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등대
강희근
통영은 연필 등대로 일기를 쓰고 있다
통영이 걱정하는 것은 당동과 미수동이 달랑
충무교 하나로 애초 혈육이 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외지에서 통영 보러 오는 사람들
운하라 하며
곡예하듯 충무교 건너다니고
해저터널이라 하며
바다 밑 터널에 들어가 경이의 눈빛
가슴 쓰다듬어 내린다
통영은 바다에 끄슬린 햇볕으로
때로는 살빛 거칠지만
손 흔들면 손 아래로 들어오는 터미널이나 강구안
이켠 산이나 저켠 언덕이 사촌처럼 따습고
그 아래 그 곁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
집들이 시집갈 날 받아놓은 처녀처럼
댕기머리 수주웁다
제 살 제 생김새 어디로 가겠는가
일기장은 대개 이러하지만
미수동에서 건너다보이는 세월의 어금니, 그 사이로
충렬사와 착량묘 돌계단이 흐르고
그 배경으로 생활의 근육처럼 산복도로가 흐른다
통영은 미수동 연필 등대로 일기를 쓰고 있다
등대의 눈 밖에 있는 것들
주도와 가마섬, 곤리도 사량도로 뻗어가는 뱃길
일기에는 톳내음 파래내음 미역내음… 후각을 찌르고
후각은 접속어처럼 단락을 바꾸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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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필 등대 : 통영에는 문향이라는 의미로 연필 모양의 등대를 몇 개 세웠는데 여기서는 미수동에 서 있는 등대를 말한다.
청마와 춘수
청마와 춘수는 많이 다르다
한 사람이 바다라면
한 사람은 뭍이다
청마가 살았던 집
그 집은 약봉지 냄새가 났다
춘수가 살았던 집
그 집은 꽃잎 버는 냄새가 났다
청마는 시를 쓸 때 약 달이듯이 쓰고
춘수는 시를 쓸 때 꽃구경 가듯이 쓴다
그래서
청마의 시에는 생명이 쿨룩거리는 소리
나고
춘수의 시에는 꽃에다 이름 붙이는 소리
난다
아, 청마가 결혼식을 올릴 때
올리며 인생을 시작할 때
유치원생 춘수가 화동花童이 되어 꽃을 바친 것
통영에 가면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아는 사람은 말할 때 시인이 된다
꽃다발이 된다
— 시집 『새벽 통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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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 1943년 경남 산청 출생.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시집 『연기 및 일기』『풍경보』『사랑제』『기침이 난다』『바다, 한 시간쯤』『깊어가는 것은』『물안개 언덕』『새벽 통영』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