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군수산업 단지를 겨냥한 러시아군의 정밀 공격에 우크라이나는 생산 시설을 지하로 옮기거나 거점을 해외로 이전했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 군수 물자를 생산, 공급하는 유럽 내 군수 산업체나 물류 거점인 공항에 비상사태가 잇달아 발생해 유럽 여러 나라에도 비상이 걸렸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14일 하루를 정리하는 기획기사 중 '유럽 전역의 비상 사태 흐름'(Поток ЧП по всей Европе)이라는 코너에서 "유럽 여러 국가의 군사 장비 생산 공장에서 최근 화재와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사보타주'(비밀 폭파 음모) 여부는 수사가 끝나야 알 수 있는 상황이지만, 러시아를 배후 세력으로 의심하는 눈초리는 확연하다.
13일 이탈리아 로마 남쪽에 위치한 대형 탄약 공장인 KNDS Ammo Italy의 화약 압축공장에서 폭발과 화재가 발생했다고 ANSA 통신이 보도했다. 프랑스-독일 방위산업 컨소시엄 KNDS의 이탈리아 지사격인 이 공장은 육상과 해상 방어용 중대구경 탄약과 항공우주 발사체용 고체 추진제를 생산한다.
또 10일에는 불가리아 트랴브나 인근의 EMCO 소유 탄약고가 폭발했다. 불은 트럭에서 시작돼 쌓여 있던 탄약들이 연쇄폭발을 일으켰다. EMCO는 옛소련의 표준 탄약(122㎜, 152㎜ 포탄과 Grad 다연장 로켓 시스템용 미사일, 60㎜, 82㎜, 120㎜ 박격포탄, 유탄 발사기 탄약 등)을 생산하고, 경장갑 차량을 수리 및 현대화하는 기업이다.
우크라이나에 제공된 무기가 수송기에서 하역되는 모습/사진출처:우크라군 총참모부(합참) 페이스북
공교롭게도 두 기업은 우크라이나에 무기와 탄약을 공급하는 데 관여하고 있다.
KNDS Ammo Italy 공장은 나토(NATO) 표준 155㎜ 포탄을 비롯해 유럽 국가에 공급되는 각종 무기및 탄약을 생산하고, 일부 우크라이나에도 제공한다. 또 독일 카이저(CAESAR) 및 PzH 2000 자주포, 레오파트1, 2 전차(탱크), 게파드(Gepard) 대공포, AMX-10 RC 장갑차 등을 우크라이나군에 공급한다. 특히 KNDS는 키예프(키이우)에 KNDS Ukraine를 설치해 서방 제공 장비에 대한 유지 보수 및 수리 서비스를 우크라이나 현지에서 직접 제공한다.
13일 네덜란드 로테르담 항구에서도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 에너지 시설에서 발생한 이 폭발로 1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했다. 언론에서는 기술적인 문제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또 이날 영국 동부에서는 열차 탈선 사고가 발생했다. 이틀 만에 두 번째 탈선 사고다. 전날(12일)에는 영국 남부에서 열차 탈선 사고가 발생했는데, 11명이 부상을 입었다.
드론이 발견된 독일 라이프치히-할레 공항의 화물기/사진출처:독 빌트지
이같은 사소한 사건마저 언론의 관심을 끈 것은 지난 5일 독일 동부 라이프치히-할레 공항에서 폭발물이 탑재된 드론이 발견되면서부터다.
급히 현장을 찾은 알렉산더 도브린트 독일 내무장관은 이를 "새로운 차원의 위협"으로 평가하며 우려를 표명했다. 라이프치히-할레 공항은 독일군과 나토군의 군수 물자 수송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시설로, 우크라이나 화물 항공사인 '안토노프 항공'의 거점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독일 언론이 공개한 영상에는 우크라이나 국기를 상징하는 노란색과 파란색으로 도색된 안토노프 화물기 'Ан-124 루슬란' 옆에서 폭발물 처리 로봇이 작업하는 모습이 담겼다.
독일 일간 쥐트도이체 차이퉁 등 현지 언론들은 드론이 발견된 'Ан-124 루슬란' 화물기에는 프랑스에서 우크라이나로 보내는 군용 탄약이 실려 있었다고 보도했다. 또 경찰 기밀 보고서를 인용해 "문제의 드론에 장착된 폭발물은 군용급이었다"고도 했다. 독일 내무부는 그러나 의회 보고를 통해 언론들의 이같은 보도를 부인했다.(독일 dpa통신)
독일 라이프치히-할레 공항에서 발견된 드론을 제거하는 로봇/사진출처:독 빌트지 스트라나.ua
문제는 라이프치히-할레 공항의 보안 시스템이 사전에 드론을 탐지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공항이 2022년 2월 러시아 특수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 개시 이후 여러 차례 공격과 첩보 활동의 무대가 된 만큼 위기 의식이 크게 높아졌다.
게다가 현지 당국은 또 다른 드론이 라이프치히-할레 공항 활주로 폐쇄로 착륙을 포기한 채 기수를 돌리던 DHL 소속 화물기와 충돌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DHL 화물기는 라이프치히에서 200㎞ 떨어진 독일 하노버 공항에 착륙한 이후, 기체에서 경미한 손상이 확인됐다.
앞서 2024년 7월에는 이 공항에서 DHL 화물기에 적재되기 직전의 소포에서 발화 장치가 작동하면서 불이 나 컨테이너 전체를 태우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독일 수사당국은 이 사건을 러시아 정보기관이 연루된 방화·사보타주 행위로 보고 수사를 벌이기도 했다.
작년(2025년)에는 한 여성이 이 공항에서 항공편, 특히 군용 수송기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 중국 정보기관의 첩보 활동을 도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우크라이나 북부 수미주 상공을 날고 있는 러시아 드론 게란/텔레그램 캡처
유럽 여러 국가의 군사 및 전략 시설 상공에서 정체불명의 드론이 정기적으로 목격되고,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2025년)부터다. 지난해 10월 벨기에의 한 군사 기지 상공에 드론이 나타났고, 앞서 9월에도 덴마크의 군사 기지 상공에서 드론이 포착됐다.
유럽은 이러한 사건들의 배후로 러시아를 아직 공식적으로는 지목하지 않았지만, 주요 언론에서는 모스크바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공급한 유럽에 경고를 보내고, 무기 공급을 중단하도록 압력을 가하려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러시아는 이런 의혹을 부인하고 있다.
당연하지만, 알렉세이(올렉시) 마케로프(마케예우) 주독일 우크라이나 대사는 라이프치히-할레 드론 사건의 배후로 러시아를 지목했다. 그는 독일 벨트TV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 외에 누가 이런 짓을 했겠느냐"고 반문한 뒤 "2024년 7월의 DHL 소포 화재 사건을 포함해 러시아는 오래 전부터 이같은 하이브리드전을 벌여왔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와 인접한 국가 영공에는 전자전 효과에 따른 실수든, 아니든 시시때때로 정체불명의 드론이 날아들고 있다.
지난 16일에는 루마니아 영공에 진입한 드론을 나토군 소속의 스페인 공군 F-18 전투기가 격추했다. 루마니아 남동부 갈라치시(市) 북쪽 약 24㎞ 지점에서 인접국 몰도바 쪽에서 드론이 날아드는 게 포착됐다고 한다.
지난달(7월) 23일에는 동부 부저우주(州)의 파디나 인근 영공에서 드론 3기를 격추했는데, 앞서 5월에는 드론이 갈라치시의 한 아파트 건물에 추락해 2명이 다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와 육상에서 650㎞ 길이의 국경을 접하는 루마니아로서는 러-우크라 간 드론 전쟁의 여파를 피해갈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독일 정부는 이달 말 북부 플렌스부르크의 뮈르빅 해군사관학교에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과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유럽 국가들을 초청해 '드론 대응'을 위한 회의를 열 계획이다. 드론 위협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한 방어 전략을 조율하고, 주요 기반 시설에 대한 보호를 강화하는 방안을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6월 7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E3-우크라 정상회의 모습/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우크라이나가 참여하는 범유럽 방공망 구축 프로젝트도 구상 단계를 넘어섰다. '유럽판 패트리어트 방공체계'를 개발한다는 것.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지난 6월 9일 우크라이나가 영국·프랑스·독일과 손잡고 '유럽판 패트리어트 방공망' 체계를 개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7일 런던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한 E3(영국 프랑스 독일)-우크라이나 정상 회의에서 이 문제가 구체적으로 논의됐다는 것이다.
우크라 드론의 지하 생산 공장 탐방기를 실은 스카이 뉴스 8월 5일자/웹페이지 캡처
동시에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공습을 피해 드론 생산 시설을 지하로 옮긴 것으로 전해졌다.
영국 스카이 뉴스는 6일 "우크라이나는 비밀리에 지하 드론 생산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며 지하 시설 탐방기를 실었다. 스카이 뉴스는 "이들 시설 중 한 곳에서 하루에 200대 이상의 드론(FP1 장거리 드론 포함)을 생산하는 것을 확인했다"며 "우크라이나 전역에 이와 유사한 시설들이 많이 있다"고 전했다. 지하시설에는 기술자와 목수, 용접공, 조립공, 과학자들이 24시간 내내 쉬지 않고 일하고 있는데, 마치 '옛날식 군사 작전'을 연상시킨다고 했다.
생산시설을 지하로 옮긴 것은 러시아군의 정밀 폭격을 피하기 위해서다. 지난달(7월)에만 해도 우크라이나 군수 공장은 잇달아 러시아군의 공습을 받았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7월 말 "키예프 드론 공장이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파괴됐다"며 "이 회사는 미국 델라웨어주(州)에 등록된 미국 터미널 오토노미(Terminal Autonomy)사 소유"라고 보도했다. 이 공장은 러시아 영토 깊숙한 곳까지 공격할 수 있는 재밍 방지 유도 시스템을 갖춘 고정밀 드론을 생산해 왔다.
같은 달 19일에는 UKRTAC의 설립자 세베리온 당가제가 "러시아군의 미사일 공격으로 키예프 공장과 창고가 파괴됐다"고 확인했다. 이 회사는 우크라이나군에 납품하는 탄약과 전술 장비를 생산한다. 당시 러시아 국방부는 우크라이나의 군사 및 에너지 시설을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드론 공장의 지하화를 가장 먼저 알린 언론은 스페인 일간 엘 문도다. 엘 문도는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에 우크라이나 방산 업체들이 대거 파괴되면서 "키예프가 무기 생산 시설을 대거 지하로 이전했다"고 2024년 5월 보도했다. "일부 공장은 완전히 지하에 위치하고 있거나 거대한 구조물로 위장되어 있으며, 그 위치는 극비로 유지되고 있다"고 했다. 또 지하 공장들은 탄약과 각종 드론, 코작 장갑차, 넵튠 미사일, 스투그나 대전차 미사일을 생산하고 있으며, 2023년 가동 이후 생산량이 세 배로 늘었다고 소식통은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