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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김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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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
700만 명 이상이 본 영화 ‘파묘’의 키포인트가 되는 대사다. 여우는 한반도를 강탈한 일본, 범은 한반도의 큰 산줄기인 백두대간을 뜻한다. 영화는 일본이 조선의 식민지배를 위해 백두대간 곳곳에 쇠말뚝을 박아 한반도의 정기를 끊으려 했다는 설(說)에 설정을 두고 있다. 백두대간이 무엇이기에 그곳에 쇠말뚝을 박는 것으로 한반도의 정기를 끊을 수 있다고 여겼을까.
3월 10일 북한산 육모정 고갯길을 걷고 있는 김우선 백두대간인문한연구소장. 김영주 기자
“일본이 조선을 수탈하던 시기에 우리 조상들이 가장 믿었던 신앙이 무엇일까요? 바로 풍수지리입니다. 산세와 지세뿐만 아니라 음택과 양택 등 이런 것들이 생활 속에 밀접하게 자리 잡고 있었어요. 백두대간(白頭大幹)도 영조(1724~1776) 때 편찬된 산경표를 통해 이미 체계가 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니 조선 사람을 정신적·정서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선 먼저 그것을 훼손하는 작업이 필요했을 겁니다.”
“물론 ‘쇠말뚝을 박아 정기를 끊으려 했다’는 건 역사학계에서 정설이 아닌 쪽으로 기울어져 있지만 그것 말고도 많은 시도가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 산맥 체계를 기술한 고토 분지로의 경우 한반도의 지형을 토끼라고 했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한반도의 형상을 호랑이에 비유한 우리 선조들과는 대조적이죠. 이런 것들이 조선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한반도를 영원히 식민지화하려는 시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달 출간된 『우리가 몰랐던 백두대간』(김우선·김광선·신인수·박경이·차성욱·이문희 공저)의 저자 김우선(66) 백두대간인문학연구소장이 말했다. ‘백두대간 교육론’이라는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 『우리가 몰랐던 백두대간』은 “학생들의 눈높이에서 본” 백두대간의 해설서다. 그간 여러 권의 백두대간 관련 책을 냈지만 이제는 어른보다 학생을 대상으로 한 책을 쓰는 게 백두대간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저자들은 모두 서울교대 산악부 선후배 사이로 백두대간 관련 학자와 산악인, 숲해설가, 교육자, 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김 소장은 “수십 년간 같은 산악회에서 활동한 산악 동료로서 백두대간 교육책을 내는 뜻을 모았다. ‘또 다른 형태의 산행’을 함께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인수봉에서 백두대간…“내 인생의 산”
지난 10일 김 소장과 함께 서울 강북구 우이동 육모정 고갯길을 걸었다. 우이구곡 중 맨 하류에 있었다는 ‘재간정’ 터에서 출발해 육모정 고개와 영봉(604m)을 넘으면 북한산 백운대와 인수봉 가는 하루재와 만난다. 여기서 다시 우이동 계곡을 따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려오는 약 5㎞의 길이다. 난이도를 붙이자면 등산로와 산책로의 중간 정도. 쉬엄쉬엄 가도 2~3시간이면 한 바퀴 돌 수 있다. 그는 대학 산악부 초년생이던 1977년 인수봉을 처음 등반했다고 한다. 그에게 육모정 고갯길은 인수봉 등반을 위한 접근로였다. 그 길을 50년 가까이 걷고 있다.
3월 10일 북한산 영봉을 향해 걷고 있는 김우선씨. 김영주 기자
“생각이 많은 편인데, 이 길을 걷다 보면 생각이 정리됩니다. 50대 중반에 마지막 직장을 나온 뒤 제2의 인생을 시작해보자고 다짐하고 대학원에 들어가 백두대간 공부를 시작했어요. 젊은 친구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기숙사 생활을 하며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하면 배운 것을 쉽게 전달할 수 있을까’ 늘 고민하지요. 얽히고설킨 머릿속을 정리하려면 비우는 것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때마다 이 길을 걷습니다. 영봉을 오르면 오른쪽으로 도봉산의 오봉이 병풍처럼 펼쳐지고, 왼쪽은 북한산 인수봉·백운대·만경대가 한눈에 들어오죠. 육모정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수봉을 쳐다보는 인수봉 조망 길이에요. 북한산에 수많은 등산로가 있지만 이런 데가 많지 않을 겁니다. 또 인수봉을 보고 있으면 젊은 시절 등반하던 시절이 생각나요. 이젠 추억으로만 간직해야겠지만요.”
1977년 북한산 인수봉 대슬랩을 오르는 김우선 소장. 사진 김우선
20대 시절, 그는 교대 졸업 후 초등학교 교사로 살았다. 그러다 느닷없이 산악 전문지 기자가 됐다. 스무살 시절부터 산은 그의 인생에서 전부나 다름없었지만 교사로 일하는 동안 짬짬이 산에 가는 ‘반쪽 산쟁이’로는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덕업일치(德業一致)’가 가능한 산악 전문지 기자로 전업했다.
2004년 강원도 고성군 진부령, 백두대간 능선에서 포즈를 취한 김우선 소장. 사진 김우선
산 기자로 일하며 일본·미국 등 해외 유명 산악인 등을 인터뷰한 경험은 백두대간 연구자로 들어서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일본의 경우 산악 관련 에세이를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한다는 점에 놀랐고, 한국도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깨달았다. 산에 다니며 틈날 때마다 산 시를 쓴 것도 그런 연유다. 그는 ‘대청에 부는 바람’ 등 여러 편의 시를 쓴 시인이다.
“20여 년 전, 세계 여성 최초로 에베레스트(8848m)에 오른 다베이 준코(1939~2016)를 인터뷰하러 갔을 때요. 우연히 어느 중학생의 영어책을 들춰보게 됐는데, 다베이 준코가 에베레스트 등정 후 쓴 ‘1300일’이란 에세이 일부가 영문으로 실려 있는 거예요. 일본에서 베스트 셀러가 됐다는 말은 들었지만 영어 교과서에 실린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산악인의 글을 교과서에 싣는다는 것, 또 그걸 영어로 번역해 영어 교과서에 수록했다는 것도요. 아마 지금도 교과서에 남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일본은 자기네 것을 잘 포장하고, 또 세일즈를 잘하잖아요. ‘에베레스트 세계 여성 최초’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널리 싶었던 것이고, 또 그것을 가장 잘 알리는 방법이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라고 본 거죠.”
“백두대간은 생활 속에 있다”
『우리가 몰랐던 백두대간』책 표지로 쓴 사진. 백두대간의 설악산 능선. 사진 김우선
사실상 이때부터 백두대간 연구, 『우리가 몰랐던 백두대간』 출간 준비를 시작한 셈이다. 백두대간 연구는 조선 시대 여암 신경준(1712-1781)이 기록한 『산경표』에서 시작한다. 조선의 산줄기와 강을 기준으로 분류한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이뤄진 산맥 체계다. 조선의 산맥 체계를 정확하게 분류한 소중한 문화유산이지만 아무래도 수백 년 전의 것이다 보니 일반인의 시각에선 어려운 게 사실이다. 김씨가 백두대간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산경표와 백두대간을 설명하다 보면 혹자는 ‘그래서 조선 시대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냐’고 따져 묻는 이들이 있어요. 저도 사실 지리학계 한 후배에게 이 말에 듣고 난 후 더 백두대간 연구에 더 빠져들게 됐죠. 당연히 조선 시대에서 나아가 지금 우리 생활에 밀접하게 들어와 있는 백두대간, 그리고 미래 가치를 연구하고 전파해야죠. 또 학술적 영역, 마루금 종주뿐만 아니라 백두대간에 기대어 살았던 옛사람들의 문화와 역사 등 인문학이 필요해요. 백두대간의 범위를 인문학으로 넓히게 되면 그 범위가 무궁무진해집니다.”
김 소장은 특히 백두대간 자락 곳곳의 지명 유래를 따라가다 보면 한반도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고 말했다. 또 이런 인문 콘텐트를 더 많이 축적하고 외국어로 번역해 국제적인 홍보를 해야 유네스코에서 정한 세계복합문화유산에 백두대간을 올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일본 강점기에 사라진 백두대간은 1980년대까지 수면 아래에 잠겨 있다가 80년대 후반 다시 일반에 알려졌다. 이후 90년대엔 백두대간 종주 붐이 일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다시 종주 붐도 사그라들었다. 김 소장은 그 이유로 인문학적 요소가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종주하고 나면 마치 백두대간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죠. 자신의 건강과 체력 증진을 위해 백두대간을 걷지만 정작 이들 중에 보전과 미래 가치를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그러는 사이 백두대간의 길과 식물, 자연과 환경은 훼손돼 가고 있지요. 그래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게 백두대간의 미래 가치를 높이는 방법이라고 봐서 책을 내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낸 백두대간 책은 되도록 쉽게 풀어썼다. ‘1장-창의적인 백두대간 교육을 위한 제안’의 12개 가지 질문과 답이 그것이다. 2005년 지리산에 풀어놓은 반달가슴곰은 어떻게 백두대간 능선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닐 수 있었을까, 생태 지명 가운데 가장 많이 등장하는 백두대간의 동·식물은 무엇일까 등이다.
2장에 있는 ‘산경표에 대한 엉터리 이야기들’에선 백두대간을 모른 채 틀린 정보를 전파하는 일부 유튜버와 학자들의 행태를 꼬집었다.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산경표와 이후 산경표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산경도를 구분하지 못하는 점, 여전히 일본인 학자 고토 분지로의 이론을 추종하는 행태 등이다.
2019년 백두대간진흥회가 연 '백두대간 지도 만들기' 시간 중, 학생들이 산경도에 산을 표시하고 있다. 사진 김우선
김 소장은 향후 전자 지도를 기반으로 한 백두대간 정보 포털 제작과 백두대간 지명사전 편찬을 바탕으로 유네스코 세계복합문화유산 등재, 남북 민간 학술 교류 등 백두대간의 미래 가치 실현을 위해 힘쓸 계획이다.
그는 “우리도 일본처럼 교과서에 백두대간과 관련한 서적이나 문학 서적의 일부를 실을 수 있다면 백두대간을 알고 보전하는 데 하나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육모정 고갯길 “인수봉바라기 길”
육모정 고개 가는 길, 용덕사의 마애불. 김영주 기자
육모정 고개는 육각형의 정자가 있던 자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육모정 고개에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군부대가 있는 사기막골이다.
육모정과 사기막골 일대는 조선 시대 북한산 일대 여러 명승 중에서도 최고의 치는 휴식처였다. 계곡의 이름은 청담(淸潭)으로 불렸다. 이 일대에 흔적을 남긴 인물로는 조선 중기의 문신 구시경(1637~1699), 송시열(1607~1689) 등이 있다. 1960년대까지도 구시경의 후손들이 이곳에서 기거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960년 군부대가 들어선 이후 출입금지 구역이 됐다. 지금도 군부대 훈련장이 있다.
육모정 고개는 낮고 짧은 코스임에도 북한산 상장 능선 너머 도봉산 능선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또 북한산 방면으로는 영봉 너머 삼각산(백운대·만경대·인수봉)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인수봉은 국내 암벽의 메카로 주말이면 이 벽을 오르는 클라이머로 늘 북적댄다.
김경진 기자
육모정 길 들머리는 우이신설선 북한산우이역 2번 출구로 나와 계속 직진하면 된다. '파라스파라 서울' 리조트 입구를 지나 올라가면 '육모정공원지킴터'가 나오고, 이후 선운사·용덕사 등을 통해 탐방로가 이어진다. 용덕사 마당엔 20세기 초에 새겨진 것으로 알려진 마애불이 있다. 이후 탐방로는 영봉(604m)까지 완만한 등산로가 이어진다. 응달이 진 곳은 3~4월까지도 얼음이 남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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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