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시의 독립운동 유적
7월 28일부터 8월3일 고구려 백두산 답사 일정의 핵심은 고구려 유적지를 답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답사지역에서 만나게 되는 독립운동의 역사도 우리가 알아두고, 기억한다면 좀 더 의미있는 답사가 될 듯합니다.
그래서 지난번 환인현에 이어, 집안시 일대의 독립운동 관련 유적지를 소개하는 글을 적어봅니다.
집안시는 고구려의 수도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상대적으로 20세기 초 애국지사들이 독립운동을 했던 고장임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집안지역은 압록강을 건너 고국 땅이 가깝기 때문에, 나라를 잃은 독립지사들이 쉽게 정착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2004년 고구려 답사를 하다가 방송관계자와 함께 내성 성벽 북벽 부근의 아파트에서 조선족 사람들과 만나서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파트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족이 사는 집들에는 집집마다 김치광이 하나씩 있었던 것이 대단히 기억에 납니다. 옛 집안시박물관 앞에는 조선족 중학교가 있어서, 그곳 교장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또 태왕릉 뒤쪽 조선족 소학교(지금은 없음)에서 학생들을 만난 적도 있었습니다. 20년 전만해도 8천명 가까운 조선족이 집안시에 살았는데, 지금은 많이 줄어든 것으로 압니다.
집안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기지는 화전자(花甸子) 마을로, 환인호에서 집안시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합니다. 이곳에는 참의부 본부가 있었습니다. 참의부는 1925년 조직을 새로 정비하고, 참의장에 윤세용을 추대하고 새로운 조직을 구축합니다. 윤세용은 대종교 3대 도사교인 윤세복의 형으로, 1912년 동창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에 힘썼고, 1919년 대한독립단 활동 등을 했고, 1922년 대한통의부, 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원으로 임명(부임은 하지 않음)되기도 했던 분입니다. 환인현의 독립운동 기지인 이붕전자와 집안시 화전자는 매우 가깝습니다. 환인, 집안지역이 모두 참의부가 활동했던 공간인 셈입니다.
그런데 1925년 참의부는 고마령 전투에서 29명의 전사자를 내는 큰 피해를 입습니다. 그러자 윤세용은 1926년 참의부 의장으로 참의부를 체제 안정을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그는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1년에 서거합니다. 화전자는 현재도 조선족 마을 1곳이 있으며, 아직도 조선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화전자보다 약간 북쪽인 집안시 재원진(財源鎭) 패왕조촌(覇王朝村)은 1920년 초 대한독립단(1919년 4월 유하현 삼원보에서 조직된 의병중심의 복벽주의 계열이 다수를 차지한 무장독립운동 단체) 본부가 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집안시지만, 환인현 저수지 상류에 해당되는 곳입니다. 패왕자에는 고구려의 옛 성인 패왕조 산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근에는 고려구(高麗溝)라는 지명도 있습니다. 패왕조촌에는 과거 조선족 학교가 있었으나, 1967년 환인호가 건설되면서 수위가 올라온 탓에, 사람들이 이사하여 지금은 조선족이 거의 살지 않고 있습니다. 한때 이곳은 쌀이 유명했다고 합니다.
집안시 서쪽에 위치한 유수림자 앞의 압록강은 강 건너 위원군 고산면 남산동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곳을 마시탄 지역이라고 부르는데, 압록강이 크게 굽이쳐 흐르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1924년 5월 19일 참의부 2중대 1소대 장창헌의 지휘 하에, 참위 한응권 등 8명의 부원들이 압록강을 순시 중이던 일본의 사이토(齋藤實) 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집중 사격을 가했던 곳입니다. 왜총독 사이또 저격 사건은 당시 상해에도 널리 알려질 정도로 많은 신문에 보도된 큰 사건이었습니다. 참의부 부원들은 장총과 모젤 권총으로 약 40~50발을 발사했고, 일본군은 기총과 모젤권총으로 약 72발을 응사할만큼 총격전이 꽤 크게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사이또를 태운 일본 순시선이 전속력으로 사정권 밖으로 탈출한 탓에 소기의 성과를 올리지는 못했습니다. 사이토 총독 저격의거는 흔히 1919년 9월 2일 노인동맹 소속 강우규 열사의 서울역 폭탄투척 사건만이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마시탄 의거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건입니다. 이 습격사건은 『독립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고, 독립군의 의기를 떨친 사건입니다.
하지만 마시탄 의거 이후, 일본은 만주 독립군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1925년 3월 중순 참의부 소속 5개 중대가 마시탄과 가까운 고마령(古馬嶺)에서 국내 침투 공작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군사회의를 개최했습니다. 그런데 밀정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평안도 초산군 경찰서는 미즈노 경부가 인솔하는 경찰대 65명과 초산 주둔 수비대 120명를 보내 참의부를 기습하게 했습니다. 순사부장 고피득, 밀정 이죽파를 앞세운 이들은 참의부 통신기관장을 체포해 고문하여 회의 장소를 탐지한 후, 회의중이던 참의부대원들을 습격해, 참의장 최석순을 비롯해 42명이 전사하고 3명이 붙잡히는 참의부 전투사상 최대의 타격을 입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1925년 6월 11일 봉천군벌의 수장인 장쭤린과 일본이 맺은 미쓰야 협정으로 인해 만주의 독립군은 독립군 활동에 크게 타격을 받습니다. 고마령전투와 미쓰야 협정(三矢協定) 여파로 만주의 독립군은 3부 통합 운동을 하게 됩니다.
마시탄의 정확한 위치는 아니어도, 환인에서 집안으로 가는 도중에 만나게 되는 압록강 일대에서 마시탄 지역을 지나치게 됩니다. 집안시를 방문할 때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의 발자취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 아래 지도는에서 보는 것처럼 환인, 집안 일대는 연변지역과 더불어 독립군의 근거지였습니다.
아래 사진은 마시탄 부근 압록강 일대를 2017년에 찍은 사진입니다.



첫댓글 아~ 이런 곳은 꼭 가봐야 하는 곳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