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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민 아나운서가 아시안게임 축구 국가대표 코치로 지명된 김남일을 인터뷰하는 장면
인터뷰 도중 고생하는 남편을 가까이서 지켜본 아내로서 너무나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자
아내를 얼른 안아주며 김남일도 함께 눈물을 글썽인다.
저 사람들은 전생에 나라를 몇 번이나 구했기에 저런 아름다운 사랑을 지속할까?
사진만 봐도 또다시 감동의 눈물이 솟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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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의학이 발달하여 왜국과 중국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백제는 정기적으로
왜국에 의학박사와 채약사(採藥師)를 파견하여 의약분야를 지도했으며, 중국 황실에도 초청되어 자
문에 응했다. 삼국시대의 이러한 선진의술은 고려를 거쳐 조선까지 전승되었다. 특히 태종에서 성종
에 이르는 기간에는 학문적 체계와 국가적 제도까지 정비하여 이론적으로 의술을 더욱 심화시켰으
며, 왕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시술의 폭을 확대해나갔다.
이와 함께 중국으로부터도 꾸준히 새로운 의술을 도입했는데, 금‧원의 이론과 명의 이론이 달라 혼란
이 야기되었다. 의원들 간에도 이견이 확산되자 연구를 통해 조정하고자 하는 노력도 뒤따랐다. 그
결실이 16세기 양예수(?~1597)와 허준(1539~1615)의 이론으로 집대성되었다. 허준은 다양한 진료방
법을 개발하여 적용하는가 하면, 팔도를 돌아다니며 우리나라 사람들의 체질에 잘 맞는 토종약초를
찾아내어 조제법을 개발, 치료에 접목함으로써 전무후무한 의료 발전을 가져왔다. 양예수가 저술한
『의림촬요』는 의학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었으며, 허준이 『동의보감』을 저술하는 데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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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은 평안도 용천부사를 지낸 부친의 서자였다. 흔히들 허균(1569~1618)의 신분을 홍길동과 혼동
하여 서자로 알고 있는데, 그는 허난설헌과 함께 적자(適者)로서 과거에 급제하여 황해도 도사(부지
사)까지 지냈다. 허균이 「홍길동전」에서 서자의 심리와 사회적 위상을 실감나게 그릴 수 있었던 것
은, 일찍이 허난설헌과 함께 서자인 천재시인 이달로부터 시문학을 공부하면서 서자들의 처지를 지
켜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반해 진짜 서자인 허준은 같은 양천허씨이면서도 30년 후배
인 허균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는 처지였다.
이에 허준은 고향인 경기도 양천현 파릉리(현 서울 강서구 가양동)를 떠나 경상도로 가서 신분을 속
이고 과거에 급제하여 결국 내의원에 들어갔다. 선조 8년(1575)에는 모든 의원의 꿈인 어의(御醫)가
되었다. 차근차근 실적을 쌓은 허준은 선조 23년(1590)에는 의관으로서는 쳐다볼 수도 없던 당상관
(정삼품 통정대부)에 제수되었다. 이후에도 허준은 승승장구하여 선조 39년(1606)에는 의관으로서는
전무후무한 양평군(정일품 숭록대부)에 봉해졌다.
서자 주제에 품계가 높아지자 사촌이 땅을 사면 급성복막염에 걸리는 대소신료들이 점점 늘어났다.
허준을 주인공으로 한 여러 TV 드라마에서 익히 본 대로, 수많은 관리들이 허준을 깎아내리고 모함
하여 승차를 막았다. 그러나 다른 어의들이 고치지 못하는 왕과 왕족들의 병을 워낙 잘 고치다 보니
선조의 신임은 흔들림이 없었다. 광해왕 2년(1610), 허준은 오랜 각고 끝에 드디어 『동의보감』을
완성하여 바쳤다. 『동의보감』을 다 읽어본 광해왕은 소인배들의 숱한 반대를 물리치고 ‘장차 양천
허씨들에게는 적자와 서자의 차별을 두지 말라’는 특명을 내렸다. 양천허씨의 족보에 의하면, 후대
임금들은 모두 광해왕의 이 특명을 따랐던 것으로 나타난다. 양천허씨 가문의 여러 서자가 과거를 통
해 관리로 등용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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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조선왕 27명 가운데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꼴통이었다. 여러 신하들로부터 수차에 걸쳐 미구
에 왜놈들이 침략해올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대비도 하지 않고 소일하다가 임
진왜란을 당하여, 1백만 명 내외로 추산되는 민‧관‧군이 죽고 전국이 초토화되는 5천년 역사상 가장
참담한 전화(戰禍)를 입었다. 신하의 위업에 질투를 못 이겨 전란에 가장 공이 큰 이순신 장군을 참하
려 한 옹졸한 소갈딱지도 예종이 남이 장군을, 중종이 조광조를 죽인 만행에 버금갔다. 그런 자가 허
준에게는 무한 신뢰를 아끼지 않아 왕실 소유의 의학서적 500여 권을 내어주며 이를 참조하여 반드
시 훌륭한 의서를 편찬하라고 독려했다.
그러나 선조가 죽자 그 동안 허준을 질투하던 대소신료들이 벌떼같이 들고일어나 내의원의 총책임자
인 허준을 참하라고 난리를 쳤다. 광해왕은 하는 수 없이 허준을 거제도에 유배했다. 전화위복이었
다. 훗날 정약용이 유배지 강진에서 「목민심서」를 비롯한 500여 권의 명저를 편찬했듯이, 허준 또
한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동의보감』 집필에 매진했다. 허준이 유배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동의
보감』은 빛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게 중론이다. 광해왕은 유배 1년 만에 허준을 사면했으며,
허준은 집필하던 원고를 싸 들고 상경했다. 한양에 올라와서도 쉬지 않고 집필을 계속한 허준은 광해
왕 2년(1610) 『동의보감』을 완성하여 부왕 선조에 이어 끝까지 자신을 믿고 뒷받침해준 광해왕에
게 바쳤다.
내용을 다 읽어본 광해왕은 크게 탄복하여 허준에게 후한 상을 내린 뒤, 내의원에 『동의보감』 간행
기구를 설치하여 3년 만에 활자본으로 간행했다. 광해왕은 계속 『동의보감』을 출간하도록 명하여
내의원뿐만 아니라 전국의 민간 의원들에게도 배포했다. 허준이 참고서적을 일일이 열거하고 자세한
언문 주석까지 붙인 『동의보감』은 배포되자마자 의원들에게 큰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의원들이
진맥의 결과와 환자의 증상을 보고 병명을 쉽게 파악하여 즉석에서 처방을 내릴 수 있도록 쉽고 명료
하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전국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제와 조제법을 수록하여
환자의 부담을 대폭 줄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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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의 학술적 가치와 의학史적 의의에 대해서는 지금도 연구가 진행 중이다.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동의보감』을 분석하여 새로운 논문을 내고 있다. 중국에서는 1763년 처음 간행된 이래
지금까지 10년 단위로 출간을 이어오고 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도 ‘중국의 의원 가운데 『동
의보감』이 없는 사람은 멀리까지 가서 5냥을 내고 책을 빌려다 처방을 내린 뒤 책을 돌려준다’고 기
록되어 있다. 왜국에서도 1724년 처음 간행된 이래 널리 유포되어 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새로운 해
설서가 나오고 있다. 보감(寶鑑), 참으로 보물 같은 책이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매일 날씨 타령 이지만 저녁무렵 야탑역에서 집까지 걸어서온 약40분, 어김없이 땀으로 범벅이 된 더위는 아직 물러나지 않았다 입니다. 말복까지 이어진다니 8월 중순이 넘아야 조금은 시원해질 것 같습니다. 납량 추리소설을 읽으며 더위를 무난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