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입학시험 치르러 서울행 기차에 오르던 열다섯 살
내 주머니엔 어머니가 삼동(三冬) 내내 옷감 판 돈 1500환이…
홍사덕 한나라당 의원 (대구 서구, 6선, 1943년생)
고향은 영혼의 원형(原形)이다. 모든 색채와 멜로디, 냄새와 철학이 알고 보면 그곳에서 비롯된다. 이 깨달음은 첫사랑과 닮았다. 떠난 다음에야 어렴풋이 느끼게 되고 세월이 흐를수록 사무쳐 온다.
열여섯, 만으로 치면 열다섯 되던 1958년이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서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터무니없는 자신감으로 온몸은 들떠 있었다. 그날 경북 영주역은 정지 화면으로 내 기억에 남아 있다. 그래서일까. 클로드 모네와 제임스 터너의 기차 그림을 봤을 때 내가 떠올린 것은 영주역이었다. 데오도라키스의 ‘기차는 여덟 시에 떠나네’를 들었을 때도 그랬다. 내가 떠올린 영상은 늘 영주역에서 맴돌았다.
서울은 초행이었다. 그러나 나는 죄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주인의 호의로 두 군데 있던 영주의 서점에 있는 책을 거의 다 읽었고 서울에 대한 결론도 이미 내려둔 터였다. 서울은 도스토옙스키가 거닐던 뻬쩨르부르그(페테르부르크를 당시 모든 책에서 이렇게 표기했다)와 닮았을 것이다!
저녁 으스름에야 서울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그 직전 매우 심각한 상황을 발견했다. 어머니가 마련해준 1500환 가운데 600환을 쓰리꾼(소매치기)이 제몫으로 챙겨간 것이다. 팔당에서 옥빛 한강을 보느라고 넋을 놓은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때의 강렬한 색채감 때문일까. 나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한강보다 아름다운 강을 본 적이 없다. 강의 물빛은 19세기 러시아 화가들이 가장 솜씨있게 옮겼지만 그래도 그날의 팔당 물빛에는 미치지 못한다. 스메타나의 ‘몰다우’와 슈트라우스의 ‘도나우’ 멜로디에서도 나는 늘 팔당 한강만 떠올렸다.
친구 아버님이 택시를 타자고 했다. 두 사람은 신설동이라는 데서 내렸고, 나는 친척이 가게를 하는 통의시장까지 갔다. 책에서 읽었던 가로등은 없었다. 길거리는 어두웠고 장명등이 빛나는 내 마음속의 뻬쩨르부르그와도 달랐다. 그때까지 나는 남쪽으로 칠팔십 리쯤 떨어진 안동, 동쪽과 북쪽으로는 40리 남짓한 봉화와 희방사까지 가본 게 다였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수학여행 때 경주를 다녀왔지만 나는 그저 영주의 두 곳 서점에 있는 책으로 모든 걸 대신했다.
완전히 어두워진 다음 통의시장 앞에 택시가 섰다. 친구 아버님에게 500환을 받았던 기사에게 삯을 물었다. 소매치기를 면한 900환으로 모자라면 “내 이름이 홍사덕이요. 기억했다가 나중에 유명해지면 찾아오시오. 후하게 갚겠소”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 시절, 합승한 사람은 먼저 내리나 나중에 내리나 같은 값을 물었다. 나는 인정미 넘치는 이 ‘불합리한 제도’에 대해 두고두고 찬양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의 후유증 탓일까. 여행과 산행 때 나는 무척 용감한 편이다. 1971년인가 스리랑카에서 북한 대사관이 퇴거 명령을 받았을 때 마침 이집트 카이로에 있었다. 비자도 없이 단숨에 들어갔다. 싱가포르로 쫓겨났을 때는 완벽한 무일푼이었지만 그렇다고 단 한순간도 걱정한 기억은 없다.
통의시장 안은 백열등으로 밝았다. 친척 가게는 벌써 문을 닫았지만 맞은편 상점에서 연락해 줬다. 무슨 말인지 자세히는 못 알아듣겠으나 용건은 분명히 알겠다는 말씀과 함께 베풀어준 호의였다. 나의 영주 사투리가 서울 토박이들에게는 알아들을 만한 외국어였음을 그때 처음 알았다.
아지매가 오기 전 휘황한 백열등과 풍성한 물건들을 보면서 콧노래를 불렀다. 당시 내가 제일 좋아하던 노래, 절절한 소망이 담긴 노래, 원방현씨가 불렀던 ‘서울을 가야지’였다. ‘가야지 가야지, 서울을 가야 하지…’. 아버지는 철도고등학교나 체신고등학교를 은근히 권했다. 학비도, 옷값도, 숙식비도 안 드는 곳이고 그래서 시골의 없는 집 수재들이 몰리던 학교였다.
돈 걱정 하실까봐 수학여행 간다는 얘기를 숨겼던 나였다. 무료였던 ‘세계를 그대 품 안에’라는 영화 외에는 어떤 영화도 본 적이 없는 나였다. 선생님이 명목상의 과외비만 받고 방과후 수업을 했을 때도 철탄산에 혼자 올라가서 공부했던 나였다. 그러나 철도·체신고등학교 진학만은 단칼에 거절했다. 나에게 맡기라고 했다.
아 참, ‘서울을 가야지’는 유행가였다. 당시 영주극장에서는 시내가 쩡쩡 울릴 정도로 성능 좋은 라우드 스피커를 걸어 놓고 영화 시작 전에 한 시간쯤 유행가를 틀어줬다. 집에 라디오가 없는 나에게는 명실공히 음악 선생이었다. 그래서 소풍 때면 “작년 같은 흉년에도 쌀밥을 먹었는데 올 같은 처녀 풍년에 장가도….” 운운하는 노래로 흥을 돋우고 친구들로부터 가수 소질이 있음을 인정받기도 한 터였다. 연락을 받은 아지매가 왔다. 국민학교 입학 전에 봤을 뿐이고 8촌인가 10촌인 형님의 부인이었는데 진심으로 반색을 했다. 데리고 간 집은 삼 남매가 곤히 잠든 단칸방이었다.
올해 설립 23주년이 되는 새조위(새롭고 하나된 조국을 위한 모임)가 탈북자 뒷바라지를 통일 예행 연습 삼아 하고 있는 것도 그날의 단칸방에서 싹텄을 것이다.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잔 나누는 마음으로 100만원 남짓의 일자리라도 알아봐 주고 선한 병원과 착한 의사들로 그물망을 만들어 치료를 받도록 돕는 식이니까 다를 바가 없는 셈이다. 새조위는 8년째 ‘북녁 고향으로 보내는 편지’를 공모해서 펴내고 있다. 그날 단칸방에 고단한 몸을 뉘었던 내가, 훗날 국회의원도 하고 장관도 했던 내가, 만약에 영주를 찾을 수 없다면 어떤 심경일까를 생각하며 이 사업을 벌인 것이다.
서울사대부고는 음악·미술·체육은 실기시험이었고 그중 음악은 노래 부르기였다. 차례를 기다리며 ‘서울을 가야지’를 흥얼흥얼했다. 수험번호 앞뒤에 있던 홍창표와 홍근식이 보다 못해 종친의 호의를 베풀었다. ‘그게 만약 유행가라면’ 바로 낙방할 것이라는 충고였다. 받아들였다. 딱하다는 뜻을 전하는 데는 서울 말씨가 제격이라는 점도 함께 알게 되었다.
한 달 남짓 사이에 해일이 계속 닥쳤다. 해리 벨라폰테의 카네기홀 실황 콘서트를 LP판으로 들었다. 라디오에서 냇 킹 콜과 팻 분의 노래를 들었다.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은 학교 브라스밴드 연주로, 오페라 ‘카르멘’은 단체관람으로 접했다. 인류 역사상 남인수와 현인이 가장 위대한 가수라고 믿었던 나에게 그것은 정녕 해일이었다.
그러나 복기하듯 더듬어 보면 그것은 바다가 나일강을 받아들이듯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벨라폰테의 ‘쿠쿠루쿠쿠 팔로마’를 들었을 때 나는 땅거미를 밟고 지게 진 실루엣으로 돌아오는 머슴의 모습을 떠올렸다. ‘1812년 서곡’을 듣는 동안 내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6·25 때의 피란과 학가산 중턱에서 피어오르던 네이팜탄 연기와 화염이었다. 진실로 고향은 모든 색채와 멜로디, 냄새와 철학을 잉태하고 있다가 때 맞춰 풀어줬던 것이다.
열다섯의 그날 내 책가방에는 자신 없던 기하 참고서 한 권, 주머니에는 어머니가 삼동 내내 옷감 방문판매로 마련한 1500환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山氣日夕佳 飛鳥相與還 (산의 빛깔은 해질녘에 아름답고 새들은 떼지어 돌아오누나)’.
요즘 특히 좋아하게 된 도연명의 시구다. 내가 이름 붙인 ‘죽령70리’의 타오르는 노을과, 하늘을 까만 점으로 덮으며 큰산(소백산)으로 자러 가던 까마귀떼들의 모습을 회상하면서….
첫댓글 의원님은 언젠가 소백산으로 돌아가시겠지요. 그때 우리는 어디있을까요? 의원님 모시고 죽령70리길을 함께 등반하고있을수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영광이겠지요.
"고향은 영혼의 원형이다." 라는 말씀이 생각을 잡아두는 군요. 이왕에 고향으로 가시려면 통일을 꼭 이룩하시고 가세요...
의원님 글은 읽으면서 장면이 하나하나 떠 오릅니다... 마음이 짠한듯 맑아지는 느낌 입니다...
고향의 색체와 고향의 냄새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
도시의 삭막한 벽안에서 자란 사람에 비하면 큰 복을 누리는 거지요.
꿈과 용기가 넘치던 소년의 나이에서 어느듯 50여년의 세월이 흘럿습니다 의원님의 인생은 대한민국의 역사라 느껴집니다
아직도 정정하신 의원님 건강이 허락 하는한 조국을 위해서 헌신해 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