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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사망국적
1904. 4. 4, 경북 안동 |
1944. 1. 16, 중국 베이징[北京] |
한국 |
요약 일제 강점기에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서 강렬한 민족의식을 갖추고 있던 이육사는 일찍부터 각종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여 항일투쟁의 불꽃을 피웠고, 생애 후반에는 총칼 대신 문학으로 일제에 저항했던 애국지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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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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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저항시인 이육사는 평생 치열한 민족정신으로 독립운동에 매진했고, 잦은 옥고로 인해 몸이 쇠약해진 뒤에는 총칼 대신 날카로운 펜을 휘둘러 일제와 싸웠던 항일투사였다.
이육사의 시 〈광야〉에는 대한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염원하는 시어로 가득 차 있다. 1945년 12월 17일자 자유신문에 발표된 이 시에 대하여 평론가 김용직은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가운데 유례가 없을 정도로 든든한 구조를 가진 작품”이라고 찬탄하고 있다.
이외에도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청포도〉, 〈절정〉, 〈황혼〉 등에는 암울한 식민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지식인의 고통스런 현실과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투철한 의지가 절절하게 그려져 있다.
퇴계 이황의 후손, 저항의 깃발을 치켜들다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에서 아버지 이가호와 어머니 허길의 6형제 가운데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호적에 기록된 이름은 원록(源祿), 두 번째 이름은 원삼(源三)이었고 훗날 활(活)로 개명했다. 자(字)는 태경(台卿), 본관은 진성(眞城)으로 퇴계 이황의 14대 손이다. 그는 어린 시절 보문의숙(寶文義塾)이라는 신식학교를 운영했던 할아버지 이중직으로부터 전통 한학을 배웠다.
일제강점기 최고의 저항시인 이육사를 키워낸 안동 지방은 1894년 갑오의병을 창의하여 독립운동의 첫 장을 연 지방으로 친일행위나 태도를 인정하지 않은 기풍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처럼 엄중한 분위기 속에서 일제의 압력에 결코 굴하지 않는 강렬한 민족정신이 자라났을 것이다.
12세 때인 1915년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가세가 기울어지자 이육사의 가족들은 안동군 녹전면 신평동 듬벌이로 이사했다. 그러다 재차 대구로 이사한 뒤 이육사는 서화가로 명성을 떨치던 서병오에게 그림을 배웠다.
17세 때인 1921년, 이육사는 영천 출신 안용락의 딸 안일양과 결혼한 다음 처가에서 가까운 백학학원에서 1년 동안 공부했는데, 바로 이때 원삼이란 이름을 사용했다. 1923년부터 9개월 동안 백학학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23년, 이육사는 19세의 나이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경찰 기록에 따르면 당시 그는 도쿄쇼오소쿠(東京正則)예비학교, 니혼(日本)대학 전문부 등에서 공부했다. 하지만 검찰신문조서에는 이와 달리 킨죠우(錦城)고등예비학교에 1년간 재학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25년 귀국한 이육사는 대구 조양회관에서 주최한 신문화 강좌에 참여했다. 조양회관은 1922년 독립운동가 서상일이 민족계몽운동을 위해 세운 교육회관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만난 동지 이정기, 조재만 등과 함께 수시로 중국을 드나들며 독립운동을 모색했다. 1926년 7월에는 베이징에 있는 중국(中國)대학 상과에 입학하여 7개월 동안 공부했다.
장진홍사건과 대구격문사건에 휘말리다
1927년 10월 18일,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신문지에 싸인 커다란 선물상자가 배달되었다. 은행 직원이 수상하게 여기고 길거리에 내놓자마자 그 안에 담겨있던 폭탄이 굉음을 울리면서 폭발하면서 경찰 4명을 포함하여 도합 6명이 부상을 당했다. 깜짝 놀란 대구경찰서 순사들이 범인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아무런 단서도 잡을 수 없었다. 수사가 미궁에 빠지자 다급해진 경찰은 대구에서 활동하던 애국지사들을 무차별로 잡아들인 다음 야만적인 고문을 가하며 자백을 강요했다.
이때 이육사는 형 이원기와 동생 원일, 원조와 함께 경찰서에 끌려가 갖은 곤욕을 치렀다. 평생 17차례에 걸친 체포와 투옥의 시발점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지 1년 4개월이 지난 1929년 2월 14일, 일본 오사카에서 진범 장진홍이 체포되면서 이육사의 형제들은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경찰은 그해 12월이 되어서야 그들을 석방했다. 한편 장진홍은 사형을 선고받자 이듬해인 1930년 7월 31일 자결함으로써 비장한 최후를 맞았다.
1929년 11월부터 시작된 광주학생의거가 확산되면서 1930년 1월 중순 대구에서도 동맹휴학사태가 벌어졌다. 아울러 대구 일대에 일제를 성토하는 격문이 휘날렸다. 그러자 경찰은 예비검속 차원에서 대구청년동맹 간부였던 이육사를 체포했다가 19일에 풀어주었다. 그해 2월에는 중외일보 대구지사 기자로 임용되었지만 3월에 또 다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그해 8월 조선일보사 대구지국으로 직장을 옮긴 그는 10월에 잡지 《별건곤》에 ‘대구이육사’란 필명으로 ‘대구사회단체개관’이란 글을 발표했다. 1931년 1월 3일에는 조선일보에 ‘이활’이라는 본명으로 첫 시 〈말〉을 발표했다. 그 뒤에도 대구격문사건을 빌미로 체포되어 두 달 동안 수감되었다가 풀려나는 등 시련이 거듭되었다.
아호 ‘육사(陸史)’에 얽힌 사연
이육사는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의 죄수번호 264번을 빌려 ‘대구이육사(大邱二六四)’라는 호를 썼다. 그러다 반드시 일제의 식민지가 된 조선의 불행한 역사를 뒤엎겠다는 의지로 ‘죽일 육(戮)’, ‘역사 사(史)’를 사용한 ‘육사(戮史)’로 바꾸었다. 도중에 ‘고기 육(肉)’, ‘설사할 사(瀉)’의 ‘육사(肉瀉)’를 쓰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안 어른 이영우가 ‘육사(戮史)’란 호는 너무 노골적이라 일제의 눈총을 받을 수 있으니 무난하게 평평한 산꼭대기를 뜻하는 ‘육(陸)’ 자로 바꾸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자 그 조언을 받아들여 ‘육사(陸史)’라는 호를 사용했다.
의열단의 군사간부교육을 받다
1932년 3월, 조선일보사에서 나온 이육사는 만주의 펑톈을 거쳐 베이징에 갔을 때 밀양 출신으로 김원봉과 함께 의열단을 설립했던 애국지사 윤세주를 만났다. 그의 권유에 따라 이육사는 10월 20일 난징 근교 탕산에 의열단이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입교했다.
장제스(蔣介石)의 후원으로 설립된 이 학교의 정식 명칭은 ‘중국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제6대’였다. 학생들은 재학 중 중국 국민군 보통병사 상위의 신분으로 견습사관 대우를 받았고, 졸업한 뒤에는 소위로 임관하게 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그들은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교양과목과 군사학을 교육받았다. 교양과목은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철학 등이고 군사학은 통신법, 선전법, 연락법 등을 비롯하여 탄약, 폭탄, 도화선, 뇌관 등 제조법, 폭탄 투척법, 피신법, 변장법, 서류은닉법, 삐라살포법, 암살법, 무기운반법, 철로폭파법, 열차운전법 등 다양했다. 교관은 한모, 왕현지, 김정우, 김원봉 등 중국인과 한국인이 뒤섞여 있었다.
1933년 4월 23일, 거행된 제1회 졸업식에는 교장 김원봉과, 남경중국일보 사장인 캉저(康澤)와 비밀공작법을 가르친 시에중용(協中庸) 등이 참석했다. 그때 이육사는 식후공연으로 준비한 연극 〈지하실〉의 대본을 쓰고 직접 연기자로 출연했다. 졸업식이 끝난 뒤에는 국내 노동자 농민에 대한 혁명의식 고취와 2기생 모집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육사는 그 후 베이징에 있는 북경대학 사회학과에 들어가 학업을 계속하는 한편 국내에서 발간된 《대중》 창간 임시호에 평문 〈자연과학과 유물변증법〉을 게재했다. 같은 책 ‘게재되지 못한 글 목록’에는 ‘이육사(李戮史)’의 〈레닌주의철학의 임무〉가 담겨있다.
러시아혁명의 성공과 함께 전 세계로 파급된 사회주의 사상에 깊이 빠져있었음을 알 수 있다. 5월에는 상하이에서 중국의 대문호 루쉰(魯迅)과 만나 교유했다.
총칼 대신 펜으로 일제와 맞서다
1933년 7월 국내에 잠입하여 은밀하게 항일활동을 펼치던 이육사는 9월에 ‘육사(陸史)’라는 필명으로는 처음으로 잡지 《신조선》에 시 〈황혼〉을 발표했다. 그런데 1934년 3월, 그가 군사간부학교 출신임이 밝혀지면서 경기도경찰부 형사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면서 작성된 신원카드에 따르면 신분은 상민이었고, 신장은 약 165cm였다.
경찰은 이육사가 만주로 사라진 2년 전부터 요주의 인물로 지목하고 전국에 수배령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중국에서의 행적에 대하여 비밀을 지킨 결과 석 달 뒤인 6월 23일 기소유예 의견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
그해 7월, 안동경찰서에서 작성한 이육사 감시보고서를 보면 석방 이후에도 경찰로부터 철저하게 감시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배일사상, 민족자결, 항상 조선의 독립을 몽상하고 암암리에 주의의 선전을 할 염려가 있음. 민족공산주의로 전화하고 있는 것으로 본인의 성질로 보아서 개전의 정을 인정하기 어려움.'
본격적으로 문학의 길을 걷다
1935년부터 이육사는 정인보가 주도하는 신조선사에서 일하면서 《신조선》에 7편의 시를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시인의 길을 걸었다. 이후 그는 중외일보사, 조광사, 인문사 등지로 일터를 옮겨 다니며 한시와 시조, 논문, 평론, 번역, 시나리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이 시기에 루쉰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기도 했다.
1936년 8월 4일, 이육사는 요양 차 머물고 있던 경주의 옥룡사에서 쓴 시조 두 수를 시인 신석초에게 보냈다. 이 작품들은 평시조의 자수율을 엄격하게 지킨 전형적인 시조로서 그의 문학적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뵈올까 바란 마음 그 마음 지난 바램.
하루가 열흘같이 기약도 아득해라.
바라다 지친 이 넋을 잠재울까 하노라.
1937년에는 신석초, 윤곤강, 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을 발간하고 대표작 〈청포도〉, 〈교목〉, 〈파초〉 등 상징적이고 서정성이 풍부한 시를 발표했다. 이어서 《조광》, 《풍림》, 《문장선》, 《인문평론》 등의 지면을 통해 1941년까지 〈절정〉, 〈광인의 태양〉 등 수많은 작품을 게재했다. 정한모 교수는 《나라사랑》 16집에 실린 〈육사시의 특질과 시사적 의의〉에서 그를 이렇게 상찬했다.
'그에 의하면 시는 행동이며 진정한 의미의 참여라고 한다. 그는 식민지적 압력에 대항하고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하여 대륙을 전전하며 숱한 고난과 역경을 체험하였다. 이러한 역경과 인고의 극복노력은 기다림의 철학과 초인 의지로 승화된다. 온 몸을 내던진 헌신적 투쟁의 수형(受刑)의식으로 일제에 저항하여, 그러한 인고와 생명의 절정에서 끝없는 기다림과 초인에 대한 열망을 시로써 형상화함으로써 보다 진정한 저항 방식을 보여 준 것이다.'
베이징의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하다
1941년 2월, 이육사는 37세의 늦은 나이에 딸을 얻었다. 그는 기쁨 속에서도 경계하는 심정으로 딸의 이름을 ‘기름지지 말라.’는 뜻의 ‘옥비(沃非)’로 지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 했던가. 그해 4월에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겪었고, 가을에는 심해진 폐질환 때문에 성모병원에서 병마와 싸워야 했다. 모두가 잦은 투옥과 고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43년부터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일제는 한국인을 방패막이로 삼기 위해 내선일체를 표방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등 조선인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당시 일제가 일본어를 강요하고 한글 사용을 금지하자 분개한 이육사는 문예지에 한시(漢詩)만 발표하는 결기를 보였다.
그해 4월, 그는 충칭과 옌안에 가서 무기를 들여와 일제와 싸우고자 했다. 하지만 7월 초순 어머니와 형의 소상을 치르러 일시 귀국했다가 동대문경찰서 형사들에게 체포되었다. 며칠 후 베이징으로 압송된 그는 현지의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갖은 고문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의열단 단원이자 친척이었던 이병희가 수습하여 화장했고, 연락을 받은 동생 이원창이 유골을 서울로 가져와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1960년에 그의 유해는 고향 원촌의 뒷산으로 이장되었다.
이육사는 일제 강점기 활동했던 수많은 문인들 가운데 끝까지 가장 진취적이고 적극적으로 일제에 저항했던 애국지사의 표상이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
해방 후인 1946년 동생 이원조에 의해 유고집 《육사시집》 초간본이 서울출판사에서 발간되어 그의 작품 20여 편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서문은 신석초, 김광균, 오장환, 이용악이 썼다. 같은 해 조카 이동영에 의해 재범조사에서 간행된 《육사시집》 재간본에는 초간본에 2편을 더한 22편의 시가 소개되었다. 서문은 청마 유치환이 썼다.
이념으로 찢겨진 이육사의 형제들
이육사의 6형제는 모두 재주가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우애도 몹시 깊었다. 하지만 그들은 일제 강점기에 갖은 고통을 당했고, 해방 후에는 이념에 따라 남북으로 찢겨졌다. 《월간조선》 2015년 1월호, 김태완 기자의 ‘이육사의 딸 이옥비 여사 인터뷰’ 기사를 바탕으로 그들의 운명을 간략하게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원기는 이육사를 비롯한 3명의 동생과 함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의 범인으로 검거된 뒤 대구형무소에서 가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불구의 몸이 되어 신음하다가 1942년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는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셋째 이원일은 위당 정인보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스승으로부터 ‘장안 3재의 1인’으로 손꼽힐 정도로 수재였다. 일찍이 서화가로 이름을 날렸지만 남로당 활동을 하다 월북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조선노동당 재산 담당 직책으로 남한에 내려왔지만 고향인 안동까지 내려가지는 못했다. 그의 아들 이동선은 아버지를 찾으러 홀로 월북했다가 현지에 정착했는데, 김일성대학을 졸업한 뒤 평양시장을 역임했다.
넷째 이원조는 일제 강점기에 호세이(法政)대학 불문과를 졸업한 뒤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일했다. 문학평론가로서 예리한 필봉을 휘둘렀으므로 당대의 내로라하는 문인들도 두려워했을 정도였다. 그는 1928년, 1929년 연속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소설이 당선될 정도로 문재가 출중했다. 해방 후 좌파 문학단체인 문학가동맹에 가입한 뒤 임화, 김남천, 설정식과 함께 활동하다가 1946년 박헌영을 따라 월북했다.
다섯째 이원창은 1940년까지 조선일보 인천지국 주재기자로 일했고, 해방 후에는 인천신문 창간에 간여하여 사회부장을 지냈다. 진보당 당수 조봉암의 비서로 근무하다 요시찰인물이 되었는데, 한국전쟁 때 셋째 형 이원일을 만나러 북으로 갔다가 폭격으로 사망했다.
막내 이원홍도 문재가 뛰어나 형제들이 문학을 권유했지만 미술을 택했다. 그는 19세 때 첫 출품한 전국미술대회에 입선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축하파티 도중 심장마비로 요절했다.
이처럼 이육사의 형제들은 해방 전후에 언론계와 문화예술계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지만 남북 분단의 희생양이 되면서 오늘날 저항시인으로 굳건하게 자리매김한 이육사처럼 뚜렷한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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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글
1963년 충남 태안 출신. 시인, 작가. 대한민국항공회 자문위원, 복잡하고 난해한 고전과 역사기록을 알기 쉽게 해석함으로써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역사 교양서를 쓰고 있다. 아울러 조선시대 역..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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