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어원과 유래
하곡인 보리가 여물지 않은 상태에서 지난해 가을에 걷은 식량이 다 떨어져 굶주릴 수밖에 없게 되던 4∼5월의 춘궁기(春窮期)를 표현하는 말.
한자어로는 맥령(麥嶺)이라고 한다. 농민이 추수 때 걷은 수확물 중 소작료, 빚 또는 그 이자, 세금, 각종 비용 등을 지급하고 난 뒤 나머지 식량으로 초여름에 보리가 수확될 때까지 버티기에는 그 양이 절대 부족하다.
따라서 이 때에는 풀뿌리와 나무껍질[草根木皮] 등으로 끼니를 잇고 걸식이나 빚 등으로 연명할 수밖에 없으며, 수많은 유랑민이 생기게 되고 굶어 죽는 사람 또한 속출하였다. 이 때, 식량이 궁핍한 농민을 춘궁민 또는 춘곤민(春困民)이라 하였다.
추수기 전에도 피고개[稗嶺]라 하여 식량궁핍기가 있고, 이 때에 식량이 떨어진 농민을 추궁민 또는 추곤민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기간의 길이와 심각성에 있어 보릿고개가 피고개보다 훨씬 심하였다. 따라서 ‘춘궁맥령난월(春窮麥嶺難越)’, 또는 ‘춘풍기풍춘색궁색(春風飢風春色窮色)’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고대로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가뭄이나 홍수, 황해(蝗害:메뚜기로 인한 농사피해) 등으로 인하여 벌어졌던 참담한 굶주림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타난다. 정약용(丁若鏞)은 기아시(飢餓詩)를 지어 보릿고개의 참상을 그리기도 하였다.
한편 1960년대 초까지만 하여도 초근목피로 연명하여 부황증(浮黃症:오래 굶어 살가죽이 들떠서 붓고 누렇게 되는 병)에 걸린 농민들을 볼 수 있었다. 한국인이 보릿고개에서 벗어난 것은 1960년대 후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실시된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보릿고개가 구조적으로 정착되어 이를 연례적으로 겪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이다. 1910년대에 실시된 토지조사사업을 통해서 일제는 농민들의 토지를 탈취하였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발전되어 온 소작농의 토지경작권마저 박탈하여 반봉건적 지주제를 확립시키고 농촌의 계급구조를 지주와 소작농으로 양극화시켰다.
자소작농(自小作農)을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약 80%에 이르렀던 일제강점기의 소작농은 평균 5할을 훨씬 넘는 소작료 외에도 지조(地租) 및 각종 공과금, 용수료 및 수리조합비, 토지공사 및 수선비, 마름의 보수, 지주와 마름에의 접대비 및 증여물 등을 제하고 나면 전체생산물의 약 24∼26%밖에 얻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 농촌을 일제의 식량기지화하기 위하여 1920년대에 전개되었던 두 차례의 산미증식 계획은 우리 나라의 농민을 더욱 몰락시켰다. 산미증식은 수리조합건설에 그 근거를 두고 있었고, 이에 의한 조합비 부담의 고통은 조합원 농민이 토지를 방매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농민의 소작농화 경향과 궁핍화가 더욱 심화되었고, 우리 나라의 쌀은 일본으로 수출하고 만주의 좁쌀을 수입하여 먹는 현상이 일반화되었다. 한편 1930년대의 농업공황은 농산물가격을 폭락시켜 농민의 궁핍상은 나날이 더해갈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농가의 빚은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예컨대 1930년에는 전체 소작농민의 약 75%가 1호당 평균 65원의 빚을 지고 있었고, 1933년의 조사에 의하면 조사대상농가의 78%가 평균 115원의 빚을 지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더욱이 빚의 용도가 생산자금이 아니라 식량구입에 쓰여졌다는 것을 보면, 농민의 궁핍상이 얼마나 심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이 대부분의 빚은 수확기에 매우 높은 이자로 원금과 같이 변제되었다. 따라서 빚을 진 소작인은 소작료를 내고 빚을 갚고 나면 남는 것이 별로 없어 다시 식량부족을 겪는 악순환이 거듭되었다.
1930년의 조사에 의하면 춘궁기에 식량이 모두 떨어져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농가호수가 125만 3,000호에 달하였는데, 이는 전체농가호수의 48%에 이른다. 이들을 궁민이라고 하는데, 궁민은 농업지대인 남한지역에 많아 그 비율이 55%로 나타난다.
한편 순소작농 중에서는 68.1%, 자소작농 중의 37.5%, 자작농 중의 18.4%가 궁민이었다. 특히 쌀의 주산지인 전라북도의 경우 전체농민 중 궁민의 비율이 62%에 이르고 있다.
이들은 보릿고개에 대비하기 위하여 추수 뒤에도 쌀·보리·무를 혼식하든지 또는 보리죽을 먹거나 질 나쁜 쌀을 조금씩 섞어 먹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일제강점기의 우리 농민들은 밥은 죽으로, 쌀은 잡곡으로, 잡곡은 만주의 좁쌀로, 그리고 대부분의 농민은 만주의 좁쌀도 제대로 구하지 못하여 싸라기를 산채나 나물의 묽은 죽에 띄워 먹곤 하였다.
이들은 초근목피 중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먹었다. 소나무껍질·칡뿌리·솔잎 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며, 또한 전단토(田丹土)나 흰 찰흙을 죽에 섞어먹기도 하였다.
수탈자의 입장에 있던 당시 조선총독부 당국자까지 <조선> 1921년 3월호에 “먹을래야 먹을 것이 없고, 입을래야 입을 옷이 없는 방랑의 신세가 되어, 산야나 노변에 쓰러져 친척과 친구의 간호도 받지 못한 채 외로이 인생행로에 종언을 고하는 자가 연년이 거수(巨數)에 이르고 있다.”고 하였다.
이 때 혹독한 수탈을 참아가며 소작농에 안주하거나 걸인의 무리를 이루어 유랑하거나, 아니면 만주나 시베리아로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우리 소농층의 양상이었다.
한편 일제는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합작시켜 동아권업공사(東亞勸業公司)와 선만척식주식회사(鮮滿拓殖株式會社)를 설치하여, 만주이민을 지원한다는 명목 아래 우리 농민을 만주의 소작농으로 쫓아냈다.
1939년까지 이렇게 나간 유민(流民)은 동아권업공사가 2만 550명, 선만척식주식회사가 6만 5,015명으로 집계하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 농민이 겪은, 심한 식량난은 보릿고개라는 극한상황으로 드러났고, 이런 참상은 만주로 이민간 우리 농민에게도 예외일 수 없었다.
당시 조선총독부 농림국장이 “1936년 미곡연도 쌀소비량은 1,209만석으로 추정되지만 이미 소비된 1,033만석을 공제하면 남는 것은 176만석”이라고 한 것만 보아도 그 참상을 짐작할 수 있다.
앞의 176만석의 쌀이 당시 2,500만 동포가 여섯달(5∼10월) 동안 나누어 먹어야 할 양식이었다면 한 사람 앞에 하루 평균 0.04홉씩 돌아가는 셈이다.
이 0.04홉도 당시 우선적으로 백미배급을 받던, 우리 나라에 거주하던 일본인이 60만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양민들에게는 거의 한 톨의 쌀도 돌아갈 게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우리 농민이 연례적으로 혹심한 보릿고개에 시달린 것은 특히 1931년 만주사변 이후 1937년 중일전쟁에 이르는 대륙전쟁과 태평양전쟁 기간일 것이다. 태평양전쟁의 와중에서 한국인은 일찍이 겪어보지 못하였던 혹심한 보릿고개를 겪어야 하였다.
이처럼 극심한 약탈과 10년 동안 흉년이 겹쳐 일찍이 없던 보릿고개의 참상을 겪는 가운데, 우리 나라는 8·15광복을 맞게 되었다.
1945년의 광복은 우리 농민을 천년의 질곡에서 해방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따라 ‘농토를 농민에게’라는 농민의식이 집약되어 드디어 1949년 6월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원칙에 의한 토지개혁법이 제정되어 농민이 ‘제 땅’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남북분단의 비운을 맞은 데다 정치·사회·경제적 혼란은 보릿고개를 극복하기에는 너무도 부정적으로만 작용하고 있었다.
200만으로 추산되는 해외귀환동포와 월남동포로 농민생활은 여전히 참담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식민적 지주생활에 연연한 구지주층도 온존하고 있었으니 보릿고개가 없어질 리 없었다.
거기에다 민족사상 최대의 비극인 6·25전쟁이 일어났고, 전후의 수복 또한 부진하여 보릿고개는 실로 1960년대 초까지 이어졌다.
5·16 군사정변을 통하여 1963년 제3공화국수립 후, 공업국으로 전환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단기적으로 미국 등에서 식량을 대량 수입하여 양곡부족을 해결하였다.
중·장기적으로는 통일벼 등 벼품종개량과 비료·농약의 공급확대 등으로 식량증산에 힘써 식량의 자급자족을 도모하여 농민의 소득증대와 생활환경 개선이 진전됨에 따라 보릿고개도 서서히 사라져갔다
-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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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967년 고이병철회장이 살립한 비료공장이 수확량을 4배로 폭증시켰고 여유가 생긴 농민들은 자식을 대학에 보냈고 그 대학생들은 군사정권.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