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56
5월13일[부활 제7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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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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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ssvClqxoq28
[서울대교구 유한동 크리스토퍼(시흥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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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큰일 났습니다. 저는 오늘 하루 동안 15분이나 주님을 생각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오늘은 돈보스코와 함께 소녀들을 위한 살레시오 수녀회를 공동 창립하신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 성녀의 축일입니다.
사는 게 너무 바빠 하루 단 15분도 주님을 생각하지 못하고 지내는 날이 수두룩한데, 마자렐로는 이런 말씀을 남기셨더군요.
“큰일 났습니다. 오늘 저는 하루 동안 15분이나 주님을 생각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마자렐로의 말씀에 얼마나 부끄럽던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하루 한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마자렐로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단순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매일의 의무에 충실했습니다. 예삿일을 예사롭지 않게, 평범함 속에서 비범함을 찾는 자신만의 독특한 성화의 길을 개척해나간 것입니다.
토리노에서 버스로 두 시간을 가야 나오는 모르네제의 시골 소녀 마자렐로는 뜨거운 열정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그녀는 모르네제 본당 사제였던 페스타리노 신부의 지도하에 또래 동정녀들과 의기투합해서 복음 선포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마자렐로는 돈 보스코 못지않게 모르네제 소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녀의 순수한 열정에 큰 박수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녀는 미래에 대해 뚜렷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자렐로는 한 위대한 인물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돈 보스코가 오라토리오 청소년들과 함께 모르네제로 소풍을 온 것입니다. 그때 그녀는 그와의 첫 대면을 통해 즉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저분은 성인이시다! 안심하고 우리의 미래를 맡겨도 될 분이다!”
내면 가득히 신뢰로 가득 찬 마자렐로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그와 한배를 타게 됩니다. 그의 제안에 따라 즉시 갈 곳 없는 소녀들을 위한 집을 마련했습니다. 그들의 미래를 위해 학교를 짓습니다. 오라토리오를 열어 소녀들을 기쁨과 행복의 도가니로 빠져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살레시오 수녀회는 살레시오회와 더불어 신속하게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1872년 살레시오 수녀회가 창설되고 마자렐로는 초대 총장에 임명됩니다.
하느님의 방식을 늘 이런 식인 것 같습니다. 나자렛 산골의 겸손한 처녀 마리아를 하늘의 모후요, 전 인류의 어머니로 들어 높이셨듯이, 모르네제 산골의 겸손한 처녀 마자렐로를 같은 방식으로 성덕의 정상에로 높이 들어 올리신 것입니다.
소녀시절 마자렐로의 강렬한 성체 신심은 정말이지 놀랄 만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머물고 있던 발포나스카 농장에서 마자렐로 본당까지는 지방도를 따라가면 한 시간 남짓, 우거진 잡풀 사이로 난 지름길을 이용하면 30분쯤 걸리는 거리에 있었습니다.
마자렐로는 성체를 모셔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매일 새벽, 별이 총총한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그 길을 오갔습니다. 본당에 도착해보면 성당 문이 닫혀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성당 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습니다.
막중한 임무의 봉사직을 수행하던 마자렐로가 가장 듣기 싫어했던 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장상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겸손했습니다. “원장 수녀님!” 하고 동료 수녀들이 자신을 부를 때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원장 수녀가 아니라 부원장 수녀입니다. 우리의 원장은 성모님이십니다.”
이렇게 그녀는 언제나 성모님을 수녀회 장상으로 여겼습니다. 그 표시로 저녁마다 수녀원 대문 열쇠를 성모님의 발치 앞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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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HZQgDiiX8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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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사랑은 하나다>
예전에 보험에 들지 않아서 저를 이상해하던 보험회사 직원이 생각납니다. 사제는 보험을 들지 않는다기보다는 더 높은 차원의 보험이 있기 때문에 이 지상에서 걱정할 것이 그만큼 줄어듭니다. 사실 하느님도 보호하시지만, 교구에서 아프거나 은퇴하면 다 책임져주니 그런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교구에서 하는 이유는 사목에 집중하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이런 면에서 걱정이 없는 마음의 평화가 이웃 사랑의 바탕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교구에 사제로 속하지 않았다면 세상의 수많은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더 좋은 보험을 찾아다녔을 것입니다. 따라서 더 높은 평화의 차원으로 올라가려면 그만큼 나를 책임져줄 존재에 속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존재는 이 세상 모든 근심걱정을 초월하는 존재여야 합니다. 평화를 찾는 이는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을 만나면 사랑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예수님도 결국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시기 위해 먼저 아버지께 속하셔야 했습니다. 그 평화가 우리를 위해 죽으실 용기를 드릴 수 있습니다. 평화방송에서 방영한 서울교구 정순택 대주교의 성소에 관한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정 대주교는 서울대 공대에 다니는 인재였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어린이처럼 되지 못해서 마음의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런 자신도 주님께서 사랑하실 수 있느냐는 질문에 어떤 부제님이 구들장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다 사랑받는 것처럼 천천히 갈지라도 하느님께서 다 사랑해 주신다는 말을 듣고는 주님께 자신을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만약 그 부제님이 평화롭지 못한 상태였다면 혼란에 빠진 대학생을 평화의 길로 인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내 마음의 평화가 곧 사랑이 됩니다.
갈멜회에 들어가 선배 수사와 마음의 갈등이 생길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수사는 정순택 수사가 좀 둔하게 보였는지 자꾸 정둔택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하도 화가 나서 들고 일어서려는 찰라 마음에서 이런 목소리를 듣습니다. “저 형제도 내가 사랑하는 형제다!”
그러자 갑자기 마음에 평화가 오고 그렇게도 화가 났던 자신의 별명을 듣고도 껄껄껄 웃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자신의 힘이 아니라 나에게 말씀해 주신 분께 자신도 모르게 빨려 들어갔고 그분의 감정에 스며들었기 때문입니다.
두 딸을 잃고 우울해하던 아빠가 막내아들의 장난감 배를 만들어주는 세 시간 동안에는 오랜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루에 할 일들의 목록을 정하고 그것을 해내다 보니 우울할 틈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지상에 살면 아이를 잃은 기억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위해 일하다 보니 평화를 찾았습니다. 이는 사랑에 몰입하니까 평화를 얻는 경우입니다.
평화를 얻어서 사랑을 하나, 사랑하니까 평화를 얻으나 같습니다. 둘 다 하늘 나라에 속하게 됩니다. 우울증을 앓다가 마더 데레사를 따라 캘커타에 와서 봉사를 하던 중 자신도 모르게 우울증에서
사라진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큰 사랑이 있는 자에게 속하면 더 높은 수준의 공동체에 머물게 되고 그 높은 수준의 공동체에는 평화가 넘칩니다. 사랑과 평화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짐승들보다는 인간이 더 사랑할 줄 압니다. 그래서 인간이 더 평화롭습니다. 만물의 영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사랑할수록 더 능력이 있어서 더 안전하고 더 평화롭습니다.
세상이 불안해지는 이유는 사람들 사랑의 수준이 짐승 수준으로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평화와 사랑은 하나입니다. 둘 다 하느님께 속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말합니다. “저는 하느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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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91년에 운전을 배웠습니다. 어느덧 33년이 지났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차는 ‘신발’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공간 감각이 부족한 편이라서 길 찾는 것이 늘 숙제였습니다. 눈앞에 목적지가 있는데도 빙글빙글 돌기도 했습니다. 그런 제게 큰 도움을 주는 것이 있었는데 ‘지도’입니다. 목적지가 있으면 지도를 몇 번이고 보고 또 보았습니다. 멀리 휴가를 갈 때면 지도를 길게 이어서 다녔습니다. 지도를 보면서 다니지만 길이 바뀌기도 하고, 새로운 건물이 생기기도 하기에 가끔 헤매기도 했습니다. 그런 제게 ‘희소식’이 생겼습니다. 내비게이션입니다. 이것은 신통하게도 길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저처럼 ‘길치’인 사람들에게는 고마운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생겼습니다. “어머니의 말, 아내의 말, 내비게이션의 말을 잘 들으면 삶이 편하다.” 내비게이션은 다양한 기능으로 운전자를 도와줍니다. 교통감시 카메라가 있는 곳도 알려주고, 속도제한도 알려주고, 교통상황도 알려주고, 빠른 길도 알려줍니다. 길을 놓치면 새롭게 길 안내를 해 줍니다. 내비게이션이 나오면서 이제는 차에 지도를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에도 ‘업그레이드’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신앙인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첫째, ‘감사’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감사할 줄 모릅니다.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자기 능력, 자신의 재능, 자신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 잘 사는 것도, 지금 건강한 것도, 지금 높은 직책에 있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런가 하면 당연하게 여기던 것을 상실하면 이웃을 탓하거나, 원망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주어진 모든 걸 감사하면서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정성 어린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성체성사는 ‘감사’의 마음이 가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체성사의 중심에는 ‘감사’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항상 감사하십시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둘째, ‘유혹’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습니다. 사제복을 입었어도, 수도복을 입었어도,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었어도 유혹은 바람처럼 소리 없이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도 3가지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유혹입니다. 높은 데서 뛰어내려 보라는 유혹입니다. 권력을 주겠다는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극복하셨습니다. 악의 세력은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다음에 하지’라는 유혹입니다. ‘남들도 다 그러는데’라는 유혹입니다. ‘나는 안 돼’라는 유혹입니다. 게으름과 자기 합리화 그리고 열등감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유혹은 공든 탑을 무너지게 하고, 다 된 밥에 재를 뿌리게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주님 안에 편히 쉬기까지 내 마음은 언제나 불안합니다.” 성덕이 깊어도, 오랜 수양을 했어도 유혹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셋째 ‘고단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전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슬퍼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황금보다 훨씬 더 귀한 여러분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 순수한 것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하느님의 큰 영광을 위해서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야 합니다.
“바오로가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시어, 그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하였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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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6,29-33: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이로써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30절) 한 것이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31절) 그들은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았으며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못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제자들이 스승님께서 잡혀가시자 행동으로 그분을 버렸다. 제자들은 혼란에 빠졌고, 절망에 빠져 자기들의 믿음이 죽게 했다. 이렇게 그들은 그분을 떠나고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32절)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33절) 제자들은 총독들과 임금들 앞으로 끌려가 온갖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잘못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그분의 이름 때문에 그렇게 된다고 하신다.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고백은 언제나 지배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어도 사악한 범죄자를 대하듯 그들에게 온갖 형벌과 고문을 가한다. 그 상황에서도 순교자들은 언제나 평화를 누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후에는 제자들이 그분 안에 머물며 평화를 누리게 된다. 그들은 환난을 받으면서도 그분을 버리지 않았다. 이 고을 저 고을로 피해 다녔지만, 결코 그분을 배반하지 않았다. 박해를 당하지만, 그분에게서 달아나는 도망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을 피난처로 삼고 그분 안에서 평화를 누렸다. 이 평화는 끝이 없을 것이고 모든 선행과 선의는 이 평화를 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33절) 하신 덕분에 우리는 놀라운 평화를 누리며 용기를 갖는다. 그분은 참으로 세상을 이기셨다. 그래서 우리는 살게 되었다. 우리가 말씀을 모른다는 것은 두려움 때문에 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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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어제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낸 우리는 이제 성령 강림 대축일이라는 매우 역동적이고 강렬한 시간으로 들어갑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은 “세상을 이겼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승천 사건은 부활의 완성임을 선언합니다. 곧 부활은 죽음을 극복한 사건일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악과 한계, 어둠에 대하여 ‘승리’를 거둔 사건임을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활의 완성은 승천뿐만 아니라 성령의 활동을 통해서도 계속 이어집니다.
독서에서 바오로는 에페소의 신자들에게 “여러분이 믿게 되었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받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있다는 말조차 듣지 못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한 그들은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도 받습니다. 성령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한다는 에페소 신자들의 고백은 어쩌면 우리에게도 해당될 수 있습니다. 성령과 그 역할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신앙생활을 이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강림의 준비는 단순히 이 천 년 전 예루살렘의 이 층 방에서 있었던 사건을 기념하는 데에만 집중하여서는 안 되고, 그 은총이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이루어지는지에 집중하여야 합니다.
불의와 부패, 기만과 폭력에 상처받고 무뎌 가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러한 ‘세상의 악을 이기셨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 부활의 승리가 성령의 활동으로 날마다 우리 주변에서 이루어진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승리가 “있다는 말조차 듣지 못한” 듯 늘 두려움과 불안을 붙잡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돌아봅시다.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것을 이기신 분, 바로 그 하느님의 힘을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시는 성령의 강림을 준비하는 벅찬 시간이 오늘부터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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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세상을 이겼다.>
“그러자 제자들이 말하였다. ‘이제는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시고 비유는 말씀하지 않으시는군요. 저희는 스승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누가 스승님께 물을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이로써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29-33)
1) 30절의 “이제 알았습니다.”라는 말을 겉으로만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을 드디어 알아듣고 이해하고 믿게 된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이 아니라, 제자들은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알아들은 척 했거나, 아니면 이해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믿습니다.”라는 말도, 정말로 믿어서 믿음을 고백한 말이 아니라,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상태에서, 또는 믿는다고 착각하는 상태에서, 자신들의 생각을 나타낸 말입니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라는 예수님 말씀은, 제자들의 믿음을 인정할 수 없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앞의 13장을 보면, 베드로 사도가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라고 말하자(요한 13,37),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3,38) 지금 여기서 오고가는 대화도 같은 상황입니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라는 말씀은, “지금 너희는 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수난의 시간이 되면 너희는 나를 버려두고 흩어질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아니, 이미 왔다.”라는 말씀은, “이제 곧” 수난과 죽음의 시간이 시작된다는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2)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려두고 흩어지더라도 아버지께서는 변함없이 예수님과 함께 계신다는 뜻이고, 당신의 수난과 죽음은 힘이 없어서 당하시는 일이 아니라, 당신이 스스로 목숨을 내주시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제자들한테도 버림받고 하느님한테도 버림받아서 철저하게 혼자서 고독하게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것이 아니고,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에 의한 일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설명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라고 부르짖으신 일은 무엇인가?” 이 말씀은 시편 22편 2절인데, 시편 22편 전체를 읽어보면, 하느님한테 버림받은 절망을 말하는 시편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시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시편 22편 2절을 인용하신 것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그리고 하느님을 원망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양하신 것으로 해석합니다.>
3)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이 말’은, 앞의 15장의 말씀들과 지금 16장에 있는 말씀들을 가리킵니다.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내 안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부활도 말씀하셨고, 이별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다시 만나게 된다는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그런데 실제 상황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들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고, 또 부활에 관한 말씀들은 잊어버렸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에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습니다. <일의 결과를 알고 있더라도 그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우면 누구든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4)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겪게 될 박해를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모든 고난이 끝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신앙인들이) 걸어가야 할 십자가의 길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라는 말씀은, 고난을 겪더라도 흔들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부활을 예고하신 말씀인데, 인류 구원 사업은 당신이 승리하는 것으로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결과인 ‘부활’을 향해서 가신 일입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미 정해져 있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무조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조건은 ‘믿음과 회개’입니다. 믿고 회개하는 것은 승리와 영광 쪽을 선택하는 지혜로운 일입니다. 반대로,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것은 패배 쪽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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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교구 김동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허약한 믿음을 어루만져주시고 제자들이 신앙을 고백합니다.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고백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허약한 믿음을 꿰뚫어보십니다.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하시면서 도리어 허약한 믿음을 어루만져주시고 격려해주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나약한 신앙을 지닌 제자들이 예수님의 위로와 격려로 힘을 얻는 모습입니다.
제자들은 굳센 신앙을 바라지만 아직까지는 입 안에서 맴돌고 마는 신앙입니다. 바라는 대로 뜨거운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안에서 신앙을 궁글려야 합니다.
입으로는 고백하면서도 가슴으로는 도망치고 발로는 돌아서는 시간을 지나야 합니다. 비겁하고 배신한 적이 있는 신앙일수록 자신의 초라함을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초라함은 오히려 그분께서 베푸시는 자비 앞에 나아가 무릎 꿇어 입 맞추게 합니다 (루카 15,11-3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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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님]
요한 복음은 공관 복음과는 달리 최후의 만찬 뒤 제자들에게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긴 담화를 전합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가르침, 그분께서 남기신 유일한 계명, 성령에 대한 약속 등입니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예수님의 이 말씀들에 제자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16,18) 하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제자들의 반응이 사뭇 다르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무지와 불신이 아니라, 예수님에 관한 믿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믿음을 고백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비정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입으로 고백하고 있는 제자들조차 결국에는 그분을 버리고 각자의 길로 떠나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입으로 고백하는 믿음은 결국 헛된 것임을, 그저 마음만 가지고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모습도 오늘 복음 속 제자들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믿는다고, 사랑한다고, 그래서 자신의 삶을 바치겠다고 다짐하지만,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을 까맣게 잊은 채 자신만의 길을 가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처지와 나약함을 익히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위로의 말도 함께 건네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세상과 맞설지 모르지만, 그 세상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기신 분을 우리가 따르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부족하지만, 그래서 너무도 자주 무너져 내리는 우리이지만, 그런 우리에게 용기와 힘을 주시는 하느님의 손길 안에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외치게 될 날이 분명히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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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16,33)
예수님의 오늘 말씀은 아예 작정하시고 말씀하신 듯싶습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16,33)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세상을 살다 보면 모든 사람은 피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러기에 고통이 낯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고통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혹은 인종, 종교와 관계없이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개인이건 공동체이건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저 자신부터 고통을 마치 저의 애인 인양 평생 끌어안고 살아왔고, 제가 소속한 수도회 형제들도 그리고 가정도 예외가 아닙니다. 동일한 고난과 고통, 십자가는 아니지만 저마다의 고통을 겪고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론 사람들은 고통이 없는 유토피아를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보다 어리석은 생각도 없을 것입니다.
고통의 기원과 의미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인간의 역사만큼 길고도 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인 우리의 관심사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서 단지 그분 죽음의 역사적인 사실에 초점을 모으기보다는 그 의미를 묻고 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는 바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만 용인되고 확인된다고 말입니다. 세상에 대한 예수의 승리는 바로 부활 사건이며, 부활을 통해서 우리의 고난과 고통의 이유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봅니다. 그 희망의 근거는 세상 안에 살아가기에 우리는 고통을 피할 수 없지만,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그 고통이 예수님의 고난-죽음-부활 사건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이 아니며 예수와 함께라면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을 이겨낼 수가 있다는 새로운 희망입니다. 평화는 고난과 고통을 통해서 얻은 승리의 전리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언급한 평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16,33)라는 말씀은 이별의 보상선물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고난과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갈 우리들을 위한 주님의 다함 없는 바람이며 약속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고통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우리는 예수님 안에 항구히 머물러 있을 때, 세상의 승리인 부활을 통해 가져온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평화는 그러기에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이며, 주님께서 죽음을 극복하고 승리하심으로 가져다준 주님의 선물입니다. 마치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 때 기쁨을 얻고 기쁨을 누릴 수 있듯이 평화도 오직 승리하신 주님 안에 머물 때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의도에서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16,33)라는 희망과 격려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지금 우리 모두에게 주님께서는 부드러우면서 강하게 용기를 내어라, 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치 이 말은 부모가 실의에 젖어 살아가고 있는 자식에게 하는 말과 같이 들립니다. 지금 실의와 낙담에 빠진 우리 모두에게 주님께서 용기를 내어라!, 하고, 말씀하시면서 힘을 쏟아부어 넣어 주십니다. 누가 있어 이토록 확신에 찬 그리고 따뜻한 위로의 말씀을 해주시겠습니까? 그 위로는 단지 말이 아니라 승리를 얻기 위해 처절한 고난과 고통을 겪으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기에 그 말씀이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처럼 세상을 이기는 유일하고 참된 승리는 더 이상 세상적인 가치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가치로 우리의 의식과 행동양식을 바꾸는 데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승리하셨기에 우리 또한 용기를 갖게 되었으며 주님의 도움이 있다면 우리가 할 수 없는 게 없을 것입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은 자신을 바꾸는 것이라고 봅니다. 자신의 변화는 세상을 바꿀 수 있고 세상에 대한 가장 위대한 승리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믿음의 승리이며, 이 승리는 바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을 때 가능한 승리입니다. 고맙게도 예수님은 오늘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말씀으로 살려는 저희가 용기 내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하루, 한 주간이 되도록 당신의 능력과 힘을 주십니다. 우리 편안한 마음으로, 다 함께 성가 44장 「평화를 주옵소서」를 마음으로 부르며 새 하루를 힘차게 시작합시다. "날 이끌어 주옵소서. 내 가는 길 힘드오니 내 주님의 크신 힘에 나 굳게 의탁하리. 평화 평화 평화를 주옵소서. 그 영원한 참 평화를 우리게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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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이탈리아에 가게 되면 꼭 방문하는 곳이 있습니다. 성 베네딕토의 수도원으로 알려진 ‘수비아코’입니다. 해발 800미터 정도의 산꼭대기에 30미터는 족히 될듯한 깎아지른 바위 절벽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베네딕토 성인은 첩첩산중 수비아코의 두 평 남짓한 동굴에서 기나긴 은수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동굴에서 참회와 기도 생활을 하며 서양 수도원의 체계를 세우셨습니다. 그가 6세기 만든 수도회 규칙은 그 후 모든 수도회 규칙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베네딕토 성인께서 수도자에게 요구한 첫 번째는 무엇일까요? 많은 이가 ‘Ora et labora’(기도하고 노동하라)만을 떠올리지만, 사실 ‘자기 스스로를 받아들여라.’라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자신과 잘 지내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과 잘 지내겠는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이 어떻게 온전한 인간일 수 있는가?”
그는 스스로를 부정하고 미워하는 사람은 하느님과도 또 동료인 인간과도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베네딕토 성인께서 수도자들을 향해 하신 말씀이었지만, 지금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미워하는 사람은 이를 통해 더 큰 문제를 낳고 맙니다. 이런 사람이 주위 사람들에게 더 많이 화를 내는 등 부정적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극복하기 위해 타인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또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주님을 바라보고 굳게 믿는 사람은 가장 힘센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큰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당연히 만나는 이웃에게도 너그러운 사랑으로 다가서게 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시련과 고통을 겪었지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바로 주님과 함께한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몇 차례에 걸쳐서 말씀하셨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자기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힘차게 살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 없이는 자기를 받아들이기 힘들어집니다. 특히 세상 안에서 어떤 고통과 시련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결국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통해 우리는 주님과 함께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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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세상을 이기는 힘>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그것이 승리라고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는 악의 고리를 끊기 위해 그 죽음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능력이 없어서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더 큰 사랑 때문에 죽음을 감당하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실패이지만 속을 보면 오히려 사랑의 승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제자들은 그것을 쉽게 알아듣지 못하였고 수난과 죽음, 부활의 사건을 겪기까지 그리고 부활하시어 제자들과 동행하시고 일깨워 주시기까지 그들의 믿음은 다져지지 못하였습니다. 굳센 믿음을 지닌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보았다고 해서 저절로 믿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할 때 믿음을 견고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쁨과 슬픔에 관해 말씀하시며 세상의 환난을 겪어내기를 기원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고통과 환난을 겪겠지만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는 당부를 하신 것입니다. 결국은 예수님께서 승리할 것이고 그 승리는 곧 제자들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승리를 받아들여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곁에 있었던 제자들도 믿음이 온전히 영글기까지 오랜 시간과 시련의 시간이 필요하였는데 하물며 우리에게는 어떻겠습니까? 말씀을 믿고 가슴에 새기고 때를 기다리며 살면 어느새 성장한 나를 알게 됩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은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사도 10,38)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줄 것입니다.”(필리 3,21) 하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마귀를 굴복시키고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는 능력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세상을 이겨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주님을 애타게 부르고 마침내 그분 품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려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현존을 깨닫기도 전에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생각하고 찾으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빌기보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먼저 빌고 계십니다. 마음을 열어 주님을 만나 뵙게 되길 바랍니다.
어느 시골에 가문이 오래된 가정이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높은 벼슬을 하였으나 자손이 번성하지 못하여 한 농부가 그 집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 농부는 오래된 가구며 유물을 다 팔아 버리고 병풍 하나만 남겨 놓았습니다. 그것도 엿장수가 자꾸 팔아 버리라고 조르는 바람에 십만 원에 팔아버렸습니다. 그런데 농부는 나중에 그것이 시가 천오백만 원을 웃도는 병풍임을 알고 후회하며 가슴을 쳤답니다. 그 농부가 좀 더 지혜로워 그 병풍의 가치를 알았더라면 결코 손해 보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모르는 것이 죄였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이 주님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죄가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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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세상을 이기는 길>
요한 16,29-33 (내가 세상을 이겼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씀드렸다. “이제는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시고 비유는 말씀하지 않으시는군요. 저희는 스승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누가 스승님께 물을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이로써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세상을 이기는 길>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불신이
불신하라고
쉼 없이 부추길 때에
끝까지 신앙하는 겁니다
절망이
절망하라고
쉼 없이 부추길 때에
끝까지 희망하는 겁니다
증오가
증오하라고
쉼 없이 부추길 때에
끝까지 사랑하는 겁니다
불의가
불의하라고
쉼 없이 부추길 때에
끝까지 정의로운 겁니다
어둠이
어두워지라고
쉼 없이 부추길 때에
끝까지 빛나는 겁니다
탐욕이
탐욕스러워지라고
쉼 없이 부추길 때에
끝까지 내어주는 겁니다
저주가
저주하라고
쉼 없이 부추길 때에
끝까지 축복하는 겁니다
차별이
차별하라고
쉼 없이 부추길 때에
끝까지 보듬는 겁니다
배척이
배척하라고
쉼 없이 부추길 때에
끝까지 함께하는 겁니다
경쟁이
경쟁하라고
쉼 없이 부추길 때에
끝까지 더불어 가는 겁니다
무자비가
무자비하라고
쉼 없이 부추길 때에
끝까지 자비로운 겁니다
죽임이
죽이라고
쉼 없이 부추길 때에
끝까지 살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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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정의 여정>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일치의 삶-
"주여, 당신의 집에 사는 이는 복되오니 길이길이 당신을 찬미하리이다."(시편 84,5)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의 학인이 되어, 배우는 마음으로, 공부하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배워야 할 가르침은 날마다 쏟아집니다. 교황님의 가르침도 매일 빼놓지 않습니다. “인구과잉이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굶게 함으로 비난받아져야 할 바는 소비지상주의”라 갈파한 교황입니다. “이태리의 평균 연령이 47세요, 유럽의 저출산 현상으로 이제 옛 대륙이 아니라 늙어가는 대륙이 되었다”고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이어 교황은 “주님은 당신의 승천과 더불어 우리의 길을 하늘로 인도하신다”고 어제 승천대축일 강론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 관계의 하늘길 여정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홍보주일 담화문중에는 특히 “마음의 지혜의 시야를 잃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새삼 하느님의 지혜이자 하느님의 사랑이신 예수님과 우정의 여정이 얼마나 절박한지 깨닫게 됩니다. 한걸음 한걸음 주님을 따르며 주님과의 우정을 깊이하며 그분의 지혜를 배우는 것입니다. 옛 어른의 오늘 말씀도 저에겐 주님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1.“물고기를 잡는 방법보다 더 큰 가르침은 ‘멀리 바다를 꿈꾸게 하는 것’이다.”<다산>
시야를 넓히는 꿈꾸기를 가르치는 것이 더 큰 가르침이라 하십니다.
2.“백성이 많은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들을 부유하게 해야 한다.
부유하게 한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가르쳐야 한다.”<논어>
민생 해결이 우선이고 이어 곧장 가르침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일상에서 좋은 지혜의 가르침을 배우는 점이 참으로 부실했음을 깨닫습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주님과 우정의 관계를 날로 깊이해야 함을 배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을 믿는다 하지만 이들의 부족함을 직시하시고 자신을 배울 것을 기대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예수님께서 온갖 시련과 외로움, 고독을 견뎌내고 버텨낼 수 있었던 비결은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라는 고백에서처럼, 아버지와의 깊은 일치 관계에 있었음을 봅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든 홀로하든, 우리의 평화이신 예수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예수님과 깊어지는 우정과 더불어 내적평화와 용기요, 세상을 이긴 예수님처럼 우리도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내적 힘이 생깁니다. 예수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의 힘이, 은총이 저절로 예수님의 세상 승리에 참여할 수 있게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긴 비결이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었듯이, 예수님과 우정의 깊이가 예수님의 승리에 참여함으로 우리 또한 세상을 이기게 합니다.
이래서 요셉수도원 배경의 하늘과 불암산은 저의 좋은 스승입니다. 자주 소개했던 ‘하늘과 산’이라는 시는 바로 주님과 우리의 우정 관계를 상징합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여기 수도원에서 27년전에 쓴,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일치의 우정 관계를 열망하며 자주 되뇌이는 고백시입니다. 이런 주님과의 근본적 우정 관계의 깊이와 더불어 사람간의 우정 관계도 깊어질 수 있습니다. 부부도반 역시 주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이들간의 애정은 우정으로 변모될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과 날로 깊어지는 일치 관계의 우정의 빛나는 모범은 사도행전의 3차 선교여정에 오른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의 지칠줄 모르는 한결같은 선교 열정은 그대로 예수님과 일치 관계의 우정의 깊이를 반영합니다.
에페소에서는 요한의 세례만 받은 이에게는 예수님 이름으로 세례를 주면서 예수님과의 관계를 마련해 주시니, 성령이 그들에게 내려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도 하니 본격적으로 예수님과의 우정이 시작되었음을 봅니다.
마지막 대목에서 바오로 사도의 지칠줄 모르는 선교활동 역시 예수님과 우정의 깊이를 반영합니다. ‘바오로는 석 달 동안 회당에 드나들며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토론하고 설득하면서 담대히 설교하였다.’ 그러고 보니 다음 예수님 복음 말씀을 잘 배워 실천한 이가 영적승리의 사도 바오로임을 깨닫습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ㄴㄷ).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께서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복음의 핵심 말씀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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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승천의 승리>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이 승천하신 뒤 제자들이 세상에서 고난을 겪겠지만 용기를 내라고 하시면서 당신이 세상을 이겼다고 하십니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고 제자들도 고난을 겪는데도 당신이 세상을 이겼다고 하시는데 이 승리는 어떤 승리입니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입니다. 주님의 승천은 세상에서 패하고 하늘로 도망치신 것이 아니라 승천하심으로써 오히려 세상을 이기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말하자면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고의 승리라고 하는데 그런 뜻이 없지 않습니다.
어른이 애와 싸우면 그 자체로 지는 것이지요. 화를 내면 그것은 싸우기도 전에 진 것이지요.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으면 땅을 초월한 것이고, 세상이 아무리 붙잡고 얽어매어도 매이지 않고 하늘로 오르면 그것이 세상을 승리한 것이지요.
높이 나는 독수리는 강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는 말을
올해 들어서만 여러 차례 했는데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을 초월하여 하늘에 있을 때 그것이 세상 승리입니다.
한 가지 더. 세상에서 살지만 그리고 수난을 당하지만
평화로울 때 그것이 또한 세상 승리입니다.
그러니 미움과 모욕과 수난을 당할 때 마음의 평화가 깨지면 세상에 지는 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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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예수님의 죽음을 믿자!>
오늘 복음(요한16,29-33)은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승리는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온 승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이제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요한 16,3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요한 16,31-32)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예수님을 혼자 버려두고 모두 도망쳤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 앞선 대전제는 '십자가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 안으로 파견하신 근본이유가 예수님이 우리의 희생제물, 속죄제물이 되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심으로써 세상을 이기셨고, 승리하셨습니다. 그 승리의 결정적 표지가 바로 '주님의 부활과 승천'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권고입니다.
"주님의 양들은 고통과 박해, 모욕과 굶주림, 연약함과 유혹 그리고 다른 갖가지 시련 가운데 주님을 따랐기에, 주님한테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성인들)의 업적을 그저 이야기만 하면서 영광과 영예를 받기 원하니, 이것은 하느님의 종들인 우리에게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권고5 '주님을 본받음')
예수님의 죽음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을 받고, 성령의 힘으로, 나도 예수님처럼 죽을 수 있고, 세상을 이길 수 있고, 부활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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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nghaNC1Kv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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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 33)
용기 없이는
평화도 없습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을 믿습니다.
믿음의 여정은
용기의 여정입니다.
끝날 때까지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부여잡는
욕심이 아니라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실천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은총도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과
함께
나누어야 할
은총이며
용기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용기를
주십니다.
용기는
용기를
낳습니다.
용기는
평화롭고
용기는
믿음직합니다.
주님께
이 모든 것을
내어맡기는 삶이
바로 용기입니다.
믿음이
용기가 되고
용기가 평화를
얻는 우리의
오늘입니다.
평화를
찾는 곳에
용기도
있습니다.
우리의 용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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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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