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12월8일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태3,1-12)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말씀의 초대 이사야는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고 예언한다. 이사이는 다윗의 아버지다. 이 가문에 주님의 영이 머물고, 정의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몸에 신의의 띠를 두른 이, 무뢰배를 내리치고,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는 이가 나올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제2독서). 세례자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언한다. 그는 이사야가 ‘오실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말한 사람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기억하고 회복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주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아 태어났다면,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의 것이기에 그 자체로 거룩하고 숭고합니다. 그 누구도 무시당하거나 소외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을 빈부귀천, 남존여비 등의 이분법적이고 불평등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정면으로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사람입니다. 생명이 있는 곳에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넘쳐흐르고, 언제나 희망의 샘이 솟아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생명을 떠나 죽음으로 치달리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시어, 사람을 살려 내시려고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분께서 파견하신 아드님을 위하여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 자청하였으며, 이스라엘이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실 아드님은 생명이신 분이시고, 우리를 결코 죽음 속에 내버려 두지 않으실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생명을 살리는 일에 적극 동참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권 주일을 보내는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
회개는 뉘우쳐 고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뉘우치는 행위에만 매달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뉘우쳐도 흡족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완벽한 뉘우침은 없습니다. 어떻게 마음에 쏙 드는 뉘우침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것 역시 욕심일 수 있습니다. 누구라도 고치려는 마음을 지니면 살아 있는 회개가 됩니다. 그러니 회개는 결코 침울한 행동이 아닙니다. 새롭게 출발하려는 다짐을 어떻게 어둡다고 하겠습니까? 생동감 있는 마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대림 시기의 회개는 밝은 행동입니다. 한 해의 끝에 서서 지난 한 해를 돌아보는 긍정적인 자세입니다. 축복에는 감사를 드리고, 부족함에는 자비를 구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으면 새로운 출발은 불가능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시작하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뉘우침과 새 출발이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예수님께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누구나 가까이 갈 수 있는 모습입니다. 아무라도 다가갈 수 있는 친근한 모습입니다. 우리 역시 사람들이 좋아하는 새로운 모습으로 출발해야 합니다. 누구나 편안함을 느끼는 생활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삶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의 본질입니다.
-회개해야 주님을 맞을 수 있습니다"
-박용식 신부-
오늘 복음에서 요한 세례자는 구세주를 맞이하려면 회개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도둑질을 하고 살인을 하고 남에게 큰 상처를 주는 사람들은 회개해야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지당한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큰 죄를 짓지 않은 우리들은 어떻게 회개해야 합니까? 디모테오ㆍ데보라씨 부부는 매일 등산을 합니다. 나이 60도 안 돼 일찍 퇴직을 하고 특별히 할 일이 없어 매일 산에 오른다는 것입니다. 산에 오르면서 묵주기도도 하고 건강관리도 하고 부부간에 사랑도 돈독히 해 남들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부부는 대림시기를 맞아 무언가 회개할 것을 찾고 싶었습니다. 지금 어떤 죄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등산만 하는 것은 왠지 떳떳치 못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틀에 한 번씩만 등산을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하느님 일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평일미사에 참례하고 성당 청소 등 봉사도 하고 냉담교우나 어려운 이웃을 방문했습니다. 또 성경과 교회서적을 읽고 평화방송을 시청하면서 하느님 일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베드로씨는 텔레비전을 많이 봅니다. 뉴스는 물론이고 드라마, 건강 프로그램, 오락 프로그램 등 거의 매일 3~4시간 이상 텔레비전 앞에 있습니다. 텔레비전을 보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것은 아니지만 대림절에는 죄 아닌 죄가 될 수도 있다는 가책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대림절만이라도 텔레비전을 덜 보기로 결심하고 대림 첫날부터 실천하고 있습니다. 저도 있습니다. 대림절 강론을 준비하면서 신자들에게는 회개를 하라고, 무언가 나아지려는 행동을 하라고 권하면서 신부인 나는 무슨 회개를 할까 찾다가 회개할 거리 하나를 찾아냈습니다. 신자들로부터 무언가를 받았을 때 우선 말로라도 감사를 하자, 택배나 인편으로 받았을 때는 빼놓지 말고 확인 전화를 걸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동안 신자들에게 무엇인가를 받고서도 받았다는 표시를 안 한 적이 너무 많았습니다. 제가 지난달에 「예수님 따라하기」라는 책을 냈습니다. 평화방송에서 특강했던 것 일부를 책으로 쓴 것인데, 그동안 저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사람들에게 선물로 한두 권씩을 택배나 인편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제 선물을 받고도 아무런 말이 없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주소가 틀리거나 해서 배달이 안 됐을까 걱정이 돼서 확인 전화를 기다린 겁니다. 저는 그래도 특별히 생각한 사람들에게만 책을 보냈는데 받고도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조금은 섭섭한 마음이 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내 자신은 전에 어땠는지 돌이켜봤습니다. 그동안 무엇인가를 받고도 확인전화도, 감사하다는 말도 하지 않았던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대림절부터는 누군가에게서 무엇을 받으면 반드시 잘 받았다고 감사의 뜻을 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이번 대림절에 이토록 사소한 것을 회개거리로 정했답니다. 회개라는 것이 살인강도나 도둑질 같은 큰 죄만을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잘못까지도 뉘우쳐 돌아오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지금 죄스런 삶이 아니더라도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어떤 행동을 하는 것도 회개의 하나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개가 바로 이런 회개였죠. 사실 사도 바오로는 율법에 대한 열성도 대단했고 거의 흠없이 살았기에 죄와는 거리가 먼 삶이었습니다. 본인도 자신의 삶을 자랑할 만한 것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주님과 특별한 만남 이후 그런 자랑스러운 삶을 모두 포기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왔던 일상의 삶이 죄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하느님 나라 건설이나 하느님의 생명을 살아가는 데는 적절한 삶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를 모시는 데 방해가 됐음을 깨닫습니다. 그 좋아 보이던 권력과 재물 등이 오히려 쓰레기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삶을 완전히 포기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개는 죄에서 돌아오는 회개가 아니라 더 나은 삶으로 돌아오는 회개였던 것입니다.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인 오늘 복음말씀에서 요한 세례자는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우리는 혹시 죄를 짓지 않았어도 더 나은 삶으로 돌아오는 진정한 회개를 합시다. 그래야만 다가오는 성탄 대축일에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맡겨진 사람들 위해 사는게 회개
-손용환신부
요한의 리더십
리더는 이끄는 사람이고, 대중은 따르는 사람입니다. 리더는 어렵고 힘든 일을 스스로 짊어지는 사람이고, 대중은 쉽고 편한 길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리더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를 따랐고, 어렵고 힘든 길을 스스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어떤 리더였을까요?
첫째, 요한은 희생의 삶을 산 리더였습니다. “요한은 낙타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마태오3,4)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광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동물의 가죽을 옷으로 입었고, 광야의 거친 음식으로 식사를 대신했습니다. 그는 오직 하느님만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둘째, 요한은 카리스마가 넘치는 리더였습니다.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마태오3,7∼8. 10) 그 당시에 도덕적인 리더는 누구입니까? 종교지도자인 바리사이들입니다. 그 당시에 경제적인 리더는 누구입니까? 정치 지도자인 사두가이들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말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가르칩니다. 그는 인기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자기 소명에만 열정을 보였습니다.
셋째, 요한은 겸손한 리더였습니다. 요한은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태오3,11) 그의 소명은 주님의 길을 곧게 닦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스스로 낮추어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는 점점 작아져야 하고, 그분은 점점 커져야 한다며 물러설 줄 알았습니다. 그는 오직 뒤에 오시는 분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은 리더로서 행복했을까요? 광야의 거친 삶이 좋았을까요? 사람들에게 달콤한 말이 아닌 독설로 설교하는 것이 좋았을까요? 자기를 낮추고 예수님을 들어 올리는 게 좋았을까요? 세속적으로 보면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다릅니다.
저도 가끔씩 리더로서 행복했을까를 생각해봅니다. 돌이켜보면 다른 것은 몰라도 저는 참 많은 일을 하고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일만 하면서 사는 게 좋았을까요? 사람들에게 행복한 모습이 아닌 힘들고 지친 모습을 보이는 게 좋았을까요? 내가 아니라 교회를 위해 참아내는 것이 좋았을까요? 저의 입장에서 보면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다르겠지요.
그래서 리더는 고독합니다. 그러나 리더는 고독한 만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크든 작든 모두가 리더입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리더입니까? 요한은 예수님이란 열매를 맺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우리라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열매로 맺어야 합니다. 요한이 말했습니다.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오3,12)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를 받아들이면 알곡이 되고,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를 버리면 쭉정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알곡은 남고, 쭉정이는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우리가 어떤 리더인지 돌이켜볼 때입니다. 우리가 리더로서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 살펴볼 때입니다. 우리는 요한의 리더십을 배워야 할 때입니다. 희생과 소명과 겸손으로 산 요한의 리더십을 익혀야 할 때입니다. 이것이 회개이고, 이것이 하늘 나라의 초대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선포했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오3,2) 자기보다도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생각하며 사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늘 나라가 가까이 있습니다
주님어서오소서
-최승정신부-
대림둘째주일을맞이하여교회공동체는첫째독서로이사야예언서11장의말씀을읽습니다. 여기서예언자는자신이환시하는메시아왕국에대해노래하는데, 그왕국의묘사에앞서예언자는우선그가누구인가를1-2절에서밝히고있습니다.
메시아는우선이사이의그루터기에서돋아나는햇순, 즉이스라엘의가장위대한왕인다윗임금의혈통입니다. 그것은메시아의적통성에대한언급입니다.
2절에서는그메시아에게“주님(야훼)의영”이머무른다고말하면서, 그영의속성에대해언급합니다. 그속성은모두6가지인데, 지혜(sapientia), 슬기(intellectus), 경륜(consilium), 용맹(fortitudo), 지식(scientia) 그리고경외(timor)입니다. 여기에효경(pietas)이더해지면성령칠은이됩니다.
3절에서는2절의마지막인“경외”에대해반복하여언급하면서, 메시아는하느님을경외하기에자기의눈에보이거나귀에들리는대로, 즉자신의편의대로심판하지않을것이라말합니다. 그리고그3절이무슨의미인지를4-5절은부연하여설명합니다. 그것은장차메시아가강한자들과타협하는지도자가아니라, 힘없고약한사람들의편에서서“무뢰배를내리치고”악인을처벌하는정의로운심판자가될것이라는설명입니다.
6절부터등장하는대목은진정경이로운묘사입니다.메시아를통해이루어지는정의와함께“늑대가새끼사자와더불어살쪄가고어린아이가그들을몰고”다닐것이며, “암소와곰이나란히풀을뜯고그새끼들이함께”지내는…그런정의로움이그메시아를통해이루어질것이라고예언자는선언합니다. 그것은메시아를통해이루어지는정의가단지정치적이고사회적인의미를뛰어넘어우주적인차원으로확장됨을의미하며, 하느님의정의로움이단지인간과인간의관계를넘어, 인간과세상의관계에서도역시실현될것이라는의미이기도합니다.
9절에서그경이로운정의로움의출발점은바로“주님을앎”이라고예언자는밝힙니다. 여기서이사야11장이전하는메시아의본질적정체가드러납니다. 메시아는바로“하느님은과연누구인가?”라고묻는세상한가운데에서하느님의공의로움을선포하는존재입니다. 그리고그렇게선포된정의로운하느님나라에서(이스라엘뿐아니라) 모든겨레와온우주가평화를누릴것이라는일종의영광송과함께오늘의독서는마무리됩니다.
오늘의독서를거꾸로읽으며요약해본다면, 우리는다음과같은신학적명제를만나게됩니다. “진정한평화는정의로움에기초하며, 참다운정의는공의로운하느님에대한앎에서출발하고, 하느님을알게되는것은주님의영을통해서이다.”이사야의예언은이루어졌고, 메시아는사람이되시어우리와함께계셨습니다. 그리고성령과함께그리스도의복음을선포하며교회공동체는2000년이넘는시간을세상안에서살아왔습니다. 하지만세상은여전히평화롭지도또정의롭지도않은것같습니다. 2010년대한민국의서점에서가장많이팔린인문서의제목이“정의란무엇인가”라는사실은우리가어떤세상을살아가고있는지를대변합니다.
그것이오늘대림2주를맞으며우리온교회공동체가우리와함께계셨던메시아를그리워하고, 그리스도의재림을고대하는까닭이겠습니다. 마라나타(주님어서오소서)!__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안소근 수녀-
시작 기도 오소서, 성령님. 가까이 오시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도록 저희의 마음과 삶을 새롭게 하소서.
독서 신촌에 살던 쌍둥이 언니가, 갈현동 친정집에 간다는 제 말에 신촌에서 갈현동까지 바래다주었습니다. 그래서 집에까지 같이 들어갔다가 혼자 신촌으로 돌아가는 언니를 제가 또 버스 종점까지 두 정거장을 바래다주었습니다. 이런 저희를 보고 누군가는“너희들 연애하니??”?라고 말했습니다. 연애를 하면 그렇게들 하는 모양이지요?? 길을 함께 나서는 것, 혼자 나에게 다가오도록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같이 가려고 내 편에서 움직이는 것 말입니다. 마태오복음 앞부분은 그런 모습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연애’?로 보여줍니다. 1???2장에서는 먼저 하느님이 다가오십니다. 예수님의 족보와 예수님 탄생에 대한 기록은, 대를 이은 한 집안의 역사를 통해 인간의 삶 안으로 들어오시는, 우리의 골목길을 걸어오시어 우리 집 앞까지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서두에서부터, 우리에게 오시는 그 주님의 이름이‘임마누엘’?곧‘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고 알려줍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3장에서는 다른 방향의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오시는 주님을 맞으러 자신이 앉아 있던 곳에서 일어나 길을 나서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예부터 언제나 유혹의 장소인 동시에 하느님을 향한 선택과 결단의 장소인 광야에 나가 주님의 길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은, 인간에게 가까이 오시는 주님을 맞아 그분을 향해 조금이라도 다가가려는 인간의 대표적 응답입니다. 아니, 요한은 예수님께서 바로 가까이 와 계심을 자신의 눈으로 보았기에 맞으러 달려 나갔다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구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비하는 것이라면, 태중에서부터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심을 알아보고 기뻐 뛰놀았던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마침표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신에게 와서 세례를 받으려 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을 다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주더냐??”?(7절) 바리사이와 사두가이, 그들은 다가올 진노를 피하려 하지만 하느님을 향해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오직 자신의 안전이었고, 그것을 위해 요한의 세례에 피신하려 합니다. 마치 세례를 받고 교회에 적을 두고 최소한의 의무를 지키는 것으로 양심의 편안함을 보장받으려는 것과 같은 태도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의 거짓된 태도를 알아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님께서 오시면 그들이 과연 회개를 했는지, 곧 진정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돌아온 것인지를 드러내시리라고 말합니다. 적어도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엄격한 요구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용서의 복음과 대조시키는 것은 옳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누구나 요한에게 찾아와 세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요한한테서는 아직 알곡과 쭉정이가 구분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요한보다 훨씬 강한 분이신 예수님께서 오시어‘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때는 그들의 감추어진 본래 모습이 드러나게 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심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별로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강조하다 보니, 그것이 옳은 것이라 하더라도, 복음의 한 부분을 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한테“손에 키를 드시고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시는”?(12절) 모습을 덮어버리고 보지 않으려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입맛에 맞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편한 신앙생활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세례자 요한에게 와서 물로 세례는 받고 진노는 피하려 하면서도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는 사두가이나 바리사이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성찰 신앙은 장신구가 아닙니다. 율법과 규율, 행동과 실천이 신앙의 전부인 양 생각하는 것도 옳지 않지만, 신앙에는 분명 그에 수반되는 요구가 있습니다. 그것이 전부도 아니고 출발점도 아닙니다. 출발점은 다른 곳에, 인간을 향해 먼저 길을 떠나 다가오시는 하느님의‘연애’?에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느님 사랑을 받아들였다면 응답이 없을 수 없습니다. 외형적인 세례나 명목상의 신자 생활이 아닌, 삶의 증거가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길을 떠날 것을, 새로운 삶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합니다.
기도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 당신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 주소서.?(시편51,?12.?14)
양과 말을 키우는 농장 주인에게 아들 3명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세 아들을 불러놓고 유언을 하시는데, 먼저 한 명씩 자신의 소원을 말해보라는 것입니다. 첫째 아들이 양을 기르고 싶다고 말합니다. 둘째 아들은 말을 기르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는 소원대로 첫째 아들에게는 자신의 양을, 그리고 둘째 아들에게는 자신의 말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 막내아들이 아버지에게 소원을 말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막내아들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무슨 소원을 말할까? 자신은 양도 가지고 싶고, 말도 가지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아버지 양과 말 다 갖고 싶어요.”라고 말했지요.
그러자 아버지께서는 곧바로 자신이 신고 있던 양말을 벗어주었다고 합니다.
‘양’과 ‘말’을 합쳐서 말해 보세요. ‘양말’ 맞지요? 말도 안 되는 썰렁한 이야기이지만, 우리들의 욕심을 한 번 생각해보자는 의도로 적어 보았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함께 살아가기보다는 남들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자기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갈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앞선 이야기처럼 형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빼앗아야 성공하는 것처럼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범죄 현장을 직접 보고서도 모른 채 하면서 지나간답니다. 혹시라도 자신에게 피해가 갈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혼자만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곳이기에, 하느님께서는 ‘나’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너’와 ‘우리’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자기만 살아가려는 욕심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이 하느님의 뜻을 잘 아는 사람은 이웃들과 함께 최선을 다해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끊임없는 욕심 속에서 점점 어려운 삶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긴 바둑에서 하수들은 만방으로 이기려고 욕심만 부리지만, 고수는 반집만 이기면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지요. 이처럼 하느님의 뜻을 잘 아는 고수는 절대로 세속적인 욕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들은 유다 광야에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는 세례자 요한을 만나게 됩니다. 그가 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칠까요? 구원을 얻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 즉 세속에 쏠렸던 마음을 돌려 하느님께로 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혼자만 알고 있다가 혼자만 구원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까지도 꾸짖으면서 회개하라고 선포합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세례자 요한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역시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의 죽음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늘 나라는 함께 들어가야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소리를 듣기만 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 각자 각자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때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 제2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 대림의 시기에 나만 누릴 축복만을 생각하는 욕심은 말끔히 씻어 버리고, 대신 남을 먼저 생각하고 그들과 함께 주님께 나아가는 은총의 시간을 만들어 나갔으면 합니다. 이제는 함께 해야 할 때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더 많이 감탄하세요. 가슴을 열고 보면 어디 감탄할 거리가 한두 가지입니까.(정채봉)
대림 시기와 회개
-이중섭 신부-
대림 시기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육화사건을 기념하면서, 동시에 세상 종말 때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이런 이중적 특성 때문에 교회는 이 시기를‘간절하고 감미로운 희망의 시기’라 부릅니다. 대림 제2주일 성경 말씀은 구세주의 오심에 앞서 우리 자신의‘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회개(메타노이아)의 삶은‘마음의 변화’, 즉 자신이 범한 과오와 죄를 깊이 성찰하고 선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삶에는 기대와 설렘이 있습니다. ‘신망애’ 삼덕은 하느님을 향한 세 가지 덕입니다. 그 가운데 희망의 덕(망덕)은 주님을 기다리고, 주님의 약속 실현을 기대하고, 주님을 뵙게 될 희망에 설레는 마음입니다. 교회는 특별히 대림 시기에 주님을 희망하고 기다리는 자세를 강조합니다. 대림 시기는6세기부터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때로 시작되었으나, 나중에 그 의미가 확대되어 세상 끝날에 영광스럽게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의미도 포함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대림 시기에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범으로 이사야 예언자와 세례자 요한 그리고 성모님을 제시합니다. 그래서 대림 시기 독서에서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가장 많이 읽습니다. 주님의 성탄이 가까워지면 세례자 요한이 복음에 등장합니다. 그는 주님의 오심을 선포했으며 “그분의 길을 닦고 고르게 하라.”는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특히 회개를 강조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들으며 회개의 의미를 되새겨야 합니다. 회개는 하느님 앞에서 나 자신의 본모습을 인식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이 변화하기를 바라기 전에 내가 먼저 변화하는 것입니다.
힘을 빼고 독을 빼라!
-김찬선신부-
저의 책임 중의 하나가 선교 위원장이기에 선교사 형제들을 방문하는 것이 제가 해야 할 일 중의 하나입니다. 방문을 하게 되면 여러 가지 어려움에 대해서 얘기를 듣게 되는데 공통적으로 듣는 얘기가 “여기서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는 얘기입니다. 뇌물을 주면 안 되는 것이 없고 반대로 뇌물을 주지 않으면 무슨 법이 그렇게 까다롭고 절차가 복잡한지 보통 사람들은 지레 포기하던지 방법을 몰라 못하게 된답니다. 이것이 권력의 힘과 돈의 힘이 유착하게 되는 관계입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권력의 힘을 빌려 돈을 모으고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 권력을 움직여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습니다.
후진 사회일수록 이런 퇴폐가 심하긴 하지만 그렇게 흉보는 우리도 그런 면이 있기는 마찬가집니다. 지금 우리 사회도 권력이든 금력이든 힘 있는 사람은 법을 어기면서까지 크게 해먹고 법에 걸려도 쉽게 빠져나오지만 힘없는 사람은 작은 것 하나 걸려도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그러니 누구나 힘을 가지고 싶고 힘을 행사하고 싶어 합니다.
이런 비판적인 강론을 하고 있는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제가 힘 있는 사람을 비판하지만 어떤 때 힘 있는 사람의 힘을 빌리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대부분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인데,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 돈 있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힘 있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저의 아이러니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저와 같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힘이 없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힘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이 하느님 나라에서는 힘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힘이 있던 사람도 여기서는 힘을 다 빼야 합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 이사야서11장의 말씀처럼 마치 늑대와 표범이 이빨과 발톱을 빼고 새끼 양과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며 살모사가 독을 빼고 어린이와 어울리듯 힘을 다 빼야 합니다. 어린이들이 모인 곳에 어깨에 힘을 주고 들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로마서 말씀처럼 사랑으로 서로를 받아들이는 곳에 힘을 행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힘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이 다스리는 하느님 나라를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제1성으로 하신 말씀과 똑 같은 말을 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렇다면 하늘나라를 위한 회개는 어떤 회개입니까? 하늘나라에 합당한 존재적 회개요, 관계적 회개입니다. 그저 못마땅한 자신을 고치고 못된 습관을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관계적인 존재로 살아가고 사랑의 관계로 살아가는 그런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蛇飮水 成毒 牛飮水 成乳란 말씀이 있습니다. 뱀은 물을 먹어 독을 만들고 소는 물을 먹어 젖을 만든다는 뜻입니다. 같은 물을 먹는데도 어떤 존재냐에 따라 남을 죽이는 독이 나오고 남을 살리는 젖이 나옵니다. 그러니 존재적으로 바뀌는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오늘 세례자 요한이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들을 나무라듯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힘을 빼고 독을 빼 관계를 잘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이것이 힘이 아니라 사랑으로 오시는 주님을 잘 준비하고 맞이하는 대림절의 실천이 될 것입니다.
참된 회개
-조명연 신부-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힘껏 외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분명한 사실이며 진리입니다. 즉,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에 회개하고 주님께로 향하는 것은 자명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문득 이러한 상상을 해봅니다. 만약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가는 사람이 이 말을 외치고 있다면 어떤 반응들을 보일까요? ‘그래, 회개해야지’ 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죄를 뉘우칠까요? 아니지요. 아마 사람들은 ‘자기부터 회개할 것이지. 죄 지은 사람이 뭘 잘했다고 그런 말을 해?’라면서 콧방귀만 뀔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는 많은 이가 동의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말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본인 스스로 광야에 나가 속죄의 마음을 갖고 고행했기에 그 말에 힘이 있었던 것이지요. 말은 아무리 분명한 진리라 할지라도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악으로 변할 소지가 분명히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말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를 지내고 있는 우리들은 이제 구태의연하게 살아온 삶의 태도를 바꾸어서 좀 더 적극적인 자세가 되었으면 합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 나라 향한 평화의 길 닦아야
-배광하 신부 -
세례자 요한의 설교 모든 길이 고르게 되는 날
우리는 꿈이 있습니다
흑인 인종 차별에 대해 끝까지 반대하며 투신하였던 미국의 ‘마틴 루터 킹(1929~1968)’ 목사는 1963년 8월 23일 미국 노예 해방 100주년을 기념하여 워싱턴에서 열린 평화 대행진 중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명 연설을 합니다. 그것은 마치 오늘 제 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의 장차 도래될 하느님 나라의 평화로움을 보는 듯 하며, 복음의 세례자 요한의 외침과 같은 느낌을 갖게 하여 줍니다.
킹 목사의 연설에는 다음과 같은 평화의 꿈을 담은 내용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서 과거에 노예로 살았던 부모의 후손과 그 노예의 주인이 낳은 후손이 식탁에 함께 둘러앉아 형제애를 나누는 날이 언젠가 오리라는 꿈입니다. 흑인 소년, 소녀가 백인 소년, 소녀와 서로 손잡고 형제자매처럼 함께 걸어 다닐 수 있는 상황으로 언젠가 탈바꿈되리라는 꿈입니다.
지금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모든 계곡이 높이 솟아오르고, 모든 언덕과 산이 낮아지고, 울퉁불퉁한 땅이 평지로 변하고, 꼬부라진 길이 곧은길로 바뀌고,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 모든 생물이 그 광경을 함께 지켜보리라는 꿈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희망입니다.”
꿈이라면, 진정 꿈이라면 이것이 꿈이요, 희망인 것입니다. 보다 넓은 마음을 가지고 모두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 편협된 인식의 틀을 깨뜨리고 사랑을 만들어 가는 것, 이기심과 배타적인 삶을 살지 않고 평화를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이 모든 인류가 지향해야 할 꿈과 희망이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증오와 미움, 전쟁의 살육과 인간 존엄의 차별이 없어지는 세상, 진정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이 오도록 모든 인류가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믿는 이들이 이 평화의 행진에 앞장서야 하며, 그 길을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옛날 이사야 예언자는 장차 다가올 메시아의 평화로운 시대를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이사 11, 6~8).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메시아이신 예수님 탄생 2000년, 지난 20세기 동안 모든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살인, 증오와 배척의 끔찍한 삶을 살았고, 인종 차별, 종교 차별 등, 인간 존엄을 해치는 악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뜨거운 회개로의 외침은, 그 모든 악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만연되어 있는 모든 이기적인 삶에서, 평화를 깨뜨리는 거짓의 길에서, 자기 자신만을 위한 욕망의 길에서 돌아와 주님의 길을 닦으라는 촉구인 것입니다. 신앙을 가졌다고 자부하면서도 실천적 신앙의 삶과는 멀어진 우리 모두에게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태 3, 7~8).
이 같은 호된 욕을 먹었던 이들은 분명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가증스러운 위선의 탈을 쓰고 있었던 그들에게 참 신앙의 길로의 회개를 촉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책은 세례자 요한 때 보다 조금도 나을 것 없는 오늘날 모든 신앙인들에게 하는 회개의 질책이요, 경고인 것입니다.
대림 제 2주일을 맞은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시 한 번 평화에 투신할 것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것, 모든 차별이 없어지고 진정한 평등의 삶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고 낮추는 것, 미움과 증오와 살인을 멈추게 하는 것, 주님의 참다운 정의가 이 땅에 실현되도록 자신을 희생할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길이요, 그것이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준비의 삶이며, 그것이 주님의 길을 고르게 닦는 대림의 신앙인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 성 바오로는 오늘 우리에게 이같이 가르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로마 15, 7).
이것이 진정한 회개인 것입니다. 내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소극적인 회개를 넘어, 진정한 평화를 일구지 못하고 이기적인 만족에 살았던 삶을 바꾸는 적극적인 회개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회개의 열매
-이기양 신부 -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태 3,2. 8).
오실 메시아를 준비하고 있는 세례자 요한은 몰려드는 군중들에게 회개하라는 독설을 퍼부으며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칩니다. 그런데 오늘 세례자 요한이 외치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과연 무엇일까요?
일본의 해군 장교 가와가미 기이치는 전쟁이 끝난 후 고국으로 돌아와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차마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를 더 괴롭히는 것은 어디를 가나 군인만 보면 “저것들 때문에 우리나라가 망했다"면서 노려보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이었습니다. 기이치는 매일 분노와 좌절감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급기야 계속되는 고통 때문에 심한 병을 얻게 되었고, 온몸이 마비되어 식물인간처럼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많은 치료 후 정신과 의사인 후치다씨의 진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기이치 선생, 낫고 싶으세요?" "예, 낫고 싶지요." "그럼 제가 시키는 대로 할 수 있겠어요?" "예,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럼, 저를 따라해 보세요. '감사합니다!'"
매일 분노와 적개심으로 가득했던 기이치 장교는 갑자기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려니 입이 움직이질 않았습니다.
"오늘부터 '감사합니다'란 말을 하루에 1만 번씩 하셔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만이 당신의 마비된 몸을 치료해줄 수 있습니다."
의사가 돌아간 후 기이치는 병석에 누운 채로 "감사합니다"를 매일 되뇌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병을 고치기 위해 억지로 내뱉다시피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감사합니다"는 말이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자 시간이 지나면서 분노와 적개심은 사라지기 시작했고 마음의 평화가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막내아들이 홍시 두 개를 따서 아버지의 방문을 열었습니다. "아버지, 감 드세요!" 기이치는 자기도 모르게 "감사합니다"하면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아, 이럴 수가!'
꼼짝할 수 없었던 손이 놀랍게도 움직였던 것입니다. 손에서 일어난 기적은 그 이후 팔, 다리 등 몸 구석구석까지 이어졌고 굳어 있던 몸의 이완은 마치 감사의 주문에 의해 마법이 풀리듯 온몸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만들어낸 기적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미움과 불평은 본인은 물론 주변까지 지옥으로 만들며, 마음의 병은 육체의 병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은 스스로 지옥을 만들던 마음의 병을 치유할 뿐 아니라 냉랭하고 단절됐던 이웃과 관계를 따뜻한 관계로 회복시켜 줍니다.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외친 것은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기보다는, 내 욕심에 못 미치는 삶이 주는 편치 못한 마음으로 살아왔다면 감사의 삶을 살기를 결심하고 실천하는 것이 회개의 열매입니다.
작은 실천은 큰 기적을 일으킵니다. 매일 10번씩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형제와 동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며 살아봅시다.
대림시기의 노력을 통하여 놀라운 회개의 열매들을 거두는 성탄을 맞게 될 것입니다..............
광야에 나타난 세례자 요한
-허 성 신부 -
“회개 위한 매는 하느님의 은총”
회개란 무엇인가? 세례자 요한은 군중들에게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외치면서 요르단강에서 회개의 표시로 세례를 주었고 그들에게 회개했다는 것을 행실로 보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회개란 무엇일까요? 회개란 하느님을 등지고 이탈했던 사람이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다시 하느님께로 방향을 돌려서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와 용서를 빌고 안기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표현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는 먼저 당신 모상대로 만들어야 되겠다고 구상을 하시고 진흙으로 정성 들여 빚으신 다음 당신의 숨결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 넣으시어 살리셨습니다.
그리고는 에덴동산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꾸며 주시고 만물의 영장으로 삼아 주셨건만 하느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생활을 하기는 고사하고 뱀의 꼬임에 빠져서 금단의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하느님을 두려워 피하게 되었고 고통과 죽음을 당하는 불행을 자초하게 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구원은 회개를 전재로 이루어져 철부지 어린애들이 집에서 부모님 안계실 때에 일을 저지르기는 쉽지마는 저지른 일을 수습하려면 부모님이 오셔야만 가능하듯이 우리도 하느님의 뜻을 거스려서 하느님을 떠나가기는 쉽지만 회개하여 다시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를 당신께로 불러 구원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우리의 회개를 전제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교만과 욕심과 쾌락속에 빠져 사는 이들에게 주님의 음성은 잘들리지를 않고 따라서 회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회개도 크나큰 은총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극한 상황에 빠져서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체험한 후에야 비로소정신을 차리고 하느님을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회개시키시기 위해서 우리가 깡그리 부서져서 비참함을 체험할 때까지 내버려 두실 때도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이 상속받은 재산을 가지고 아버지와 집을 떠나 멀리 가서 방탕한 생활로 거지꼴이 되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그가 그렇게 되지 않았더라면 아버지를 찾아 가서 용서를 빌지 않았을 것입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여인이 스스로 찾아 온 것은 아니지만 남의 손에라도 강제로 끌려 예수님을 만나게 됨으로써 용서를 받고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크나큰 은총입니다.
남편을 다섯번이나 바꿔가면서 살아야 했던 기구한 운명을 지닌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새 사람이 된 것도 은총입니다.
자기에게 상황이 불리해 지니까 예수님을 세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던 베드로가 주님께서 『너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번이나 배반할 것』이라는 말씀을 깨닫고 밖에 나가 통절히 울게 되었던 것도 큰 은총입니다.
큰 잘못을 저지르고 십자가형을 받아 예수님 오른편에서 사형을 당한 죄수는 자기의 과오를 깨닫고 예수님께 자신을 의탁하였기에 예수님은 그를 낙원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그와는 대조적으로 같은 날 같은 십자가형을 받고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처형된 왼쪽 죄수는 오른쪽에서 처형된 죄수와 똑같은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를 하지 않았기에 그는 예수님께로부터 낙원으로 초대도 받지 못한채 비참하게 일생을 끝마쳤습니다.
하느님께서 내리신 사랑의 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정된 생활을 누릴 때에는 하느님을 외면하고 엉뚱한 짓들을 하다가도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되면 제 정신이 들어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돌아오곤 하였음을 구약성서를 통해서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평소에는 엉뚱한데에 심취하여 하느님을 멀리 하고 살다가 뜻하지 않은 시련을 당하고서야 제 정신이 들어 하느님께서 나를 사람이 되라고 사랑의 매를 때리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회개를 위한 매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기간, 대림절
-서공석 신부-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출현과 그분의 설교 및 예수님에 대한 그분의 예고 등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 운동에 일시 가담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태오복음서(11,7-14)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예수님은 요한을 극찬하셨습니다. 요한은 ‘예언자보다도 훌륭한 사람’, ‘여자 몸에서 태어난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인물’,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 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초기 교회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으신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요한이 예수님보다 더 훌륭하다고 사람들이 오해할 위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세례 받은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그것을 기록합니다. 동시에 그들은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라.”(40,3)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파견된 요한이라고 해석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이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요한과 예수님의 차이를 분명하게 하고 싶은 초기 교회 공동체의 뜻이 담긴 말입니다.
오늘 복음이 요한의 입을 빌려 ‘그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라고 선언하게 하는 것도 그런 의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요한은 종도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요한은 그 시대 팔레스티나의 세례운동가들 중 한 분입니다. 그 시대에는 다양한 세례운동들이 있었습니다. 물에 몸을 잠그거나 씻으면서 죄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삶을 지향하는 신심운동입니다. 요한의 세례운동은 그 시대 유다교 기득권층의 가르침과는 달랐습니다. 율사들은 오로지 율법준수만이 올바른 신앙생활이라 고집하였습니다. 성전의 제관들은 오로지 성전 의례의 준수만이 올바른 신앙생활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비롯한 그 시대 세례운동가들은 그들을 비판하면서 세례운동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요한이 그들을 비난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라는 말로 시작하여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는 말씀입니다.
요한은 또 그들에게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도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이 하느님 앞에 어떤 특권을 주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원(起源)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출신지방, 출신가문, 출신학교, 취득한 자격증 등은 모두 우리 기원의 한 면을 말하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을 소중히 생각하고 자랑하며 사는 우리들입니다. 요한은 그런 기원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느님 앞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이고 실천이라는 말씀입니다.
요한의 세례운동은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삶을 바꾸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을 찾아가서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자기 삶을 바꾸고 새로운 실천을 약속하면서 세례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삶을 바꾸는 회개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은 다소 위협적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속에 던져진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 하느님의 삶을 배워 실천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시오.”(루가 6,36). “그분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의롭지 못한 사람에게나 비를 내려 주십니다.”(마태 5,45). 하느님의 자비를 본받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낙타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살았다.’고 말합니다. 구약성서에 광야는 하느님을 만나는 곳(호세 2,16 참조)입니다. 요한의 복장은 구약성서(2열왕 1,8 참조)가 전하는 엘리야 예언자의 것입니다. 요한은 음식도 많이 절제하였습니다. “요한이 와서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까 귀신들렸다고 사람들이 말한다.”(마태 11,18)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요한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이 살던 방식을 따랐습니다. 요한의 가르침은 그 당시 유다교 사회에서 유례를 볼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사람을 아끼는 것이었지만, 그분의 삶은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예언자들의 모습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점에 있어서 요한과는 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살지 않으셨습니다. 특수 복장을 하지도 않으셨으며, 그 시대 유다교가 요구하던 단식에도 충실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식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유대인들로부터 지적 받기도 하셨습니다(마르 2,18).
예수님은 사람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하느님은 성전 안에만 혹은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과만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벗어난, 성지순례, 철야기도, 제물봉헌, 계명 준수 등에만 계시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 한가운데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사람들과 주거를 달리하거나 복장을 달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사는 현장을 외면하고 율법 혹은 규칙만 생각하고 사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십니다. 자비롭고 용서하는 우리의 실천 안에 하느님은 그 자비와 용서의 원천(源泉)으로 살아 계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바였고, 그것이 성령이 오셔서 우리 안에 실현하시는 일입니다.
지금은 대림절입니다.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기간입니다. 회개는 대단한 고행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회개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분의 자비를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라고 요한은 오늘 복음에서 말합니다.
회개는 새로운 실천을 낳습니다. 하느님이 아버지로 함께 계시기에 그분에서 비롯된 실천입니다. 하느님이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시기에 우리의 이웃을 형제자매로 보면서 하는 실천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인 사람은 이웃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우리가 버리고 외면했던 이웃에게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시선으로 다가가는 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 우리는 분하고 억울할 때, 또 사람을 미워할 때, 자유를 쉽게 잃어버립니다.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숨결로 살아계시며 일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그 숨결 따라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자유를 배워 실천해야 합니다. 회개는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의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계셔서 새로운 실천이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사적인 의리(義理)와 정의(正義) 사이에서
-조한영 신부-
요한 세례자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주며,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촉구합니다. 하느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기에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이는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삶을 찾는 것이 마땅합니다.
요한 세례자는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회개의 합당한 열매로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것’과 ‘자신의 정당한 몫으로 자족하는 삶’을 가르칩니다.
이러한 요한 세례자의 가르침에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소유이며 인간은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재물을 지혜롭게 관리해야 한다는 신념과 함께, 이 신념에 반대되는 사리사욕과 부정부패가 만연된 그 당시 사회전반에 대한 준엄한 경고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의로움에 따라 생활할 때, 우리 사회는 정의가 구현되고 하느님의 나라에 가까이 가게 됩니다. 공정과 공평을 우리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지역 사회 안에서 추구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호수아기 7장에서 아칸은 하느님께 봉헌해야 할 전리품을 사리사욕을 위해 빼돌리는 부정을 저지르게 되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됩니다. 이 범죄로 그 자신과 일족이 처형을 당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5장에서도 하나니아스와 사피라는 하느님께 봉헌할 재물의 일부를 빼돌림으로서 하느님을 속이려 한 불의로 벌을 받아 급사하고 맙니다. 개인의 이익과 사사로운 의리는 공정하고 공평하며 공의로운 공동선에 부합될 때만 제한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국제투명성기구의 2007년도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부패정도는 43위로 작년보다 2계단 하락되었으며, 여전히 OECD 평균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더욱이 2005년도 조사에서는 정치인과 기업인의 부패정도가 베트남이나 아프가니스탄보다 더 심하다고 조사된 바 있습니다.
만연된 부정부패의 원인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는 사회 지도층의 끊이지 않는 부정과 혈연, 지연, 학연 등의 사적 의리를 내세워 부패를 조장하는 환경, 그리고 불의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일부 국민의 태도에 있다고 나타났습니다.
하느님의 의는 사적 의리(義理)에 매이지 않으며, 정의(正義)를 초월하는 공의(公義)입니다. 신앙인들은 사회적 정의를 위해 개인의 사적 의리에 매이지 말고, 사회적 정의를 초월하는 하느님의 공의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 다. 정의로운 판단과 선택으로 공의로운 신앙강국 대한민국을 건설합시다.............◆
회개는 행실로
-허영엽 신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파스칼(1623-1662)은 위대한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였지만, 그리스도교의 사상가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세상의 삶과 신앙의 모순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져 사색을 하던 중 1654년 11월23일 밤에 신비적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 체험은 신앙적으로 대단히 강력한 체험이었고 하느님께서 그에게 주신 은총이라 생각했다. 마치 은총의 불같은 것을 체험한 파스칼은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그는 신비적 체험 후 매우 어렵게 지내면서도 가난한 이웃을 돌보아 주고 신앙에 대한 글을 계속 집필했다.
그가 죽은 후 출판된 ‘팡세’에는 신앙적인 사색을 표현한 소중한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주옥 같은 소중한 글들이 담겨 있다. “인간의 마음마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인간은 악과 비참함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하느님만을 사랑하고 자신을 마다해야 한다.” 파스칼은 어느 날 갑자기 체험한 신앙의 체험 후 자신보다는 하느님만을 위해 살았다.
파스칼처럼 어떤 강력한 체험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보다 더 분명하고 능력 있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이 춤을 추며 기뻐할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선포하는 장면이 소개된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 유다인들이 그토록 학수고대하던 메시아가 오셨음을 선포한 것이다. 이 얼마나 반가운 소식인가.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하늘나라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님을 선포하고 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태 3,7-8).
회개는 그냥 형식적으로 세례를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단순한 자기반성이나 참회 의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행실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회개는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며 단순히 지난날의 잘못을 반성하고 용서를 청하는 것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다. 또한 회개를 통해 적극적으로 마음과 정신, 행동의 변화를 동반해야 한다. 보통 사람들은 생각과 말과 행동 양식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다. 회개한 사람은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러한 회개는 일회성으로 끝나서는 안 되며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한다. 또한 회개의 시작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생각에만 머무르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뜻을 세워도 의미가 없다. 이제 용기를 내자. 우리의 손이 항상 어려운 사람의 손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발이 착하고 좋은 일을 하는 데에 더 부지런해져야겠다. 우리의 입이 늘 불만이나 불평보다 칭찬과 평화를 노래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무엇보다 먼저 사람을 소중히
-양승국 신부-
권고사직, 명예퇴직이란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대규모 감원으로 인한 폐해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다룬 특집 프로그램을 보면서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혼났습니다. 아직 한창 일할 나이의 장년들이 일찌감치 일손을 놓아야만 하는 분위기가 보편화된 우리 사회 현실을 확인하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한창 일해야 할 아까운 인재들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이곳저곳 기약도 없는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잠시 화면에 소개된 한 퇴직자 가족의 쇠락 과정은 참담했습니다. 퇴직 후 자영업을 시작한 가장은 경험부족으로 빚만 잔뜩 지고 행방불명되고 맙니다. 남은 부인과 아이들은 죽을 죄인처럼 이리저리 쫓겨다니다가 마침내 달동네에 둥지를 트지만 금융회사 직원들의 추적은 집요하기만 합니다. 비가 오는 날, 엄마는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빚쟁이들로부터 머리채를 붙잡힌 채 길바닥에 내팽개쳐지기가 부지기수였답니다.
잠시나마 행복했던 시절을 되돌아보지만 마치 전생(前生)에 있었던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질 뿐, 굶기를 밥 먹듯이 하는 지옥 같은 현실을 견디다 못해 엄마는 아이들과 동반자살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엄마, 말 잘 들을 테니, 제발 죽이지 말아요. 행복하게 같이 살아요"라고 외치는 아이들 절규에 마음을 고쳐먹은 것이 벌써 네번째랍니다(KBS 특별기획, '한국사회를 말한다' 참조).
오늘 대림 제2주일이자 인권주일입니다. 인간은 존재 자체로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피조물임을 자각하는 주일입니다. 인간은 첫째가는 하느님 피조물이기에 그 어떤 제도나 이데올로기보다 우선해야 하는 가치있는 존재임을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신분, 국적, 빈부 여부를 떠나 생명을 지닌 한 그 어떤 인간이라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주일입니다.
오늘 특별히 실직이나, 사업의 실패 등 경제적 파탄으로 인해 깊은 수렁 속에서 고생하시는 분들, 너무도 막막해 앞길이 전혀 안 보이는 분들, 희망을 상실한 분들을 위해서 특별한 관심과 기도가 필요한 주일입니다.
직원을 소중히 여기는 경영 마인드로 유명한 한 경영자의 외침은 어려운 이 시대 모든 경영인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귀담아 들어야 할 소중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리해고를 통한 인원감축! 우선 인건비를 대폭 줄여보자는 마인드인데, 결코 바람직한 해결책이 아닙니다. 서로를 위해 피해야할 유혹입니다. 그로 인해 예견되는 피해자들의 고통과 국가적 손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저희 회사는 인원감축이라는 뼈아픈 해결책이 아니라 3교대를 4교대로 늘리는 고용 증대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잉여시간을 직원교육과 재충전에 투자한 결과 생산성 향상, 안전사고 감축, 노사화합이란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이 회사 경영자의 인본주의적 사고방식, 근로자들과 고통을 분담하려는 마음 씀씀이가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이 회사에서 사직서를 쓰면 최고책임자와 면담을 거쳐야 한답니다. 그리고 최고책임자로부터 "도대체 왜 사직서를 썼느냐? 좀더 함께 일할 수는 없겠냐?"는 듣기 행복한 만류의 말을 들어야 한답니다.
요즘같이 어려운 시기, 무리한 방법보다는 함께 고통을 분담하고, 함께 나누고, 함께 협력하는 방법을 통해 우리 앞에 놓인 이 난관을 함께 견디고 함께 안개 속을 헤쳐나가는 우리 가정, 우리 직장,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은혜로운 대림시기도 어느덧 두 번째 주일로 접어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우리를 향해 외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자비로운 아버지의 따뜻한 시선으로 우리 주변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이웃들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그들의 인간성 회복을 위해 노력하도록 합시다. 죽음과도 같은 고통 앞에 망연자실하게 넋을 잃고 앉아있는 이웃들 삶을 개선시키는 구체적 "구원의 손길"이 됩시다.
진정한 회개의 잣대는 다름 아닌 삶의 변화입니다. 억압받는 이웃들을 향한 적극적 투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관대한 나눔, 그것은 회개의 가장 좋은 표시입니다. 우리 삶이 그저 단순한 하나의 반복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들을 향한 끝없는 개선의 길, 나날이 성장하고 쇄신되는 참된 회개 생활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인권, 그것은 하느님의 것이다
-전주교구 주보-
하느님은 인간을 당신의 모습대로 만드셨다(창세1,27).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은 그러기에 너 나 없이 존엄하다. 이 존엄함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된 선물이자 권리(인권)다. 그래서 이 권리는 어떤 사람도 빼앗거나 빼앗길 것이 아니며, 자기 자신마저도 마음대로 하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인류가 창조된 이래로 오늘날 까지 천부적 권리이자 절대적 선물인 인권을 자학, 자살, 낙태, 살인, 약탈, 감금, 억압, 고문, 차별 등의 형태로 유린하여 왔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인권을 인간이 이렇듯 유린하여 온 저변에는 하느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착각함에서 비롯된 무지와 인권의 본디 근간인 하느님에 대한 주인의식의 상실이 깔려있다. 이 무지와 상실에 의해 인류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자학과 자살의 형태로, 타인에 대해서는 낙태, 살인, 감금, 고문, 차별 등의 형태로 인권을 경시 내지 짓밟아 왔다.
그러고 보면 인류가 유린한 인권이 근본적으로 회복되기 위해서 인간 안에는 인권의 원 주인인 하느님을 진짜로 아는 깸(이사11,2)과 그분께서 인간 각자에게 절대적 선물로 주신 존엄한 권리를 두려운 마음으로 긴박하게 돌려드릴 의식 전환(회심)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의 “회개하여라. 하느님 나라가 다가 왔다.”는 말씀은 인권의 원주인에 대한 무지와 상실에 의해 경시되고 유린된 천부적 권리로서의 인권을 근원적으로 회복시키는 혁명적 외침이자 종말론적 구원 선언으로 새길 수 있다. 그런데 복음은 요한의 신원을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밝힌다. 이 말씀은 요한의 주된 생활지와 그곳에서 그에게 일어난 일을 동시에 짐작케 한다. 곧 세례자 요한의 생활지였던 광야에서 그가 하느님의 소리를 들었음을 추측케 한다. 익히 알듯이 광야는 고독한 곳, 홀로 있는 곳이다. 홀로 있음으로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 앞에 섰고 거기서 하느님의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 소리는 자신의 신원을 꿰뚫게 하는 소리였을 것이고 그 소리로부터 그는 자신이 원주인이 아님을 두려운 맘으로 절절하게 감지했으리라. 마치도 죽음 앞에 선 인간 누구나가 피조물인 본래의 신원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어야 하듯이 요한도 광야에서 하느님이 자신과 타인의 주인이란 소리를 크게 들었을 것이다. 이렇듯 크게 들었기에 요한이 이렇게 외치고 있다.“회개하여라.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
오늘도 세례자 요한의 외침이 우리들 심연에 혁명적, 종말론적 긴박함의 소리로 반향 되고 있다. 그러니 본디 하느님의 것인 인권 ! 그것을 지금 바로 하느님께로 돌려드리자.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
만약 오늘 예수님이 우리 집을 방문하신다면 어떻게 할까요? 선약이 있으니 오늘은 안 된다고 할까요? 집안 구석구석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청소를 할까요, 아니면 성경책을 펴놓고 읽고 있을까요? 잔잔한 음악을 틀고 은은한 차를 대접할까요, 식사를 대접할까요?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을 불러 함께 만날까요, 아니면 혼자 조용히 만날까요? 아니면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으니 준비되었을 때 연락드리겠다고 할까요? 대림초에 두 개의 불이 켜졌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3,2)고 외칩니다. 주님은 이천 년 전에 이미 오셨고, 앞으로 또 오실 것입니다. 이에 대해 성 치릴로 주교는 「예비자 교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첫 번째로 오실 때 그분은 강보에 싸여 구유 위에 누워 계셨고 두 번째 오실 때에는 빛을 겉옷 삼아 입으실 것입니다. 첫 번째로 오실 때에는 십자가를 지고 치욕을 당하셨고 두 번째로 오실 때에는 천사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영광 속에 오실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오실 때에는 다시 재판받으러 오시지 않고 당신을 재판정에 불렀던 이들을 심판정으로 부르러 오실 것입니다.” 회개하라고 외치는 요한은 누구입니까? 혈육으로는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요,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난 친척이며 품성으로 말하자면 굳센 정신의 소유자(루카 1,80)입니다. 광야에서 낙타 털로 된 옷에다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으며(마태 3,4)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않고 자주 단식한(루카 7,33) 엄격한 수행자였습니다. 세례를 받으러 오는 이들에게 일일이 회개할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쳐 주면서 바리사이와 사두가이한테는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혼쭐내는 걸 보면 ‘예’와 ‘아니요’가 분명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3,11ㄴㄷ)고 하고,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예수께로 몰려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9)고 한 겸손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생각할 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1,20),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라며 자신의 소명과 역할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한국도로공사에서 이 작은 나라를 여기저기 조각내며 쉴 새 없이 길을 닦는데도 지난 추석 때 교통 체증은 사상 최고였다고 합니다. ‘천국 도로공사’는 교만의 산은 깎고 열등의 골짜기는 메우고 굽은 길을 곧게 만드는 내면의 길을 닦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더 근본적인 이 길을 준비하고 닦는 천국 도로공사 직원이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3,3) 장자는 “토끼를 잡는 덫의 목적은 토끼를 잡는 데 있으며 토끼들이 잡히면 그 덫은 잊혀진다. 말의 목적은 생각을 전하는 데 있다. 그 생각이 전해지고 이해되면 그 말은 잊혀진다.”고 했고,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는 “요한은 지나가는 소리였지만 주님은 태초부터 계시는 영원한 말씀이셨습니다. 말을 제거한다면 소리는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소리가 의미를 전달하지 않을 때 그것은 빈 소리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말과 소리는 구별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요한을 보고 그리스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소리를 말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소리는 말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자신이 소리라는 것을 감추지 않았습니다.”고 설교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달을 가리킨 손가락인 세례자 요한은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는 말대로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사라졌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세례를 받고 싶은 예비신자가 있었습니다. 이유는 하느님을 모르고 살아온 동안 지은 많은 죄를 빨리 용서받고 싶어서라고 했습니다. 세례성사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면 그동안의 모든 죄와 허물이 다 사해진다고 했더니 어떻게 그 모든 죄가 쉽게 용서될 수 있는지 의아해하면서 전율했습니다. 그는 세례성사 받을 날을 기다리며 매일 성경을 읽고 성모당을 순례하였습니다. 이마에 물만 붓는다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에게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마태 7,21)는 말과 같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루카 3,8)를 맺을 것을 촉구합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며, 세리들은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고, 군사들은 남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합니다(루카 3,10-14 참조). 구원의 문은 좁습니다. 불로소득으로 부자가 되기를 꿈꾸지 말아야 합니다.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내 발등에 떨어진 일 말고 멀리 있는 이웃들, 사회적 문제, 인간성과 지구환경의 위기에 대한 시대의 징표에 무지함을 일깨워야 합니다. 무지함이 구세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라자로에 대한 부자의 죄가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우리도 무관심으로 인한 죄를 짓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나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해낼 수는 없습니다. 나 혼자 길의 휴지를 줍는다고 효과가 드러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몫만큼 하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채워주실 것이기에 한 사람의 몫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퍼즐 한 조각에 비길 수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면 그 조각들이 모여 하늘나라 퍼즐이 완성될 것입니다. 남의 자리를 기웃거리지 말고 내 몫에 충실하고, 소리가 사라지듯 그렇게 사라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박상대 신부-
예수 그리스도의 ‘벌써 오셨음’과 ‘다시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대림시기의 제2주간을 맞이하면서 대림환의 두 번째 촛불을 밝혔다. 대림 제1주일의 말씀주제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겨냥한 것으로서 세상구원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의 재림예고와 그에 대한 준비의 태도로써 ‘항상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는 경고였다.(마태 24,37-44) 오늘 대림 제2주일의 말씀주제는 메시아의 출현에 대한 직접적인 약속으로서 이사야의 예언(40,3-5)이 세례자 요한의 출현과 그가 선포하는 회개의 세례에 의해 성취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러고 보면 대림시기가 세상의 종말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염두에 두고 불안과 초조, 두려움과 긴장, 단식과 고행의 시간으로 이어지는 ‘막연한 기다림’이기보다는 메시아 예언의 성취와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쁨과 희망으로 준비하는 ‘충실한 기다림’의 시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태오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와 잉태, 탄생경위와 성장에 관한 이야기(1-2장)를 제외한다면 오늘 복음의 본문이 바로 마태오가 선포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이다. 복음의 시작은 세례자 요한의 출현과 함께 시작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하는 복음의 시작이 세례자 요한의 출현으로 그 막을 올린다는 것이다. 타락한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역사에서 그 중심은 단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차지하신다. 그러나 그 중심의 바닥에 세례자 요한이 서 있다. 즉, 구원역사의 시간상 흐름으로 따지자면 요한이 구약(舊約)과 신약(新約)의 그 가운데 서 있다는 말이다. 요한이 곧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며, 동시에 신약의 준비자 및 선구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 안에서 구약의 모든 예언(豫言)이 성취됨을 보게 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언의 핵심인 구원이 성취됨을 보게 된다. 요한 세례자가 알리는 그 시작이 오늘 복음에는 막연히 ‘그 무렵’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그 무렵은 통상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려 했던 시기이다. 루카복음은 이 시기를 아주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루카는 세례자 요한의 출현과 요한이 예고하는 메시아 시대의 도래가 로마제국의 황제 티베리우스 치세 15년, 즉 기원후 27~28년경임을 밝히고 있다. 루카가 제시하는 정확한 시기에 비하여 마태오가 막연한 ‘그 무렵’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각도에서의 해석이 있을 수 있겠다. 세례자 요한의 출현에 관한 정확한 시기의 언급이 이를 역사 안에서의 한 사건으로 만든다면, ‘그 무렵’이라는 표현은 역사 속의 어느 때든 마음먹는 때, 필요한 때, 그래서 오늘 복음이 성탄과 또 미구에 있을 재림을 준비하는 모든 이를 향한 복음이 되게 만든다. 세례자 요한이 출현하는 ‘그 무렵’은 결국 ‘광야’라는 장소와 기막히게 어울린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의 도래와 메시아의 행차 길을 닦으러 오는 특사가 자기 궁궐에 나타나리라고 믿었다.(말라 3,1) 그런데 그가 궁궐이 아닌 광야에 나타날 줄이야 누가 짐작을 했겠는가? 광야에 사는 이가 입고 다니는 옷이나 먹는 음식은 광야라는 곳에서 조달된다. 바로 낙타 털 옷과 가죽 띠, 메뚜기와 들꿀이 그것이다. 요한이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든 간에 그것이 그가 선포하는 메시지와 어울린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선포의 메시지는 바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유다 각 지방과 요르단 강 부근의 사람들뿐 아니라 ‘독사의 족속 같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 사람들도 요르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온다.(5-7절) 회개의 세례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회개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여야 함이 요구된다.(8절) 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유효하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족보나 세례를 받았다는 증명서가 도래한 메시아의 심판을 피해 갈 수 있는 보장이 되지 못함을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먼저 세례자 요한이 깨달았다. 요한은 자기 아버지 즈카르야의 사회적, 종교적 지위와 영향력을 토대로 나름대로 성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오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았다. 그 증거로 요한은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광야로 나아간 것이다. 광야는 늘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곳이며,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장소이다. 오늘날 시끄럽고 혼탁한 세상, 매일같이 벌어지는 온갖 음주와 가무, 오직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걱정들과 계산들로 둘러싸인 머릿속, 이런 일상에서 벗어나 광야와 같은 고요함을 내 안에 준비하지 않는 한, 메시아 탄생의 복음을 맞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