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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만나 주시는 예수
창세기 14: 18~24
롯이 소돔에 옮겨가서 살게 된 지 얼마 있지 않아서 거기에 큰 전쟁이 일어나 여러 왕들이 소돔과 고모라를 습격해서 많은 재산과 왕들과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는데 롯과 그 가족도 전부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의 군대가 가서 겨우 빼앗아 왔습니다.
내려오는 말에 “좋을 때는 남이고 어려울 때는 친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아브라함과 롯이 헤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아브라함의 제안에 대해서 롯이 조금이라도 양보의 뜻을 보이기만 했어도 좋았었겠는데 롯은 조금도 양보의 뜻도 보이지 아니하고 고마워하는 빛도 없이 당연한 것처럼 소돔 들을 택해 갔었습니다.
나중에 롯의 가정이 이런 어려운 일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보통 사람 같으면 “그 녀석 얌체 같이 놀더니 잘 됐군. 그러게 사람이 그렇게 한면 안되는 거야. 천벌이지 천벌이야.” 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성의 소식을 듣자마자 그 조카 롯의 가정을 생각하게 되었고 롯의 가정이 포로가 되어 갔다는 말을 듣자마자 자기의 군대를 거느리고 사력을 다해서 구출해 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섭섭한 감정에 사로잡혀 인간의 도리를 하지 않는 옹졸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네 왕을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볼 때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 오는” 아브라함보다 위대한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저녁 우리는 아브라함의 경험을 통해서 몇 가지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1. 하나님의 사람도 전투에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투는 내적인 투쟁과 외적인 투쟁으로 되어 있습니다. 내적인 투쟁은 아직도 우리 마음 속에 남아 있는 무수한 육적인 부패와 관련되어 사탄의 시험과 우리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사악한 소욕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적인 투쟁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한 것”이라고 바울이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안팎에는 늘 전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와 사탄과 허물과 거짓과 싸움을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네 왕들은 모두 위대한 군주들이었습니다. 싸움에 능한 왕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군대는 고작 300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담대하게 여러 나라의 왕들이 수천명의 완전 무장한 군인들과 대항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전쟁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에게는 너무나 벅차게 절대 다수인 원수와 겨루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연약해서 무시당하기가 쉽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무시를 당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연약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승리를 기대합니다. 바울의 말대로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길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의 힘을 의지하거나 자기 자신의 화살을 의뢰하고 전투에 나선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믿음은 아브라함에게 계속적인 위안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의 생애 중에는 실패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의 정신은 단순하게 하나님만을 의지한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 안에서 전투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방법으로 전투하려 할 때는 패하고야 맙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으로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무기는 어린양 예수의 피입니다. 예수님과 가까이 사십시다. 그리하면 외부의 모든 적과 내부의 모든 원수를 이기는 정복자가 될 것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싸웁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냥 앉아 있으면서 “하나님이 롯을 구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그 종들을 눈동자처럼 지켜 주실 것을 믿습니다.”고 말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가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하고 최선을 다해 싸운 것입니다. 이것이 균형 잡힌 신앙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싸워야 합니다. 원수들의 힘이 아무리 놀랍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2. 우리가 마귀와 싸울 때 하나님을 뵐 수 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싸우고 있을 때 인자가 그들에게 나타났습니다.
멜기세덱의 모형으로 제시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악과 싸우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나타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지칠 대로 지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악과 대적하여 싸우느라 지쳐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이 계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멜기세덱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시련을 당할 때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보니 평강의 왕께서 돌아오고 있는 전사들을 만나셨습니다. 왜요? 아브라함은 승리하고 돌아오면서 교만해졌을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약하기 때문입니다. 70 제자들이 예수님께 돌아와서 기쁨에 넘친 보고를 했습니다. “주님,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조용하고도 겸손한 태도로 경계하며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이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기쁨의 비결은 그리스도인의 죄를 정복했거나 어떤 잘못을 정리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때 교만한 마음에 사로잡히기가 쉬운 것을 하나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육신의 가시’를 주시거나 그밖의 어떤 방법으로 제동을 거십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 7절 이하에 간증한 말씀을 들어보세요.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무슨 말이예요? 바울이 하나님께로부터 말할 수 없는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그냥 두면 사람이 약해서 감사한 마음보다 교만한 마음이 앞설 것 같아서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육신의 가시를 주셨다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사망으로 이끄는 가장 무서운 적은 교만인데, 이 교만을 치료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해가 뜨기 전에는 내 모습이 어떤지를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해가 뜨면 더러운 내 모습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그런 대로 괜찮은 줄 알고 양심적으로 산다고 자부했지만 그리스도를 뵙게 될 때 우리는 “부정하다,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를 뵈온 후에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욥의 간증을 들어보세요. 그가 갑자기 뜻하지 않았던 어려움이 겹치게 될 때 처음에는 믿음으로 잘 받아들였지만 어려움이 계속되자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나?” 하면서 자기를 죄의 값 때문에 당하는 것이 아니냐는 친구들의 말에 변명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 가서 욥기 42장 5-6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하나님을 뵈올 때 나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죄악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청년 이사야도 하나님의 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뵙게 될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하나님을 뵈었도다” 했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교만의 깃발을 내리고 겸손한 자리에 앉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왜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십니까? 우리에게 힘을 더해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여호수아가 아멜렉과 싸울 때 평지에 있던 그는 피곤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산에서 손을 들고 기도하던 모세는 피곤했습니다. 그것은 활동하는 것이 영적일수록 더욱 피곤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인 노동보다 정신적인 노동이 더 힘이 듭니다. 시험이 영적일수록 그 시험을 이기는 데 더 많은 힘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볼 때 새 힘을 얻게 되고 모든 세상적인 시험을 극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 우리 눈에는 세상의 찬란한 것이 안중에 들지도 아니합니다. 왜 아직도 세상 것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정도로 눈에 띄입니까?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해서 그럽니다.
예수님이 무슨 자격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까? 왕과 제사장으로 찾아오십니다. 현재 마귀와 싸우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리로다” 하는 것입니다. 불쌍한 영혼은 이렇게 외칩니다. “내가 사탄의 발에 잠시 밟히고 있으나 내 원수가 내 기쁨을 빼앗지 못하리라. 내가 비록 넘어지나 내가 다시 일어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다스리심이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패배한 것으로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만 그래도 하나님이 주관해 주신다는 사실이 위로가 됩니다. 교회가 넘어지고 우리의 깃발이 더러 진탕에 떨어지는 것을 볼 때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위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끝까지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높이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할 때 결국은 승리하는 것을 우리에게 믿게 합니다.
제가 말씀 드리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볼 수 없습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직접 만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직접 만나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는 것도 축복이요, 천사장 미가엘을 만나는 것도 큰 축복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자신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축복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나같은 사람도 만나 주실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만나 주신다고 저는 자신있게 답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며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대제사장과 왕되신 그리스도를 만나 왔기 때문에 우리 영혼이 말할 수 없이 위로를 받고 거룩한 기쁨으로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위해서 무슨 일을 했습니까? 18절 말씀에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자기의 살과 피를 제공해 주신 예수님의 하신 일을 간결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자정예배 때 성찬식을 거행하면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떡을 먹고 포도즙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적인 능력을 깨우치는 일인 것입니다. “너희가 내 살을 먹지 아니하고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교리가 제공하는 것 이상으로 풍성하게 영양을 공급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여기 우리와 같이 계시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가장 고상한 음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녀의 음식은 많은 규례와 교리들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성전의 귀한 기물이며 제복에 불과합니다. 오직 그리스도 자신만이 우리를 위해 육신이 되셨으며 우리는 우리 영혼 속으로 그분을 영접해 들여서 그로 인해 배불리 먹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기쁘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무슨 말을 했습니까? 먼저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다음에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라고 멜기세덱이 빌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하는 일에 축복이 임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힘주시지 아니하시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결국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천지의 주재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 주시면 우리의 하는 일이 축복을 받으며 우리의 말이 축복을 받게 되어 우리는 결국 하늘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축복 받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지금 이 축복을 하나님께 구하세요. “멜기세덱이여, 나를 축복해 주옵소서. 예수님, 지금 나를 축복해 주옵소서. 그래야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때 지쳐서 쓰러지지 않고 승리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천지의 주재되시는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이 된 우리를 하나도 잊지 아니하시고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시편 71편에 보면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를 찬송함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찬양해도 다 찬양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기도는 물론 성도들의 찬양까지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중재의 기도를 올리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향기의 그릇을 가지고 있을 뿐더러 우리 악기의 노래도 대신 드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와 찬양 이 모두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용납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했습니다.(히 13:15)
1.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2. 사랑하라 네 형제를 사랑하라 네 형제를
네 형제를 네 몸같이 다 사랑하라.
3. 감사하라 내 영혼아 감사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감사하라.
4. 기뻐하라 내 영혼아 기뻐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기뻐하라.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서 이 찬송을 합니다. 하루를 찬송하며, 사랑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크게 축복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수백 마디, 수천 마디의 말을 하는 것보다 예수님 입에서 나오는 단 한 마디의 말씀이 가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예수님을 만나셨다면 제가 표현하는 그것이 얼마나 서툰가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여러분이 직접으로 그리스도를 만나 뵙는 일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만나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이것 이상의 축복이 없습니다.
끝으로, 멜기세덱을 통해 축복 받는 아브라함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20절 하반절에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10분의 1일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했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의 자연적인 결과는 헌신입니다. 이 헌신은 자발적이면서도 필수적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주저하지 아니하고 멜기세덱에게 나아가 얻은 것의 10분의 1을 바쳤습니다. 이 행위는 아브라함이 “나의 모든 인격, 나의 모든 소유가 나의 위대한 주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참되다면 우리도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 바치게 만듭니다. 저는 우리 믿음의 식구들이 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가운데 십일조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무엇이나 주님께 바칠 때 그것이 내 자신의 소유였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뿐입니다. 바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바치지 않는 것뿐입니다.
말라기 3장에 보면 여기에 대한 분명한 말씀이 있으니까 자세히 읽어보시고 그대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차고 넘치도록 축복해 주실 줄을 믿습니다. 우리가 바치는 것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주님의 몫은 10분의 1이 되어야 합니다. 더구나 부유한 사람의 경우는 그렇습니다.
미국의 어느 신실한 기업인은 수입의 10분의 1로 자기가 살고 10분의 9는 하나님께 드리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강제가 아닙니다. 세금이 아닙니다. 규칙이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은혜 충만히 받으면 율법이 제시하는 것 이상으로 바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주님께 드릴 것이 정말 형편이 없고 보잘것 없구나!” 하는 말을 늘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얼굴을 들여다보시며 “나는 너를 위해 모든 일을 했는데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했느냐?”고 물으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마 우리는 “주님이 모든 것은 사실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 뜻대로 쓰시옵소서.”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가령,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어떨까요? “만일 너희가 내게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면 나도 너희에게서 아무것도 취하지 아니하겠다.” 여러분,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리가 주님의 넓으신 사랑으로 굉장한 소원을 이루려고 한다면 우리의 영혼과 몸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바치는 번제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 앞에서 행했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 앞에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치십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