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은 처음의 종교적 신념과 달리, 후반에는 탐욕과 이권과 권력의 화신으로 변질되었다.
십자군 전쟁으로 가장 이득을 본 것은, 유럽 최대의 도시였던 베네치아 였다. 베네치아는 십자군 전쟁으로 동서 무역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395년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자, 로마는 그의 두 아들에 의해 동·서 로마로 나누어졌다.
그 당시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 족과 훈 족의 계속되는 위협과 중소 자영 농민층의 몰락 등으로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결국 서로마 제국은 476년에 게르만 용병 대장 오토아케르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동서 교회 지배자들의 갈등이 벌어졌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는 비잔틴 교회의 우두머리를 겸하고 있었다.
726년 레오 황제는 예수와 성인들의 형상이나 조각상을 우상으로 생각하여 성상 숭배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로마 교황은 이에 반대하였다. 이 일로 동로마 교회와 서로마 교회가 대립하다가, 1054년에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과 동유럽의 그리스 정교로 나누어졌다
그동안 황제들 때문에 권력자로서의 힘이 약해진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1095년 11월,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종교 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그가 이교도들로부터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자고 주장하자, 서방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했다. 결국 대규모의 다국적 군대가 결성되어 예루살렘으로 출발했다.
이때 참가한 기사들이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기 때문에 이들을 ‘십자군’ 이라 부른다.
제7차 십자군 전쟁(1270~1272년)은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주도했다.
이때 루이 9세는 이슬람 군과 싸우다 크게 패하여 포로로 붙잡혔다. 결국 엄청난 몸값을 내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루이 9세는 추락한 자신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다시 전쟁에 나섰다. 그는 튀니지로 원정하여 시리아까지 진출했지만 병으로 갑자기 죽는 바람에, 결국 제7차 원정도 무산되고 말았다.
1291년 팔레스타인에 마지막 남은 기독교인들의 도시 아콘이 이집트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면서 200여 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십자군 전쟁은 중세 서양사를 대표하는 커다란 사건으로 유럽의 마녀 사냥과 함께 치욕스런 일이었다.
드디어 제2의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고 있다.
이스라엘과 미국 유럽 각국 대 팔레스타인 그리고 중동 주변국들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
중세 유럽의 역사를 암흑 속으로 몰아놓은 십자군 전쟁이 바야흐로 현대사를 망가뜨리고 있다.
제국주의 막바지에 중동의 석유가 제2 의 십자군 전쟁의 시작을 제공했다.
마지막 제국주의 국가, 미국과 영국은 중동의 석유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중동국가를 마음대로 요리하였다.
그것의 결과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은 제2의 십자군 전쟁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