로 세상은 어떻게 될지 몹시 궁금하다.
쇄소응대의 '應待'는 손님을 맞이하여 접대한다는 뜻인데, 이게 사실은 기본인데도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쇄소응대에 따라붙는 단어가 '進退'이다. 나아가고 물러날 줄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어디 그뿐인가. 부모를 친애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벗과의 신의에 관한 예절을 근본으로 삼아 '修身濟家 平天下'의 道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 <소학>의 序가 아니던가.
아무튼, 선배 덕분에 모처럼 집안 청소도 하고 귀인과 수담도 몇 판 나누었으니, 어제는 말 그대로 해피한 날이다. 이런 날만 자주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월말부부로 살아 여러 가지로 불편하고 아쉬워도 고향 낙향은 아무래도 잘한 일같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