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인상
김윤애
사람과 사람이 만나 첫인상을 느끼고 결정하는 순간은 단 5초면 된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건 한 번의 만남에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는 가령 면접이나 남녀 간의 맞선을 보는 그런 경우에만 해당될 것이다. 보통의 인간관계는 첫 만남으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여러 사람들과 반복적인 만남을 통해 얻게 된 나의 경험이다. 같은 사람들을 반복적으로 만나다 보면 첫인상에서 받았던 느낌이 더 나빠지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까칠하고 깐깐한 느낌을 주었던 첫인상이 만날수록 부드러워지고 진솔함이 묻어나는 그런 사람이 있기도 하다.
사람을 만나는 건 단순한 일이 아니고 또한 그 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한다는 일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중의 한 구절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 조금씩 두려워진다. 만남은 경이로운 일이기도 하지만 때론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할 때도 있다
어느 봄날 젊은 남녀가 다정하게 한의원으로 들어왔다. 남자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허리가 아파 진료를 받으러 왔고 여자는 외국인으로 호기심에 따라온 것 같았다. 그 여자의 언어는 흔히 들어본 프랑스어도 러시아어도 아닌 강한 톤의 남미 계통의 언어로 들렸다. 키가 그리 크지 않고 가무잡잡한 피부와 밝은 갈색 머리의 명랑하고 밝은 성격의 첫인상으로 기억되는 아가씨였다. 대화를 나누는 남자에게 어느 나라말이냐고 물었더니 ‘포르투갈어’라고 했다. 유창하게 대화하는 남자가 부럽기까지 했다. 잠시 후 남자는 물리치료를 시작했고 그녀는 같이 따라 들어오고 싶어 했지만 다른 환자가 계셔서 곤란하다고 대기실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그녀는 큰소리로 불만을 토로했다. 언뜻 듣기에도 화가 난 듯했다. 문을 쾅 닫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진료실로 들어와서 큰소리로 뭐라고 얘기했다. 나는 짧은 영어 실력으로 나가서 기다리라고 했지만 알아듣지 못하는 포르투갈어로 계속 소리를 질러댔고 남자는 안쪽에서 어떤 말로 진정시키는 듯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두 사람의 언성이 점점 높아지자 남자는 치료를 받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며 미안해하면서 나왔다. 치료실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서 여자 친구가 몹시 화가 났다는 것이었다.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고 서둘러 데리고 나갔다. 한순간 폭풍이 지나간 듯했다. 한참 동안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다 보니 들어오시는 환자분이 복도로 나가보라고 했다. 커피가 계단과 벽에 온통 갈색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녀가 화를 참지 못하고 일회용 커피 잔을 바닥에 내팽개친 모양이었다. 순간 섬뜩했다. 활달하고 밝아 보였던 그녀의 첫인상은 여지없이 구겨져 휴지통에 처박혔다. 몇 년이나 지났지만 아직까지 기억이 생생하다. 문화의 차이인지 언어 소통의 문제인지 지금도 이해 못 할 그녀의 행동이었지만 지구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겠거니 마음을 다 잡았다. 누군가를 존중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지 말아야 할 에티켓은 어느 나라에도 있을법한데 남이 못하게 한다고 해서 투정을 부리는 것은 유아기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세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제어할 줄 아는 극기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도덕성은 키워주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H씨는 7년째 일주일에 2회씩 빠짐없이 침치료를 받으러 오셨던 환자였다. 중풍으로 오른쪽 팔과 다리에 마비가 와서 비와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을 빼고는 빠짐없이 치료를 받으러 오셨다. 한결같은 미소로 이제는 젓가락질도 잘 할 수 있다며 오늘은 그릇을 놓치지 않고 설거지도 잘했다며 그때그때 좋아진 부분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시고 자랑하곤 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계단을 올라오기도 힘들 텐데도 우편함에 있는 우편물도 가져다주고 가끔씩 손에 간식까지 사들고 힘겹게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매년 크리스마스 땐 잊지 않고 케이크를 꼭 챙겨주시는 고마운 분이셨다. 그럴 때마다 더욱 치료를 잘해드려야겠다는 책임감을 느끼곤 했었다. 7년 동안 우리를 깨닫게 하고 사명감을 길러준 H씨를 못 뵌 지가 오래인데 요즘은 잘 계시는지 안부가 궁금하다.
이렇듯 좋은 첫인상이 끝까지 가는 분도 있고 처음에 무뚝뚝하게 대답도 잘하지 않던 분이 점점 재밌고 친근감이 가는 분으로 바뀔 때도 있다. 결혼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아버님이 도련님을 장가보내려고 선 자리를 만들었고 공교롭게도 내가 주선한 선 자리와 겹쳤다. 아버님이 마련한 선 자리에 다녀온 도련님이 아가씨의 첫인상이 썩 끌리지 않는다고 고민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첫인상이 별로면 다시 안 만나도 된다고 조언을 하다가 시아버님께 된통 혼난 적이 있었다. 한번 보고 어떻게 아냐면서 내게 호통을 치신 것이었다. 도련님의 결혼 문제로 신경이 쓰이던 차에 내가 불을 지핀 꼴이었다. 시집와서 처음들은 꾸지람이어서 서러움으로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었지만 생각해보면 그 말씀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세월이 한참 지나 아버님 나이가 될 즈음에야 알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즈음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어권 지역인 주데텐란트를 침략하겠다고 호기를 부렸다. 그때 영국 수상이었던 네빌 체임벌린이 세계대전만큼은 막고 싶어서 히틀러와 협상을 제안했다. 그때 히틀러와 벌인 협상이 연합국 측의 커다란 실수 중 하나로 여겨지는데, 히틀러는 주데텐란트만을 원하고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공표했다. 하지만 그 후 히틀러는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결과는 참담했다. 히틀러가 체임벌린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대화를 하자 그를 믿었던 것이었고 그의 첫인상에 속은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한 번의 만남으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 수가 없지만 단지 우리가 다 파악하고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라고 어떤 작가는 말한다. 누구에게나 믿음을 주고 신뢰받을 수 있는 한결같은 사람이 되자. 내가 살아가면서 지향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이다. 첫인상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최소한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불편함을 주지 않고 자신의 삶을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교과서적인 답을 낼 수밖에 없다. 첫인상은 억지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쌓아온 내면과 맑은 영혼, 성격 모든 것이 어우러져 얼굴에 나타나는 것이다. 아울러 진실을 가려낼 수 있는 자신의 지혜와 안목을 높여야 한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잘 살아갈 수 있는 건전한 사회의 밑그림이 되지 않을까? 문득 나를 돌아보면 잘 살고 있는 건지 나 자신에게 속고 있지는 않는지 조금은 의심이 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