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능욕을 축복으로 (삼하16:5-14절)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범죄 한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저주를 받는 형벌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하여 비참한 모습으로 왕궁을 떠나 피난을 가던 중 감람산으로 내려가는 길에 베냐민 지파의 땅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에 베냐민 지파 중의 한 사람인 시므이가 나와서 다윗과 왕의 모든 신복을 향하여 돌을 던지며 소리를 지르며 다윗을 저주하는 장면입니다.
*삼하16:7-8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 자이므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 하는지라.
그 때 다윗의 조카이며 신복인 아비새가 분노하여 시므이를 칼로 베려고 하였습니다.
*삼하16:9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 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이때 다윗이 아비새와 그의 신복들에게 한 말이 오늘 전하는 본문의 주요 내용입니다.
시므이의 이유 없는 능욕과 저주를 받으면서도 다윗은 일체 대응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지금 대단히 심기가 불편합니다. 다윗은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행하고 저와 함께 가는 백성들도 다 머리를 가리우고 울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견딜 수 없는 모욕을 당한 것입니다. 다윗보다 좀 못한 사람이었다면 시므이의 머리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다윗의 이 모습은 우리에게 진한 감동과 함께 교훈을 줍니다.
1. 다윗의 태도에는 원한의 흔적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을 먹느냐 하는 것보다 무엇이 나를 먹느냐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먹기 위해 살아갑니다. 모든 자연계는 먹이 사슬로 형성되어 있어 서로 잡아먹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모든 동물은 눈앞에 있는 자기의 먹이를 먹으려고 온갖 신경을 총동원하여 집중하지만 등 뒤에서 나를 잡아먹으려고 노리고 있는 것은 전혀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먼저 잡혀먹히고 마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먹느냐 하는 것보다 이 시간 나를 먹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를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시므이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없었습니다.
*출23:1 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그러기에 시므이는 허망한 풍성과 무함하는 악한 것에게 먹히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다윗에게는 다윗을 먹어치우는 분노나 원망은 없었습니다.
♠ 미국의 흑인 지도자 마틴 킹 목사는 말하기를 “나에게는 다른 사람을 미워할 시간이 없다.”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잘못한 자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신 것도 바로 원망이나 미움이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히12: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여기에 모든 사람이라는 것은 미운 사람이나 분노하는 사람이나 원수까지도 포함됩니다. 이 모든 사람으로 화평하며 거룩하게 지내라고 하십니다. 이제 다윗에게 돌아가서 시므이의 저주 내용을 살펴봅시다.
“피를 흘린 자여”
이것은 다윗이 사울 왕가의 피를 흘리게 하고 왕권을 빼앗았다고 하는 거짓 고소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이려 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칠 년 반이나 추격한 사실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주지의 사실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에게 손을 대지 아니했습니다. 낮잠을 청하려 동굴에 들어온 사울의 옷자락을 벤 것도 마음에 찔려서 가슴 아파했던 다윗입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산을 둘러 진을 치고 야경할 때에 다윗이 신복을 데리고 진에 내려가 사울의 잠자는 곳에 이르러 물병만 가지고 나와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던 다윗입니다. 나중에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을 때 누구보다 가슴 아파했던 사람은 다윗이었습니다.
*삼하1:11-12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으로 인하여 저녁때까지 슬퍼하며 울며 금식하니라.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된 후에는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 그에게 사울의 토지와 재산과 노비를 다 주고 왕자의 하나같이 예루살렘 성에 거하며 왕의 밥상에서 먹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시므이가 저주하는 사울 집을 파괴하고 피를 흘리게 하였다는 것은 허위요 비난이었습니다. 거짓과 허위와 비난은 참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저를 저주하도록 그냥 두라고 합니다. 측근들이 분을 참지 못하여 저를 단칼에 쳐 죽이려고 하는 상황에서 다윗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였습니다. 죽은 개 같은 것이 내 주 왕을 저주한다고 측근들이 다윗을 격동시켰어도 그는 냉정을 잃지 아니했습니다. 미친개를 몽둥이로 위협하면 개가 도리어 사람을 무는 법입니다. 다윗의 태도가 옳았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라”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산상 보훈에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라고 하신 말씀은 도덕적 교훈만은 아닙니다. 모든 일을 주권의 하나님께 맡기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갚아주어야 할 원수이면 하나님이 대신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2. 다윗의 태도에는 자신이 능욕 받아야 마땅한 자임을 인정하였습니다.
이 말은 시므이의 저주가 아니더라도 자신은 다른 사람의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 인생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믿었던 의사 보리스 니콜라야비치콘벨트는 예수를 믿었다는 죄목으로 시베리아 강제 노동소에 끌려갔습니다. 그가 그곳에서 환자들을 돌보아 주는데 어느 날 어떤 젊은이를 치료하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정치범으로 소련의 공산주의를 저주하고 원망하였습니다. 그때 콘벨트가 말하기를 “나는 우리가 이 땅 위에서 당하는 고통 중에 부당한 형벌이나 고통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우리가 꼭 어떤 범죄행위를 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 하나 깊이 파고 들어가면 오늘 내가 당하는 이 고통, 이 억울함에 합당한 나의 죄과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다시 이 청년이 치료를 받기 위해 콘벨트를 찾았을 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콘벨트는 죽었지만 그의 고백은 이 청년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콘벨트의 최후의 고백을 들었던 이 청년은 그 뒤에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원망이나 불평보다는 자신 속에서 그 무엇을 찾으면서 신앙의 삶을 살다가 형기를 무사히 마치고 그곳에서 풀려나와 온 세상에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 청년이 저 유명한 작가 알렉산드로 솔제니친이었습니다.
때로 우리에게도 다윗을 향한 시므이의 저주와 같은 고통이 닥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 저주의 뜻과 깊이를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 저주가 합당하기보다는 큰 고통으로, 괴로움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저주와 비난을 깊이 생각해 보면 괴로움만이 아닌 다른 그 무엇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즉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반드시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과가 없는 시련은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어느 여류시인은 그의 기도 일기 중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사랑도 많이 받았지만 미움도 더러 받았습니다. 이해도 많이 받았지만 오해도 그 못지않게 받았습니다. 기쁜 일도 있었지만 슬픈 일도 더러 있었습니다. 결국 지나고 보니 모든 일이 다 중요하고 필요했습니다. 선뜻 이렇게 고백하기가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요” 우리에게는 알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고, 필요 없고, 유익하지도 않는 허송세월 같은 인생의 삶이 있습니다. 거기에다 오해와 갈등의 시간도 있습니다. 저주와 능욕의 힘든 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바라보고 나를 맡겨 드려야 합니다. 맡길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가난에 처하든지, 궁핍에 처하든지 항상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3. 다윗은 현재 처한 어두움보다 축복의 밝은 면을 보고 있습니다.
시므이는 왕위를 잃고 쫒기는 몸이 된 다윗을 향해 돌을 던지며 비루한 자라고 저주를 하였습니다. 저주하다 (히) 카랄은 욕지껄이를 하다. 악담하다의 뜻입니다. 즉 악심을 품고 근거 없는 이야기를 억지로 죄와 연결하여 악담을 퍼부으며 행위로 괴롭힌다는 뜻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땅은 저주를 받았지만 노아 홍수 후에 여호와께서 노아의 번제를 흠향하시고 언약하시기를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는다.” 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 고 하였습니다.(출21:17) 오늘 시므이의 행위는 천 번 죽어 마땅한 죄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사람의 저주를 본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밝은 선을 보았습니다.
*삼하16:12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환난이 축복이 될 것을 믿었습니다. 능욕의 무거운 짐이 나를 눌릴 때 겸손하게 한 계단 내려가면 은혜가 됩니다. 낮추실 때는 낮아지는 것이 순리입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십니다. 뱃사공은 썰물이 될 때에 밀물을 봅니다. 밤을 지키는 파수꾼은 밤이 깊어질수록 다가오는 새 아침을 느낍니다. 깊은 겨울의 한 가운데서 모든 것이 얼어붙어 죽은 것 같지마는 그 얼음의 밑에 봄기운이 감돌고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바다의 조개의 껍질이 거칠수록 그 속에는 찬란한 진주가 있으며 한여름 소나기가 맹렬할수록 하늘에는 아름다운 무지개가 수 놓입니다. 다윗은 상대할 가치가 없는 비루하고 천박한 시므이를 본 것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 영광의 주님께서 자신의 원통함을 감찰하고 계신다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감찰하신다. (히) 라아는 주목하여 보시고 관찰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즉 어떤 일을 상세히 관찰하시고 분석하시고 대책까지 세우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시33:13-15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살피시는도다. 그가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살피시는 이로다.
나아가 다윗은 자신이 저주하는 시므이를 직접 징계하지 않더라도 자신과 시므이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보응을 믿었습니다.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갚아 주신다. (히) 슈브는 되돌린다. 회복시킨다. 의 뜻입니다. 다윗은 비록 저주를 받고 있지만 이 저주 때문에 자신을 예전의 평화의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평하게 사람의 일을 따라 보응하십니다.
*욥34:11-12 사람의 행위를 따라 갚하사 각각 그 행위대로 받게 하시나니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이 능욕을 참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한 결과는 어떠했습니다. 여기에는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숨겨져 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을 평정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바후림에 있던 베냐민 사람 시므이가 베냐민 사람 천 명을 대동하고 요단강을 건너와서 왕을 영접하며 자신의 죄를 이실직고합니다. 그때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다시 말하기를 ‘시므이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그로 말미암아 죽어야 마땅하다.’고 간언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무사귀환의 의미를 깨닫고 시므이에게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고 맹세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당시 베냐민 지파 안에서 시므이의 위세가 대단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일천 명의 사람을 대동했다는 것만 보아도 지파 내의 그의 신분의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다윗이 피난을 갈 때에 아비새의 말을 듣고 시므이를 단칼에 죽였더라면 다윗은 베냐민 지파의 적이 되었을 것이며 온 이스라엘이 격동하여 다윗을 쳤을 것이므로 압살롬의 승리가 확실했을 것입니다. 이는 다윗 왕국의 패망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실패자가 되고 왕국은 처참하게 사라졌을 것이며 다윗 왕국의 뒤를 이어 나타날 메시야 왕국도 실현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구속사는 이 땅에 실현되지 못하고 종말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겸손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이러한 계략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난을 평정하고 다시 이스라엘의 왕으로 복귀하였습니다. 그의 많은 허물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왕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을 후계자로 세워 이스라엘의 왕위를 튼튼하게 하였습니다. 그의 후손으로 왕위가 계속 이어가도록 언약도 세워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그의 후손으로 메시야가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도 더 영광스러운 것은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다듬어져 갔다는 것입니다. 만약 다윗이 사람이나 자기의 신복들을 의지하고 살았다면 이런 삶이 있었겠습니까. 그의 그 많은 시 한편이라도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구속사에 길이, 길이 남는 사람은 돈이나 명예가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나의 잘못으로 생기는 병보다 다른 사람으로 인해 생기는 병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에 대해 오래 참을 수 있는 사람, 하나님 앞에 오래 기다리는 사람이 구속사에 길이 남는 사람입니다. 톨스토이는 말하기를 ‘사람이 자기 자신을 극복했을 때 비로소 남을 비난하지 않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인생의 가장 위험한 상황에 처하였을 때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저주를 받았지만 그는 사람을 보지 않고 오로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능욕을 참음으로 말미암아 그 능욕을 축복을 바꾸었습니다. 실로 절대절명의 한순간에 현명하고 지혜로운 판단을 함으로써 구속사에 길이 남을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때로는 신복의 충성도 사탄의 도구가 되는 일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의 앞날을 가로막고 충언아닌 충언을 하다가 예수께 책망을 받은 것처럼 사람의 판단은 그것이 저주이든지 충성이든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어떤 형편에 놓이든지 간에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고 의지함으로 모든 환난이나 저주나 능욕을 축복으로 바꾸는 지혜로운 신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