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문제는 접어두고 3번은 아마 기존 소금무역이 산서상인에서 휘주상인으로 주도권이 넘어가는 과정을 서술하라는 내용 같군요. 정말 내가 소금상인이면 이렇게 해야지, 하는건 역사 시험에 별로 안어울릴것 같고(....)
명청시대 중국은 소금 전매제의 행정을 위해 전국을 일반적인 성-주-부-현과 다른 11개의 '염구'로 나누었습니다. 이 염구는 생산지와 유통지역을 결합시킨 형태였죠. 사천의 정염에서 생산된 소금의 유통망과 동해안의 염전에서 생산된 소금은 각기 다른 유통경로를 지녔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넓은 소비지역을 할당받은 곳은 회남과 회북의 염장들이었는데, 이를 양회(兩淮) 염구라고 불렀죠. 이 양회염구의 중심지가 그 유명한 양주입니다.
이 염구의 소금 생산지에는 소금생산에 대대로 종사하는 '조호'라는 특수 호적을 두어 소금 생산을 전담시키고 '정염正鹽' 이란 소금 할당량을 채울 의무를 부과했습니다. 정염을 초과하는 생산량은 여염餘鹽이라 했는데 이것도 정부가 전량 수매하는 원칙이라 마음대로 판매할 순 없었죠. 소금 밀매상들이 취급하는 것이 이 여염에서 일부 빼돌린 소금인 겁니다.
이렇게 염장에서 생산된 소금은 유통상인인 염상들에게 판매권을 주고 염세를 부과하여 세입을 올렸는데, 명조 초기의 염세징수는 '개중법開中法'이란 염법이 적용되었습니다.
이 개중법은 호부에서 상인을 모집, 국경 부근의 변경 주둔 부대에 식량과 군수물자를 공급하게 합니다. 이렇게 할당량을 공급한 상인들에겐 일정한 액수의 소금을 취득하고 유통할 수 있는 권리를 명시한 '염인鹽引'을 발급했는데 이를 지정된 염구의 염운사사에 제출하면 정해진 수량의 소금을 발급해 주는 것이죠. 소금의 유통과정에서 상인은 항상 이 염인을 지참해야 했습니다.
변경지역에 군수물자를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한 개중법은 초기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곡물 수송비를 줄이기 위해 상인들이 변경지역에 자본과 인력을 집중하여 대규모로 토지를 개간하여 이 지역의 곡식을 군량으로 제공했던 것이죠.
당연히 지리적으로 변경지대인 산서성과 섬서성의 상인들이 큰 혜택을 보았고, 특히 산서 상인들은 막대한 자본을 축적해 근대까지 중국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2대 상인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개중법은 시간이 흐르며 많은 문제들을 노출했는데, 특히 중요한 건 '병목현상'입니다. 여러 염구에서 소금의 공급이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는 현상을 보였는데, 이는 수로망이 발달하여 유통비가 적게 들고 구매력이 높아 빨리 소금을 판매, 자금회전이 유리했던 양회, 양절, 장로 세 염구에 상인들이 특히 몰렸기 때문이었죠. 때문에 대기열이 길어지니 소금의 지급이 몇년이나 밀리는 경우도 발생했고, 이 경우 자금회전이 안되니 당연히 상인들에게 큰 손해로 작용했습니다. 반대로 인기가 없는 염구의 경우 상인이 몰리지 않아 소금 유통이 활성화되지 못했던 부작용이 생겼죠.
정부에서 이걸 해결하려고 몇번의 조치를 취했지만 큰 효과는 없었고, 대기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상인들의 군량 납부가 저조해지고, 특히 오이라트의 위협이 강해지며 군수물자의 수요도 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중국 경제는 15세기 후반부터 은이 화폐로서 작용하게 되었고, 점차 은의 수요가 민간 뿐 아니라 정부에도 늘었던 겁니다.
때문에 홍치 5년(1492년)부터 변경에 군량을 공급하는 자 뿐 아니라 각구의 염운사사에게 은을 지불하면 염인을 발행해주었던 겁니다. 이것은 안휘성에 근거한 휘주상인에겐 절호의 기회였고, 변경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상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각 염구의 중심도시, 가령 양주와 회안같은 곳으로 몰려들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휘주상인은 양회염장의 소금을 거의 독점적으로 취급하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물론 소금뿐 아니라 각종 유통과정에 전반적으로 참여했지만) 물론 이것으로 병목현상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소금 공급량을 늘리기 위해 조정에선 정염 1인당 여염 2인을 무조건 추가 매입하는 법령을 만들었고, 이 댓가로 은을 받았음은 물론입니다.
이후 변상(변경지에 군수물자를 납품하는 상인들)과 내상(염구에 거주하면서 소금을 전문으로 취급하던 상인)간의 분화가 심해졌고, 변상이 얻은 염인을 대자본을 축적한 내상들이 구매하게 되었죠.(결론은 이제 골치아프게 변경에서 농경지를 관리하지 않아도, 자본-은-만 많으면 장땡이 된 겁니다.)
물론 이후 청대에 이르기까지 염법은 부단하게 변했지만, 일단 위 문제에서 요구하는 중심은 바로 소금 유통법인 개중법의 은납화를 말하는 것이겠고(그 최고 수혜자가 휘주상인이란 점에서 당시의 휘주상인이면 유통경제에 참여, 은을 축적해 염운사사에 은을 내면 되는 겁니다), 그 이면엔 중국의 은본위 경제로의 변화가 핵심 중 핵심이겠죠. 대충 이 부분을 거론했으면 아마 좋은 점수를 받았을 것 같네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운사납은제를 쓰셨으면 뭐 다 아시는 내용이겠네요. 역시 엄살이신듯.
일목요연한 정리 감사합니다. 일조편법으로 세금을 은으로 납부하게금 정리하고 유통하는 과정에서 개중법의 변화에 대해 설명하셨는데 이후 휘주상인은 염인을 은으로 사들여 양주의 양회염장을 독점적으로 유통시키고 이 과정에서 당시 명대의 관리들도 소금 무역의 독점 현상에 눈을 감아주었는데 정계에 진출한 휘주상인 자손들과 같이 담합하는 관리들이 중심으로 움직여서,, 이 과정에서 양주의 소금을 통해 전국으로 유통시키고 다시 화북에서 면화와 안휘에서 차, 호광에서 쌀을 들여와 강남에 내다파는 식으로 유통시켜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그래서 휘주상인은 유상(儒商)이라 칭했는데 상인 스스로 유교경전을 공부해서 지방의 유력 사대부나 관리들과 친분을 쌓는 목적으로 인맥을 넓혀 장사를 하고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데 주력하였고 자연스럽게 휘주상인은 지역의 문화,교육 사업에 투자를 해서 지역에 대한 영향권도 일정부분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으로 상인계급은 지위적으로 향상되어 사대부층과 어깨를 나란히 겨눌정도로 신장하게 됩니다.
휘주상인들이 스스로를 유상이라 칭한건(그리고 유교 교육에 신경썼던건) 주자의 본향이 휘주였던 지역적 자부심도 포함되어 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