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중환(1690~1756)은 본가와 처가가 모두 명문집안이었다. 이중환의 아버지는 도승지‧예조참판‧충청
도관찰사 등을, 장인은 대사헌을 지냈다. 이중환은 24세에 급제하여 일찌감치 등용되었지만, 그놈의
당쟁 때문에 결국 청운의 꿈을 접어야 했다. 권력을 잡고 있던 남인들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는
데, 이중환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소론으로 분류되었다가 노론에 의해 30대에 유배되는 좌절을
겪었다. 이럴 때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병가지상사로 여기고 자신이 속한 당파가 권력을 되찾을 때까
지 기다렸지만, 이중환은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관직을 포기한 채 전국을 주유하며 여생을 보냈다.
『택리지』는 그 恨의 결실이다.
이중환은 숙종 39년(1713) 증광별시에 급제하여 등용된 뒤 경종 2년(1722) 병조좌랑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신임사화를 맞아 급전직하로 추락했다. 후사가 없는 경종은 노론의 주장을 받아들여
이복동생인 연잉군(영조)을 세제에 책봉해놓았는데, 노론이 그새를 못 참고 빨리 옥좌를 내놓으라고
성화를 부리다가 소론에게 역풍을 맞은 사건이 신임사화였다. 이때 이중환도 여러 차례 고문을 당한
끝에 영조 2년(1726) 외딴섬으로 귀양을 갔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도 이중환의 문집에도 섬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중환은 이듬해 잠시
유배에서 풀려났다가 다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유배형을 받았다. 이때도 유배지와 이후의 행적에
관한 기록은 일절 없다. 이중환은 영조 27년(1751) 『택리지』를 탈고하여 역사에 다시 등장했다.
『택리지』를 읽어본 옛 동료들은 다투어 서문이나 발문을 써주는 등 긴 공백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환대해주었다. 책은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금강산 여행이 크게 유행하던 시절이라 『택리지』
는 격조 높은 관광안내서로 제격이었던 것이다.

『택리지』는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하여 그 동안 관 주도하에 편찬된 백과사전식 지리서와는 근
본적으로 다른 형식을 갖추고 있는 책이다. 전라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직접 체험하거나 들은 이야기를 책으로 펴낸 사실적인 내용이다. 각 지역의 역사적 사건과 관련 인물
얘기를 입체적으로 구성한 솜씨는 젊은 선비들이 밤을 새워가며 읽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살 만한 곳
을 찾아간다’는 뜻의 책 제목도 선비들의 구미에 딱 들어맞았다.
『택리지』는 <사민총론><팔도총론><복거총론><총론> 등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민총론>
은 사람의 신분이 사농공상으로 구분된 내력과 사대부의 사명 등을 논했다. 그러나 사대부가 농공상
의 일은 할 수 있어도 농공상이 사대부의 일은 할 수 없다는 결론은 신분의 벽을 극복하지 못한 편견
이다. 사대부들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다. 교육부 정책기획관 나향욱은 기자들
과 가진 술자리에서 ‘나는 신분제를 공고화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민중은 개‧돼지로 취급해야 한다’고
얘기했다가 파면을 당했다. 그러나 소송 끝에 같은 생각을 가진 사법부로부터 징계가 지나치다는 판
결을 받아 강등으로 징계수위가 낮춰졌다. 나향욱은 강등도 지나치다며 불복신청을 했다. 민중은 개‧
돼지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팔도총론>은 행정구역에 구애되지 않고 각 지역의 총괄적 특성을 설명했다. 그러나 조선의 뿌리를
중국의 곤륜산에 둔 지정학적 설명을 보면, 이중환 역시 사대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일개 양반에
불과하다는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복거총론>은 사대부가 살 만한 곳과 살아서는 안 될 곳을
구분하여 설명했다. 이중환은 복거(卜居)할만한 곳의 선정기준을 지리‧생리(生利)‧인심‧산수 등 네 가
지로 꼽았는데, 산수(山水)의 형세와 흙의 빛깔까지 두루 살펴 복거의 조건을 따졌다. <총론>에서는
이 땅의 역사를 개괄하고 정치적 상황을 비판한다. 결론은 이 땅에 이상향은 없다는 것이다. 유교이
념에 얽매이지 말고 불교를 포용하여 만물유심조의 이치를 깨달았더라면, 굳이 20년 간 팔도강산을
주유하지 않고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결론이다.

후배 학자들이 『택리지』의 수많은 필사본을 펴내면서 제목도 시시마꿈 새로 붙였다. 『팔역지』
『팔역가거지』『동국산수록』『진유승람』『동국총화록』『형가승람』『동국지리해지』 등이
모두 『택리지』의 다른 이름이다. 필사자마다 『택리지』의 내용 중 제 맘에 드는 부분의 의미를 강
조하여 제목을 바꾼 것이다. 이 또한 초유의 일로 『택리지』가 방탄소년단의 빌보드차트 1위 기록
만큼이나 신선했던 모양이다. 왜놈들도 1881년에 『택리지』를 번역‧분석하여 김정호의 《대동여지
도》와 함께 훗날 조선을 식민통치하는 데 결정적인 참고자료로 삼았다니, 쩝.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크게 구애 받지 않는 당뇨인의 절제식 이지만 3개월 마다 검진하는 이번은 더욱 운동도 부족 하였고 먹은 음식 또한 마음대로 였습니다. 당화색소 7 이상이 넘어 담당의사로 부터 경고를 받는게 뻔한 부절제 생활인듯 합니다. 늘 이런 각오와 후회를 거듭하며 장기간 약을 복용하고 있는 환자의 변 입니다. 모처럼 에어컨과 선풍기를 켜지 않고 잠든 밤, 아침 역시도 시원한 날씨 입니다. 즐거운 하루 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