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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게 될 내일을 바라보라!
시편 126:1-6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30대 젊은 나이에 크리미아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그녀는 전쟁터에서 콜레라, 이질, 열병으로 쓰러져가는 병사들과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을 밤 낮 가리지 않고 치료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백의의 천사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그는 극심한 피로로 탈진상태에 빠졌습니다. 과로와 스트레스가 그를 쓰러트린 것입니다. 훗날 학자들은 만성피로 증후군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병’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c. 1860년 지금도 간호학과 학생들은 재학 중에 '나이팅게일 선서'를 한다. 간호사 나이팅게일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고자 이 같은 선서를 하는 것인데, 당시 나이팅게일은 수많은 사상자가 속출하고 콜레라가 번창하던 크림전쟁에 용기 있게 등장하여 수많은 사람을 간호하고 돌보았을 뿐 아니라 현대 간호학을 정립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이 80이 지난 화가 피카소는 지칠 줄 모르는 정력으로 플라멩고 춤을 추는가 하면 그림, 조각, 시, 희곡 등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습니다. 이유는 늘 웃으며 낙천적으로 일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통증치료 의사인 데이비드 보레슬러는 환자들에게 한 시간에 두 번씩 거울을 보고 웃게 하는 처방을 내렸다고 합니다. 웃으면 통증도 없어지거나 감소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환자를 웃기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조상들도 웃음에 대한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소문만복래 “웃는 문으로 만 가지 복이 들어온다(笑門萬福來)”, 일소일소 일노일노“한번 웃으면 한번 젊어지고, 한번 성내면 한번 늙는다(一笑一少 一怒一老)”고 했습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노래하기를 사람은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전 3:4)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봉독해 드린 시편 126편은 나라의 멸망을 겪은 사람들이 울면서 포로로 끌려갔다가 다시 웃으며 고국에 돌아와 부른 감사의 노래입니다. 그들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통하여 소중한 진리를 터득했습니다. 값진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라는 것입니다.
1. 해방을 꿈꾸는 자
오늘 본문 1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해방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이스라엘은 솔로몬 왕 시대 이후, 남쪽과 북쪽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기원전 722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고, 기원전 586년에 남왕국 유다마져 바벨론에게 멸망당해서 포로로 붙잡혀 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우상을 숭배하다가 타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죄악의 길을 쫓다가 결국은 이방나라에게 나라를 빼앗기고야 만 것입니다. 유대 민족은 이렇게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로 붙잡혀 가서, 고난과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감격의 날이 찾아왔습니다. 바벨론에서 70년간의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이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포로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들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우리에게도 이런 꿈꾸는 것 같은 해방의 날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땠습니까? 영혼의 자유함을 느끼며 꿈꾸는 것 같은 황홀한 기쁨이 있지 않았습니까? 자유의 대가는 수고를 요구합니다. 지난주 3.1절이 있었습니다. 36년 동안 일본압제하에서 해방을 위해 얼마나 수고를 했습니까. 얼마나 피를 흘렸습니까. 얼마나 눈물로 기도를 하였습니까. 해방은 어느 날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미래는 오늘 수고자만 얻는 것입니다. 땀 흘린 자만 미래를 얻을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일제로부터 자유를 얻으려고 얼마나 갈망했습니까. 얼마나 희망했고 기다렸고 고대했습니까. 그러니까 해방이 반갑고 기쁘고 행복했던 것입니다. 기다림이 없고 수고가 없었으면 그 해방이 무슨 기쁨이 있습니까. 기다림이나 사모함이나 수고가 없으면 기쁨도 없는 법입니다. 해방은 기다린 사람들의 것입니다. 사모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수고한 사람들의 것 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는 죄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구원받은 백성들이고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또 우리는 정치적 멍에도 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나라의 소중함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스스로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이 나라가 건강한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사명을 부여하여 주셨습니다.
2. 눈물을 흘리며 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둘수 있습니다.
가나안은 저절로 어느 날 쉽게 편안히 도착하면 안 됩니다. 먼저 애굽을 탈출하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애굽을 뒤로 하고 떠나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애굽을 반드시 분명하게 떠나야 합니다. 애굽 즉 구세계와 절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야 합니다. 홍해를 건너야 한다는 말은 죽었다 살아나는 경험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물에 빠져 죽었다 건짐 받아야 합니다. 뒤에는 군대가 쫓아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놓여 있습니다. 그때 모두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목격하고 그 기적을 맛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라야 가나안에 들어가도 자유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광야 40년 연단도 있어야 합니다. 그 광야에서 뜨거운 햇빛과 밤의 추위와 목마름과 불편한 잠자리를 감수해야 합니다. 그렇게 연단 받은 후에야 가나안에 갈 수 있습니다. 천국은 어느 날 봉사 조금했다고 가는 곳이 아닙니다. 예수 몇 년 믿었다고 가는 곳이 아닙니다. 사모하는 수고가 있어야 가는 곳입니다. 갈망하는 수고가 있어야 가는 곳이 하나님 나라 천국입니다. 우리가 예수믿고 구원받은 것도 그렇습니다. 예수 믿지 않고 하나님을 멀리했다가 다시 회개하고 은혜를 받았을 때 얼마나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고 사람들이 아름답게 보였는지 모릅니다. 미운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오히려 그들이 사랑스럽게 보였습니다. 입술에서는 항상 찬양이 흘러나왔고, 보는 것마다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이처럼 영혼이 해방되어 영안이 열리면 아름다운 것만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추한 것이 보이고, 비판거리만 보이면 영안이 닫힌 것이 아니겠습니까? 흔히 "영안이 열린다"고 하면 신비한 눈이 생기는 것으로 여기는 분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볼 수 있고,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예수님 안에서 세상과 사람을 아름답게 보고 그 아름다운 삶을 실천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영안이 열린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추한 것을 보고, 비판과 판단과 정죄를 일삼는다면 그것은 영안이 닫힌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영안이 열리면 무엇보다 우리의 눈이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3. 해방을 누리지 못한 자들을 위한기도
그런데 오늘 본문 1-3절에서 이스라벡 백성들은 해방의 기쁨을 노래하면서도 동시에 아직 해방되지 못한 형제들을 위해 4-6절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형제들의 고통을 보면서 자기 책임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무엇을 느낍니까? 북한 동포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북한의 고통은 일차적으로 그들 자신의 책임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책임으로도 느낄 줄 안다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래서 우리도 4절의 기도처럼 그들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남을 불행을 볼 때 내 책임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 자세를 가질 때 우리의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될 것입니다. 오늘 날 왜 우리 나라가 어려워졌습니까? 책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 미워하고, 서로 손가락질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을 많이 욕하지만 우리도 책임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서로 책임을 전가하면 우리 모두에게 남는 것은 패배밖에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회와 공동체가 어려울수록 비난의 소리가 더욱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요즈음 책임지는 사람은 없고 비난의 목소리만 높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이 어려움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사실 우리들의 공동책임입니다. 특히 믿는 사람들의 책임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책임을 느끼는 사람은 없고 비난하는 사람들만 있으면 되겠습니까?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 때 진정 꿈꾸는 듯한 내일이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 126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그리고 오늘은 울지만 곧 웃게 될 그날을 바라보며 희망을 잃지 않고 새봄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4. 고통스러웠던 과거도 오히려 감사가 됩니다.
기원전 586년, 예레미야의 경고를 무시하고 하나님 앞에 무례히 행하던 이스라엘 민족은 결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성읍과 함께 불타버리고 왕자들은 왕이 보는 앞에서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시드기야 왕은 자식들이 죽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고 두 눈이 뽑힌 채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와 함께 많은 신하, 귀족들이 줄줄이 엮어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예레미야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고, 본래는 열방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 이제는 조공 드리는 자가 되었도다.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 중에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도 다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도다”(애 1:1-2). “이를 인하여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흐름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영을 소성시킬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애 1:16). 그러나 울며 바벨론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마냥 앉아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왜 자신들이 이렇게 끌려와야 했는지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밤만 되면 한 곳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결과란 사실을 깨닫고 자녀들에게 열심히 율법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인 장소가 바로 회당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이렇게 생활하던 그들은 고국에 돌아와서도 안식일마다 회당에 모여 율법을 연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바사(페르시아)왕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한 첫해인 주전 539년, 성경(에 1:1)은 바사왕 고레스 원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해에 고레스는 바벨론에 억류되어 있던 유다민족에게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유다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고 하였습니다. 전에 예루살렘에서 노략해온 은금과 성전건축에 필요한 물건을 가지고 가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꿈같은 일이었습니다. 기적과 같은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웃으며 노래를 부르며 돌아왔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시 126:1-3).
시편 기자는 포로로 끌려갔던 바벨론에서 조국 이스라엘로 돌아왔을 때의 감격을 마치 꿈꾸는 것 같았다고 말합니다(1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바벨론 침략자들의 손에 넘기셨을 때, 이스라엘은 울면서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들처럼 고통스러운 미래만 있었고 아무런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회복된 이스라엘은 마치 꿈꾸는 것 같은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고통스러운 과거를 돌아보니 회복된 현재의 의미가 더욱 크게 느껴졌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눈물을 꿈같은 웃음으로 바꾸셨습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나 과거의 아픔을 통해 오히려 희망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참된 복에 이르기 위한 문이 됩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그분의 백성을 회복시키시기 때문입니다.
5. 눈물로 씨를 뿌리는자에게 열매를 거두게 하십니다.
그들이 해방을 얻고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그 감격한 모습은 1절로부터 3절까지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남아있는 포로들도 속히 돌아올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를 잊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보내소서.” 그런데 그들은 비록 지금은 눈물을 흘리는 아픔이 있을지라도 훗날에는 다음 세대가 기쁨으로 단을 거두어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현실은 너무 절망적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유대 남방 네게브 지역의 시내들은 건기에는 바짝 말라 있지만, 우기에는 많은 물이 흘렀습니다. 시편 기자는 바짝 말라 버린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은총의 비를 내리셔서 우기의 시내같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4절).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경험한 그리스도인은 현재의 고난을 통해 미래의 소망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씨를 뿌리고 결실을 거두는 자연의 이치가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땅에 뿌려지는 씨가 죽을 때 영광의 열매를 맺습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결국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게 되듯이, 현재의 고난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온전한 기쁨으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성경을 보면 어느 시대나 자기시대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역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은 후대에 가서 그들이 뿌린 것의 30배, 60배, 100배를 거두게 하셨다는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왔을 때 현실은 그들의 기대에 부푼 꿈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는 그들이 꿈꾸는 것 같아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혀에는 찬양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본국으로 돌아와 보니 현실은 너무나 암담하여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중심축 역할을 했던 예루살렘은 다 무너져 있었습니다. 남아있는 동족들은 가난과 헐벗음에 시달려 지쳐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이방의 주변 나라들은 호시탐탐 이스라엘을 침공하려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현실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한시라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눈물을 열매로 바꾸시는 위대하신 분입니다. 이 믿음 하나로 그 많은 시련을 값진 열매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6. 미래에 웃으려면 지금 울면서 씨를 뿌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하셨습니다. 또한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22)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원리는 심고 거두는 원리가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둡니다. 심지 않으면 거둘 수 없고 심었는데 거두지 못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야단맞고 쫓겨난 이유는 돈을 벌어오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기 주인을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시므로 모든 것이 넉넉하여 착한 일을 넘치게 하도록 도와주십니다(고후 9:8) 생명을 심어야 영생을 거두는 원리가 있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도록 하셨습니다. 심고 기다려야 하는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오늘 심고 내일 거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원리는 변함이 없으므로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거두게 하십니다 화평을 심으면 의의 열매를 거둡니다(약 3:18).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둡니다(호 10:12).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년 동안 울며 씨를 뿌렸습니다. 이렇게 기뻐 웃으며 고국으로 돌아가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정말 꿈같은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믿고 한국 교회가 부흥한 것은 이같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고 목숨을 바쳐 선교한 선교사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헌신적인 봉사와 피와 땀, 생명을 바쳐서 뿌린 복음의 씨앗이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은 결과가 오늘의 한국 교회인 것입니다. 씨를 뿌려야 열매를 맺게 됩니다. 씨를 뿌리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선교사들이 복음의 씨를 뿌려서 오늘 한국 교회란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 교회는 무슨 씨를 뿌리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씨를 뿌리지 않는다면 미래에 거둘 열매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눈물로 땀을 흘려 생명을 바쳐 씨를 뿌려야 그 씨가 싹이 나고 줄기가 뻗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편안한 한국 교회를 보면서 걱정스러운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훗날 웃으려면 지금 울며 씨를 뿌려야 합니다. 지금은 힘들고 어려워도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 봉사하며 복을 심어나간다면 하나님이 준비하신 기회가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어려운 환경을 불평하지 맙시다. 오늘에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믿음의 씨를 뿌려 나가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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