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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
<존재의 기반, 존재의 이유>
자녀를 위해 철저하게 헌신(獻身)하는 부모님들을 만납니다.
자신의 인생 안에 자신은 애당초 없습니다.
모든 안테나가 오로지 자녀에게로 맞춰져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에너지 전부를 자녀에게 쏟아 붓습니다.
‘도대체 인생 왜 저렇게 사나?’ 해도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녀 앞길 잘 풀리는 것만이 소원입니다.
자녀 인생만 잘 풀린다면 자신의 인생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자녀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도 문제 없습니다.
약간은 어리석어 보이고, 약간은 무모해 보이는 그분들의 삶에서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모님의 흔적을 발견합니다.
성모님,
그분 존재의 이유는 바로 아들 예수님이셨습니다.
성모님,
그분 존재의 기반 역시 아들 예수님이었습니다.
성모님의 운명은
예수님의 운명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자녀에게 목숨 바치는 부모님들,
자녀를 얼마나 끔찍이도 챙기는지, 자녀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는 어머니들이 계십니다.
어머니의 스케줄은 오직 자녀에게 달려 있습니다.
등교 시간이 오면 만사를 제쳐두고 운전 기사 노릇을 자처합니다.
학교 문 앞까지 태워줍니다.
끝나는 시간 맞춰 정문 앞에 차를 대령합니다.
곧바로 학원으로, 또 다시 집으로...자녀가 원하는 것은 뭐든 ‘척척’ 입니다.
이 세상에 하녀도 그런 하녀가 없습니다.
성모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성모님은 그야말로 ‘주님의 종’이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이나 고통도 달게 참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것이라면 그 어떤 노고도 힘들지 않으셨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성모님의 Fiat(순명)은 단 한 번으로 족하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상황에 따라 부단한 ‘예!’가 필요했습니다.
시시각각으로 성장해 가신 예수님에 따라 성모님 역시 성장해 가셔야 했습니다.
나자렛에서의 오랜 준비를 끝낸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위해 길 떠나실 때,
성모님 역시 또 다른 먼 신앙의 길을 떠나셔야 했습니다.
공생활을 무사히 마치신 예수님께서 지상생활을 마무리 짓고 아버지께로 향해 가실 때,
성모님 역시 또 다른 기약 없는 먼 길을 떠나셔야 했습니다.
한평생 요구되었던 지속적인 떠남의 삶,
수시로 요청되었던 지속적인 자기포기의 삶이
바로 성모님의 삶이었습니다.
단 한 번이 아니라 평생 계속되었던 Fiat(예!)의 삶,
끝도 없이 요구되었던 변화와 쇄신의 삶,
안주하지 않고, 고집하지 않았던 영원한 이방인의 삶이
바로 성모님의 삶이었습니다.
한 평생 아들 예수님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던 분이 성모님이셨습니다.
깨어날 때나 잠이 들 때나, 길을 갈 때나 집에 있을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
언제든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과의 일치 속에 계셨던 분이 성모님이셨습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제가 좋아하는 프로야구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막바지에 들어섰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응원하는 팀의 승패가 더욱 더 큰 관심사가 되었네요.
그런데 얼마 전의 일입니다.
비가 올 듯 말 듯 하다가 야구 경기가 시작되었지요.
일기 예보에서도 비가 온다고 했기에 빨리 경기를 진행해야 게임이 성립되는 5회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만약 5회가 되기 전에 비가 와서 경기를 할 수 없게 되면 이기고 있다 하더라도 무효 경기가 되거든요.
다행히 제가 응원하는 팀이 먼저 1회에 점수를 얻었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비가 오지 않기를 바랬지요.
또 혹시 모르니까 빨리 경기가 진행되길 원했습니다.
이제 경기가 성립되는 6회가 되면서 오히려 비가 오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응원하는 팀이 이기고 있었고,
6회 이상이 되어 비가 많이 와서 경기를 할 수 없게 되면
강우 콜드 게임이라고 하면서 그때까지의 점수로 승패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비 오길 원하지 않았다가 또 비가 쏟아지길 원했던 제 모습을 보면서,
조금 비겁하고 정당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이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인해
상대방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이기적인 모습이었던 것이지요.
사람들은 이 세상을 다른 이들을 이기고 짓눌러서 그 위에 올라가야 하는 치열한 경쟁 사회라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기도 역시도 남과 비교하는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어떤 형제님께서 신부님을 찾아가
“신부님, 제 여섯 형제가 잘 때, 저는 자지 않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라고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신부님께서는
“주님께 기도할 때, 형제들을 비방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아마 더 좋았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답니다.
다른 사람의 결점을 드러내고 확대하는 습관으로는
주님께서 맡겨주신 이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생각을 버리고
긍정적이 건설적인 생각을 간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가
나를 통해서 조금 더 완성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예수님의 잉태를 거부하지 않으셨던 성모님께서 태어나신 날입니다.
성모님을 떠올리며 묵상하게 됩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비겁하게 피하려 하지 않으시고,
정정당당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니다.
사실 왜 이러한 고통과 시련을 주시냐고 따질 만도 합니다.
잘 살고 있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똑같은 대우를 요구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비겁하게 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정공법을 선택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진정한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 역시 주님 앞에 비겁한 모습은 갖추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것은 물론,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생각으로 주님의 뜻을 방해해서도 안 됩니다.
그래야 우리 역시 성모님과 같은 영광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청 성소국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마리아, 당신 아드님의 딸”>
오늘 조금 어렵거나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러나 차근차근 잘 묵상해보시면 성모님의 참 모습을 더 깨닫게 되시리라 믿습니다.
요한 세례자는
그의 어머니 태중에서 마리아의 인사를 들었을 때 성령으로 가득 차 기뻐 뛰놀았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성령으로 가득 차니
태중의 아들도 성령으로 가득 차고
성령의 열매인 기쁨을 이미 태중에서부터 누렸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미 당신 어머니의 태중에서
당신의 선구자로 선택된 요한을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게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 세례자는 이미 태중에서부터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
하느님께 봉헌된 나지르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몸에서 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큰 사람은 없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태중에서는 예수님께서 요한을 영적으로 새로 나게 하셨지만
성장하셔서는 그 상황이 역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찾아가셔서
당신에게 세례를 베풀어 줄 것을 청합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줌으로써 그리스도로 다시 태어나게 하고
바로 그 때부터 요셉의 아들이 아닌 하느님의 아들로서 공생활이 시작됩니다.
이번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새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두 분이 서로 상대를 탄생시키는 모습은
우리 그리스도교 안에서 상상할 수 없는 중요성을 지닙니다.
먼저 삼위일체 안에서부터 이런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해서
모든 인간 관계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고,
이렇게 서로 새로 태어나게 하는 삶이 아니라면
아직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들어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성령 안에서 성자를 태어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성자가 없었다면 아버지도 있을 수 없고 성령님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서로서로가 존재하기 위해 상대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이 없어서 당신의 모든 것인 성령님을 보낼 대상이 없다면,
또 아들이 아버지께 받은 성령님을 다시 아버지께 돌려드리지 않는다면
아버지도, 아들도, 성령님도 존재하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신데
각자 혼자서는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당신의 모든 것인 성령님을 보내심으로써 아들을 새로 태어나게 하시는 것이고,
또 아들이 당신이 받은 성령님을 다시 아버지께 보내심으로써 아버지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움직임입니다.
즉, 사랑 자체가 상대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원인이요 목적인 것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 아니라면 하느님도, 세상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새로 태어나고 새로 탄생시키는 움직임이 없는 누구도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생기기 전부터 자녀를 사랑합니다.
물리적 시간이 아닌, ‘이성적인 시간 안에서’
아버지와 성령님은 성자께서 생기기 전부터 그 분을 사랑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성자를 통해서만이 아버지는 참 아버지가 되고
성령님은 참 사랑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한 두 사람은 그 사랑 안에 충분한 행복을 누리지만
그 사랑의 열매를 바라고 상대를 사랑하는 만큼
앞으로 생기게 될 자녀를 사랑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부와 성자께서도
성령 안에서 사랑하시며 새로 탄생될 열매를 이미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마치 하와가 아담에게서 나와 한 몸을 이루듯이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와 한 몸을 이루기 위해 태어나신 분이 계셨으니
바로 ‘마리아’입니다.
우리는 흔히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라고 알고 있지만,
그 이전에 성자께로부터 마리아가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에 교회 안에서 자주 마리아는 “당신 아드님의 딸”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창조 이전에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첫 열매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나게 하셨듯이
마리아도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창조된 것입니다.
마리아 또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룸으로써 교회를 탄생시키십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라 불립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열매로 탄생 이전부터 그분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교회는 마리아와 한 몸을 이룸으로써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됩니다.
마치 마리아께서 성자와 한 몸을 이루어 아버지와 일치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았고 이사악은 야곱을 나았으며...’ 라고 끝까지 가다가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라고 끝을 맺습니다.
이스라엘 족보에서 여자는 빠지는 것이 당연하고
그래서 ‘요셉이 예수를 낳았다.’가 되어야 하는데
느닷없이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가 나셨다.’고 여자가 족보에 들어가고
예수님께서 스스로 태어나신 것처럼 쓰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수동적으로 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여자를 통하여 세상에 오셨다는 의미와
성모님에게서 예수님이 탄생하시는데
요셉과의 부부 관계에서 탄생하신 것이 아님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쓴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성모님께서 하느님과 일치하여 나셨으며
성모님과 한 몸을 이루는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모든 교회의 신앙인들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며 성모님과 한 몸을 이루고
성모님과 한 몸을 이룸으로써 결국 성령 안에서 성자와 성부와 한 몸을 이룹니다.
그리스도는 인간과 하나 되기 위해 성자께서 마리아께로부터 육신을 취하신 분이십니다.
성자께서 성모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가 될 수 없으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성모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참 성자를 만날 수 없습니다.
오늘 성모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마리아께서 요아킴과 안나를 부모님으로 두고 있지만
그 분의 참 부모님은 하느님이십니다.
그 분만이 성자께로부터 직접 창조된 첫 번째 열매이고
그래서 그 뒤에 오는 아담과 하와의 원죄에 물들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성자께로부터 태어나셨지만
다시 그리스도를 탄생시키십니다.
마치 예수님과 요한이 서로를 탄생시키셨던 것처럼
성자와 마리아는 서로를 탄생시키신 것입니다.
부부가 혼인하여 살다보면 서로 변해갑니다.
한 사람만 변하는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서로를 새로 태어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안에서 이웃의 어머니가 되고 또 이웃의 자녀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관계가 중요하고 사랑으로만 새로 날 수 있는 것입니다.
<짧은 묵상 - 과달루페 성모님의 얼굴>
스페인이 지금의 멕시코 땅을 점령한 지 10년,
그러나 여전히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아간 스페인의 신을 섬기기를 거부합니다.
당시 아즈텍 문명을 비롯한 원주민 문명은
산 사람의 심장을 태양, 달, 뱀 신들에게 바치는 전통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군사력을 뒤에 엎고 들어온 교회도
너무나 뿌리 깊이 박혀있는 원주민들 신앙을 돌려놓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1931년 12월 9일, 성모님은 55세 된 후안 디에고라 불리는 한 원주민에게 발현하시어
그 발현 장소에 성당이 지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은 하느님의 어머니라 불리어지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발현에서 주신 메시지는
“네 어머니인 내가 너와 함께 있지 않느냐, 왜 두려워하느냐?”입니다.
이방 신의 어머니가 인디언에게 나타나 자신이 인디언들의 어머니라고 하셨다는 것은
스페인 사람과 인디언 모두에게 상상할 수 없는 충격이었습니다.
주교님은 디에고에게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며
다시 만나면 증거를 보여 달라고 청하라고 합니다.
디에고는 3일 뒤 다시 성모님을 만납니다.
성모님은 장미꽃이 핀 곳을 일러주며 꺾어서 주교에게 가져다주라고 합니다.
그는 장미를 자기 망토에 담아 넣고 주교에게 뛰어갑니다.
주교는 디에고가 망토를 펼치며 꽃을 떨어뜨릴 때 무릎을 꿇습니다.
왜냐하면 그 망토에는 성모님의 발현 모습이 그대로 그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로 원주민들은 자신들이 누군지도 모르고 섬겨오던 풍요의 신이기도 하고 어머니, 달의 신이
바로 백인들이 섬겨오던 성모 마리아임을 깨닫고 미신을 버리고 세례를 받습니다.
몇 년 사이에 800만 명이 세례를 받았고,
아메리카 대륙이 인류의 어머니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40년 지속되는 선인장 섬유에 그려진 것이지만
500년 가까이 지나도 색 하나 변하지 않고 선명하고,
염산을 뿌려도, 폭탄을 떨어뜨려도 전혀 해를 입지 않았으며,
노벨상을 탄 사람이 물감을 조사해도 이 지구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성모님 망토의 별들은 발현 당시 성모님 뒤에 있던 별자리가 그대로 새겨진 것이고,
성모님의 눈동자 안에는 후안 디에고와 그가 주교님을 만나는 장면이 그대로 새겨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런 수많은 초자연적 현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모님의 얼굴이 인디언, 혹은 인디언과 백인의 혼혈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미 당신을 모르고 있던 인디언들, 또 앞으로 태어날 수많은 혼혈들이
모두 당신의 자녀라는 의미입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 헌장 8장에는
성모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앞서신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라면
어떻게 모든 피조물의 어머니가 될 수 있으시겠습니까?
성모님은 세상 첫 번째 성자로부터 창조되었고
인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예비되었다가
바로 오늘 세상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모든 인류를 앞서시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로 되어있는 구원 계획도 태초로부터 존재하는 것처럼,
구원의 매개체인 육체를 그분에게 주실 어머니도 하느님의 계획과 함께 존재했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교회가 세례 받는 사람보다 당연히 먼저 앞서 있어야 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어머니요 교회의 어머니인 마리아도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와 교회를 앞섭니다.
마리아는 성자를 통해 태어난 첫 번째 피조물입니다.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세상에 왔다면
마리아는 하늘에 이르는 문입니다.
교회가 마리아와 일치하지 않으면,
하나일 수도, 거룩할 수도, 보편될 수도, 사도로부터 이어올 수도 없는 것처럼,
우리 개인도 성모님을 통해야만 참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성모님 안에 계시고,
성모님도 그리스도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예수님의 탄생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마리아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성자께서 깨끗한 육체를 취할 어떤 인간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 계획이 시작되던 날,
바로 성모님이 태어난 오늘입니다.
- 로마 유학중
*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의 묵상글 *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족보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역대 상 1장에서는 아담과 아브라함의 족보가, 2장에서는 유다의 족보가, 3장에서는 다윗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다.
룻기 4, 18- 22에서는 베레스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다.
마태오는 구약성서에서 영감을 받아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였다.
왜 마태오는 구약성서를 바탕으로 기술하였는가?
구약의 예언의 말씀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는가를 보여주고자 하였다.
아브라함에서부터 예수에 이르기까지의 족보는 상당히 중요하다.
그것은 하느님이 역사 안에서 구원의 손길을 펼치시겠다고 나서신 그 순간에서부터
구원의 역사 안에서 이루시는 모든 사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고,
예수 안에서 성취된다는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마태오가 구약 성서를 인용한 것이다.
즉 구약의 구원의 역사가 예수에 의해서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마태오 독자들은 유다인 신앙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사람들이다.
유다인 신앙이란 율법에 충실하고 야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구원의 긴 역사 안에서 선민 의식을 갖고 있고 그래서 구원은 자기들 안에서 완성될 것이라는 것을 믿었던 사람들이다.
그 구원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되었고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
과거의 역사를 나열시킨 것이다.
인류 역사는 야훼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생명의 근원이 하느님께 있다.
아브라함에게 모래알 보다 더 많은 후손을 약속하셨다.
신앙의 아버지에게 언약된 것이 다윗 왕 시대에 구체화 되었고 예수에 의해 성취되었다.
이 역사 이외에 인류 역사 안에 존재하는 다른 구원의 역사는 없다.
긍극적으로 전해주고자 하는 역사는
아브라함의 언약에서 시작하여 다윗에서 번창하고 예수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족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게네시스"라고 하고 그 뜻은 창조, 기원이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예수님에 의해 시작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라 붙인 것은 예수의 메시아 성에 대한 신앙고백을 이끌어 내고자 하는 것이 마태오의 의도이다.
사무 하 7, 8-16절에 나단 예언이 있다.
아브라함의 신앙의 역사를 완성하실 분은 바로 예수 메시아이시라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역사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개체적인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이 세상에 하느님이 보내신 메시아이시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1,1절에서 신앙고백이 이루어지고 있다.
2-16절까지는 예수님이 어떤 혈통 안에서 태어나셨는가를 밝히고 있다.
즉 예수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요,
하느님이 파견하신 메시아이시라는 것이다.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 역사의 종착지이고 이스라엘 역사를 완성시키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초기 그리스도인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고 본질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유다인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고 자기들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태오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유다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가 크리스챤 공동체에 들어오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긴 역사가 예수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고
이것을 끊임없이 고백해야 했었다.
예수야말로 메시아이시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기 위해서 족보를 제시해 주고 있다.
족보 전체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를 보는 것이다.
우상을 숭배하고 하느님께 불충했고 윤리적으로 문란한 것이 이스라엘 역사이다.
족보에 나오는 사람들이 다 거기에 있었다.
아담 이후에 우리가 살아 온 역사는
우상 숭배, 복수, 불충 등이 뒤범벅이 된 역사이다.
마태오 복음은 그러한 역사를 족보라는 형태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가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지상에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러한 모든 것을 짊어지고 인류의 역사 안에 함께 하시는 분으로서 우리에게 오신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가장 큰 사랑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렇게 투쟁의 역사, 불안의 역사를 살아 온 인류 공동체 일원으로서 우리에게 들어오신다.
그리스도는 별개의 세계에 사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 인간 조건 속에 그대로 들어오신다.
예수님의 역사가 구체적인 역사에서 실현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하느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표명되고 있다.
마태오는 창세기와 같이 예수의 기원을 묘사하려고 하였다.
예수의 탄생은 또 하나의 새 창조이기 때문이다.
창세기에 보면 하늘과 땅의 기원과 아담의 기원이 기록되어 있듯이
마태오도 예수의 기원을 전한다.
1장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기원과 신적인 기원을 제시해주고 있다.
즉 육적으로는 다윗의 아들이라는 것과
신적으로는 성령으로 태어나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다.(18- 25)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 속에 들어오시고
하느님의 역사 속에 인간이 들어간다.
마태오 복음서는 위대한 세 사람의 이름, 즉 아브라함, 다윗, 예수님의 이름으로 시작된다.
아브라함은 성소의 인간이며 약속과 신앙의 인간이자 믿는 이들의 조상이다.
다윗의 군대는 주님의 이름으로 성전을 치뤘고 예루살렘을 성도로 하는 찬란한 왕국을 건립했다.
예수님은 이 두 사람의 종합이다.
즉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히 불림을 받으신 분으로
온갖 약속의 실현자이시며 신앙의 세계를 가져오는 분이시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로 이루어진 하느님의 새 백성을 창건하신다.
다윗처럼 예수님은 하느님의 모든 영적 원수들을 쳐 이기시는 분이고,
새로운 예루살렘을 창립하시고 하느님의 영적 왕국을 세우시는 분이시다.
아브라함은 축복의 상징이고( 복을 빌어 주는 이름)
아브라함의 이름을 특기한 것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전 인류에 대한 축복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부여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갈라 3, 16)
마태오는 14세대가 3번이나 되풀이 되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메시아의 재림은 이스라엘의 몰락을 상관하지 않으며,
하느님의 나라는 준비 불충분 여하를 막론하고 이루어진다.
족보 안에는 바빌론의 유배에 관한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모든 희망의 단절과 온갖 활동의 패망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주 하느님과의 유대관계가 끊겼지만
주님께서는 언제나 또 다시 유대 관계를 이어 놓으신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충실하지 않을 때도 성실하셨다.
이 연속은
세대의 교체는 주님의 메시지가 이루어지기를,
하느님의 햇불이 그리스도 안에서 빛을 발하며 영원히 찬란하게 빛나기를 준비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바빌론 유배시의 가장 비참한 시기에도
예언자들은 새로운 예루살렘의 건립과 새로운 성전, 하느님의 새로운 왕국의 건립을 예언하였다.
희망은 사라지지 않았고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광휘가 빛을 잃고 위대함이 사라지는 바로 그때에 하느님의 말씀은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메시아이시고 희망이시며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시고
이스라엘의 꿈이요, 이스라엘의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무미건조한 이 족보는 강렬한 빛을 내면서 이제 최초의 기쁜 소식을 전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죄와 잘못에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라는 인성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신다는 것이다.
어떠한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하느님은 인간을 사용하시고 이용하시는 것이다.
어두운 과거가 하느님을 제어하지 못하고
인간의 무능력이 방해가 되지 않는다.
작은 것은 모두 위대한 것 안에 흡수되고
불순한 것이 모두 순결의 기초가 된다.
또한 천하고 인간적인 것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천상적인 것이 되며
주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분이요, 기름 바름을 받으신 그분을 통해 하느님께 속하게 된다.
이제는 모든 인류의 구원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완성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의 기원은
아브라함도 아니고 다윗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의 기원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고 완성되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시작이시고 마침이시며, 알파요 오메가이시기 때문이다.
비록 나의 구원의 역사가 항상 착하고 거룩하게 살아온 역사가 아니고
때로는 죄를 짓고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어둠의 세월을 보냈던 적도 있었겠지만
나를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구원의 역사는 멈추지 않으시고 한결 같으시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예수님께로 다시 돌아와 시작할 수 있고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러 오신 분이시고
바로 이런 나를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 구원의 역사는 나에 달린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해주러 오신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고,
내가 그리스도의 구원 열차에 동승할 때만이 구원을 완성시킬 수 있다.
오늘도 나를 구원하러 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이고
그분 안에서 나의 신앙 여정이 완성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면서 우리의 신앙 여정을 걸어가자.
- 전 성바오로수도회 관구장
<하느님 공동체의 신비>
깊이 들여다보면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전체의 한 부분이지 홀로 고립 단절된 부분은 없습니다.
오늘 동정 마리아 축일 역시 홀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공동체의 배경이신 하느님께서는
적절한 때, 적절한 역할을 주시어 동정 마리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알게 모르게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공동체에 속해 있습니다.
오늘은 공동체에 대해 두루 묵상했습니다.
예전에 40대 초반의 어느 신자 교수가 한 말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나의 투자 우선 순위는 내 아내입니다.
노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 지금부터 아내에게 정성껏 투자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당시는 웃고 말았는데 생각할수록 공감이 갑니다.
혼자는 못삽니다.
어느 형태로든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어야 하며
이런 공동체에 사랑의 투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늙지 않고 아프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공동체에 적금 든다.’라는 말이 떠나지 않습니다.
젊고 힘 있을 때, 또 할 수 있을 때까지
하느님의 공동체에 기도와 노동, 사랑으로 투신함으로써 공동체에, 하느님께 적금을 들어놔야
유사시 편안한 마음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렇게 가족 공동체를 위해 헌신적으로 사랑의 적금을 든 부모들에게
자식들은 결코 그 부모의 노후를 모른 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제는 강원도 동강(東江)으로 공동체가 가을 소풍을 앞당겨 다녀왔습니다.
차 안에서 제가 시종일관 유심히 바라본 것은 산 능선들이었습니다.
얼굴 부분이 예뻐서 미인이 아니라 얼굴의 선이, 몸의 선이 좋아야 미인이라는 말이 새로웠는데,
역시 산들의 선이 좋아야 좋은 산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예전에 써놓은 글입니다.
“늘 하늘에 닿아있는 고요한 산 능선들
내 영혼 늘 하느님께 닿아있는 산 능선이고 싶다.”
외국에 사는 많은 이들이 특히 그리워하는 것은
고국의 부드러운 산 능선들이라 합니다.
따로 떨어져 있는 듯이 보여도
작고 큰 산들이 모두 산맥으로 연결되어 있어 참 부드럽고 유장해 보입니다.
지구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듯이
모두가 산맥으로 연결되어 있지요.
홀로 떨어져 있는 복음의 예수님 족보가
하느님의 산맥을, 하느님 산 능선들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기기묘묘한 산들이 연속된 산맥이요
산 능선들처럼 예수님의 족보도 그러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이다.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 사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 사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 사대이다.’
14곱하기 3하면 42개의 사람 봉우리들도 이루어진
하느님의 장구한 산맥 공동체를 연상시킵니다.
산맥을 연상시키는 족보인가 하면
42개 묵주알 달린 묵주(사실은 없지만) 끈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산맥에서 홀로 떨어진 산이 보잘 것 없어 보이듯이,
묵주 끈에서 떨어져 나간 묵주알 역시 존재 이유의 상실로 아무 쓸모도 없어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공동체는 이런 것입니다.
전체 안에서 부분이지
전체의 공동체 맥락을 벗어난 부분으로서의 개인은 무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여 교회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은 바로 이 공동체의 배경이십니다.
하느님께는 성속도, 크고 작음도, 좋고 나쁨도 없고
또 쓸모없다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는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들이 소중합니다.
하느님의 오묘한 신비는 이들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미카 예언서가 이를 입증합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 것 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리고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
모두가 구원 섭리의 역사 안에 그 자리를 지니고 있으며
바로 이 제자리를 찾는 것이 구원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족보를 보셔요.
온갖 사람들이 다 들어있는 인간 박물관 같습니다.
인간의 도덕 기준으로 보아 결격 사유를 지닌 이들로 가득하며 의로운 이들은 결코 많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기준과 사람의 기준은 너무 다릅니다.
결코 못났다고, 죄인이라고 자책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의 관심사는 우리의 죄가 아니라 구원입니다.
하느님은 못남과 죄까지도 당신 구원 섭리의 도구로 쓰십니다.
구원 역사가 끊어질 위기에 봉착했을 때
하느님은 당신의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주저 없이 다말, 라합, 룻, 바쎄바를 통해 개입하십니다.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하였고,
라합은 소문난 창녀로서 살몬과 관계하였고,
룻은 보아즈를 유혹하여 결혼하였고,
바쎄바는 자기를 범하고 자기 남편을 전사케 한 다윗과 결혼하였습니다.
이렇게 네 여인은 제각기 기이한 인연으로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협력했습니다.
바로 이게 예수님의 족보이자 하느님의 족보요
우리 믿는 이들 역시 세례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이 족보에 편입되었습니다.
인간 눈에 죄인들이지
하느님의 눈에는 당신의 도구 역할에 충실했던 하느님의 거룩한 여인들이었습니다.
마침내 네 여인에 이은 다섯 째 동정 마리아는
하느님 불가사의의 극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동정 마리아의 배경이 된 의인 요셉은 주어진 조연 역할에 충실하였고,
마침내 구원 역사의 절정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탄생으로 예수님의 족보는 완성됩니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구원 섭리 역사의 맥락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충실한 여종 동정 마리아 덕분에
이사야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다.”
우리 모두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동정 마리아 탄생을 경축하며,
동정 마리아를 통해 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신 임마누엘 예수님을 구세주로 보내 주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도록 합시다.
아멘.
- 성베네딕토수도회 성요셉수도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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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성모님 탄일이라서 오늘미사때는 하늘색초가 양쪽에두개씩 켜졌어요. 구세기 부터 하느님의 계획대로 성모님을 우리의 어머니로 주셨다는게 넘 감사해서 눈물이 나려 했어요. 하늘엄마 사랑해요. 당신자녀들을 굽어보시고 살펴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