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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워마드 임시대피소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암살>의 전지현 같은 여성 독립운동가 1900명 넘는다
최근에 개봉돼 화제를 모으고 있는 영화 <암살>. 이 영화 제작진은 몇 년 전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의 심옥주 소장을 찾아온 적이 있다. 여성 독립운동가 모델을 찾았으면 하는데 자료가 너무 없어,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세계사도 그렇지만, 우리나라 역사는 남성 위주의 역사관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여성들의 기록을 남기는 데에는 소홀했다. 많은 기록이 남진 않았지만,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여성의 역할은 매우 컸던 것으로 심 소장은 평가한다.
이제 우리나라 역사에서 여성의 자리를 온당하게 찾아줄 필요가 있다. 여성독립운동사가 재조명되어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그 여정은 결코 쉽지 않다. 심 소장도 그 힘든 길을 걸어가고 있는 연구가 중의 한 명이다. 지난 3일, 심 소장과 전화 인터뷰를 진행했다.
TV서 우연히 본 여성 독립운동가, 인생 바꿔놔
▲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의 심옥주 소장
한국정치사를 전공하고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던 심 소장. 그는 백범 김구 선생에 매료되어 다년간 선생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개인 신상에 변화가 생겼고, 전환점이 필요했다. 이후 그는 고시원에 틀어박혀 한의사 공부를 시작했다. 한의사가 되어 사회에 봉사하며 살고 싶었다.
"공부에 너무 매진하다가 손가락 세 개에 마비 증상이 왔어요. 그래서 공부를 진행하기가 어려워 고시원을 나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그날 TV에 윤희순 의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 이야기를 보고 무언의 감흥을 받아 부산에서 곧장 의사가 살았던 강원도로 달려갔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윤희순 의사의 존재를 접하게 된 그는 그 후 2년간 강원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윤 의사와 관련된 기록을 찾았고, <윤희순의 민족운동에 관한 연구>라는 주제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심 소장은 윤희순 의사 논문을 계기로 여성독립운동가들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의 활동을 말리는 이들도 있었고 의아한 눈빛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쉬운 길을 두고 왜 손수 어려운 길로 가느냐는 것이었다. 역사 연구에서 사료도 없고 발굴되지 않은 인물을 찾아 연구하는 것은 꽤 어려운 길이기 때문이다.
"정치사를 전공한 저도 그게 힘든 길이라는 걸 알았어요. 하지만 저도 두 아이의 엄마잖아요. 한국 어머니들의 삶의 여정을 살피는 차원에서 큰 의미가 있지 않나 싶었어요. 이처럼 이른 시일 내에 우리나라에서 여성의 지위가 이 정도까지라도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일까? 그 부분에 대해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전해주고 싶었어요."
그뿐만 아니다. 그는 한국 정치사의 근현대 부분을 전공했기에 독립운동의 정신이 의병 정신에서 파생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의병 분야에 윤희순 의사 같은 '여성 의병장'이 있었다는 건 대단한 의미라고 생각했다.
역사가 남성의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뜻하니까. 그렇게 시작된 여성독립운동가 연구는 올해로 10년이 되었다.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는 여성 독립운동가연구의 시발점이 된 곳이고, 여성 독립운동가를 알려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곳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여성독립운동사'를 연구하던 분들은 성신여대의 박용옥 교수님 등이 계십니다. 기존의 '여성 독립운동 연구자'들은 인물의 행적과 삶의 여정을 추적, 발굴하고 있었어요. 저도 그분들 연구의 토대가 된 부분을 바탕으로 연구하고 있고, 또 그분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물론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사상적인 부분을 함께 연구하는 곳은 본 연구소가 처음일 것입니다."
1900여 명의 여성 독립운동가, 알려진 것은 유관순 열사(a.k.a.유관순 누나) 뿐
▲ 여성 독립운동가들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개인적으로 고민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연구 과정에 어려움이 컸다. 과연 해낼 수 있느냐고 사람들이 묻기를 반복했다. 역사 연구를 지원하는 재단들에 연구하겠다고 올리면 '이 분야는 연구가 될 수 없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많았다. 기초 사료도 워낙 없고, 기존의 연구 성과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학계에서는 극과 극으로 우리 연구소의 활동을 평가합니다. 너무 힘들어서 별다른 성과를 내기 어렵다고 말하는 쪽도 있지만, 다른 쪽에서는 굉장히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평가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연구를 하면 할수록 기분이 짜릿하답니다."
현재(2015년) 정부에서 여성독립운동가로 인정한 유공자는 248명이다. 심 소장에 따르면, 인정은 못 받았지만 자료를 통해 간단하게라도 활동 기록이 남아 있는 유공자가 1900여 명 정도 된다.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유공자만 해도 248명인데, 대중적으로 알려진 인물은 유관순 열사가 거의 유일한 셈이다. 심 소장은 그 이유에 대해 "첫째는 사료 부족이고 둘째는 여성유공자를 발굴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고, 셋째는 별반 돈이 안 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여성 독립운동가는 '수동적 역할' 머무르지 않아
▲ 영화 '암살' 스틸컷 여성독립운동가들이 단지 조력자 역할에 머물렀으리라는 기존의 예상은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심 소장을 '여성 독립운동 연구'의 길로 들어서게 한 윤희순 의사. 부끄럽게도 우리는 잘 모른다. 심 소장에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윤희순 의사(1860~1935)는 경기도 파주 출신으로 16세에 고흥 유씨 집안의 유제원과 결혼하면서 강원도 춘천으로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친정과 시댁은 모두 대대로 유학자 집안이었지요.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무사에 의해 시해당한 '을미사변' 후 시아버지인 유홍석이 의병을 일으키면서 집안이 의병 투쟁에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
윤희순 의사는 적극적으로 의병을 돕기 위해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 여성들의 독립운동을 독려했다. '안사람 의병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무리 왜놈들이 강성한들 우리들도 뭉치면 왜놈 잡기 쉬울세라/아무리 여자인들 나라 사랑 모를쏘냐/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들 나라 없이 소용 있나/ 우리도 나가 의병 하러 나가보세의병대를 도와주세/ 금수에게 붙잡히면 왜놈 통치 받들쏘냐/우리 의병 도와주세/ 우리나라 성공하면 우리나라 만세로다/우리 안사람 만만세로다."
한편 시아버지 유홍석은 을미의병이 해산한 후, 잠시 의병 활동은 멈추었다가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 후 본격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이에 의사는 시아버지를 돕기 위해 지역 여성 30여 명으로 구성된 여성의병을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으고 화약과 탄약도 만들어 지원했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가족이 모두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 투쟁을 계속했다.
시아버지와 남편이 먼저 중국으로 떠나고 의사는 가산을 정리하여 떠나려 했는데, 마침 일본 경찰이 들이닥쳐 시아버지 유홍석의 행방을 물었다. 의사가 모른다고 하자 어린 아들을 매질했다. 의사는 "자식을 죽이고 내가 죽을지언정 말할 수 없다"며 끝내 거절한 일화로 유명하다. 보통의 어머니라면 감당하기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후 시아버지가 있는 중국 환인현으로 이주하여 논을 개발하여 벼농사를 짓고 군자금을 모집했다.
그리고 항일 인재를 양성하는 학교인 노학당(勞學堂)을 창설하여 교장으로 취임해 교육 운동과 군자금 모금 운동을 계속했다. 두 아들은 독립운동단체에 가입시켰다.
"윤희순 의사는 79세로 사망할 때까지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쳤습니다. 집안의 시아버지, 남편, 아들도 독립운동을 했고, 손자분이 얼마 전에 작고한 광복회 강원도지부장이었어요. 집안의 4대가 독립운동의 맥을 이어오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입니다. 이 부분을 연구하면서 여성 독립운동가가 과연 조력자에 불과했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단지 수동적인 역할에 머물렀으리라는 기존의 추측은 실제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이죠."
1920년 8월 당시 34살 임신한 몸으로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진 안경신 의사, 미국과 조선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하고, 2.8독립 선언에 참가했던 김마리아 선생도 적극적인 독립운동가였다. 특히 김마리아 선생은 고문하던 일제 검사가 탄복할 정도로 의지가 강했다. '김마리아 같은 여성이 열 명만 있었어도 한국은 독립이 되었을 것'이라는 안창호 선생의 말로 그의 항일정신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전반적인 여정을 살펴보면 곳곳에 여성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수동적인 역할에 머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적지 않습니다. 하와이에서 고된 노동에 종사하면서도 독립자금을 상해 임시정부로 보냈던 많은 여성들, 많은 여성단체들이 그동안 제대로 조명이 안 되었습니다."
심 소장은 "독립운동사는 남녀의 경계를 넘은 전반적인 역사였음을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증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마지막까지 강조했다.
나라를 빼앗긴 황량한 들판.
열여섯 어린 소녀가 찾은 꿈은 하늘을 나는 비행사였다.
그녀가 하늘을 날고 싶었던 단 하나의 이유는 ‘독립’.
그녀는 훗날 조선 최초의 여류 비행사이자 대한민국 공군의 어머니로 불리게 된다. 여성의 한계를 뛰어넘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하늘을 날았던 독립운동가, 권기옥의 삶을 들여다본다.
http://newstapa.org/30318 <영상
독립운동의 이념과 사상을 정립한 역사가이자 혁명가, 단재 신채호.
그 위대한 영웅의 모습 뒤에는 이제껏 그의 부인으로만 알려진 가려진 독립운동가, 박자혜가 있었다.
대한제국의 궁녀에서 간호사가 된 그녀는 조선총독부 의원에서 근무하던 중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 부상당한 학생과 시민들을 마주하게 된다. 이후 간호사들의 독립운동단체인 “간우회” 조직하고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 당시 일제의 조선인 감시 보고서는 그녀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과격하고 언변이 능한 자.
병원 간호사 전원을 동요시킨 주모자.
신채호와의 결혼 후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의거를 비밀리에 돕기도 한 그녀는 신채호 선생의 부인이기 이전에 일제 강점기 애국정신이 투철했던 또 하나의 독립운동가였다.
<박자혜 선생 이력>
1919년 <간우회> 조직 만세시위를 벌임
1920년 베이징에서 독립운동가 신채호와 결혼
1926년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지원
1943년 사망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2009년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http://newstapa.org/30585 <영상
임시정부 27년 간의 역사를 온전히 떠안은 여성, 정정화. 가흥에서는 엄항섭 일가와 이동녕 선생을 모셨으며 남경에서는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그의 아들을 돌봤다.
1940년, 중경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다시 항일 투쟁의 중심에 섰고 정정화는 한국애국부인회 등 여성단체에서 활약하며 중국에서 나고 중국에서 자란 아이들을 위해 선생님으로도 활동한다.
모국의 산과 들, 모국의 냄새 모국의 마음을
얘기로만 듣고 자라난 아이들이었다나는 틈만 나면 독립된 그들의 조국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얘기해주었다어쩌면 그것은 내가 나에게 들려주는
내 나라의 이야기였는지도 모른다.– 수당 정정화 <장강일기> 중에서 –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압록강을 여섯 번 건넌 그녀는 불굴의 정신으로 조국의 독립을 이끈 독립운동가였다.
http://newstapa.org/30839 <영상
동래일신여학교 재학 당시 차별적인 식민 교육에 항거해 동맹 휴학을 주도하는가 하면 항일여성운동의 전국적 조직인 ‘근우회’에서 활동하며 개혁적인 여성해방과 민족해방의 길을 모색했던 박차정. 서울지역 11개 여학교의 대표들을 만나 시위 방법을 논의해 1930년 1월 대규모 학생시위를 주도한 박차정은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한 박차정은 1930년 의열단에 합류했고, 이를 이끌던 독립운동의 거두 김원봉과 결혼해 사랑과 혁명의 길을 함께 걷는다. 1935년, 의열단 등 좌우 독립운동단체 5개를 통합한 조선민족혁명당이 창당되자 박차정은 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해 조선 여성들이 총단결해 민족독립과 여성해방 쟁취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우리 조선 부녀를 현재 봉건적 노예제도 하에
속박하고 있는 것도 일본 제국주의이고
또 우리를 민족적으로 박해하고 있는 것도 일본제국주의이다.
우리들이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지 않는다면
우리 부녀는 봉건제도의 속박 식민지적 박해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남경조선부녀회 선언문 中-
1938년 조선의용대 창설 후 부녀복무단 단장으로 활약하며 항일투쟁의 선봉에 선 박차정은 1939년 2월, 곤륜산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1944년 34살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그토록 꿈꾸었던 독립을 한 해 앞두고 숨을 거둔 것이다.
연합국의 힘으로 해방된 한국의 남쪽은 사실상 미군정의 지배 하에 들어간다. 소용돌이치는 해방정국 안에서 독립운동가 김원봉은 친일경찰 노덕술에 체포돼 참을 수 없는 수모를 당한다.
분단과 이념의 대립 속에서 지워진 역사. 박차정은 사후 50년이 지난 1995년에서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고, 김원봉은 광복 70주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남과 북 그 어느 곳에서도 독립운동가로 살았던 삶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http://newstapa.org/31079 <영상
첫댓글 멋지시다ㅠㅠ나 암살 봤을때는 여성독립운동가가 존재했었는지 몰라서 캐릭터가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었어ㅠㅠㅠ
예나 지금이나 여자가 하면 평가절하당하는 개같은 현실
ㅠㅠ진짜 멋있어.....
교과서에 싣고 안중근오빠랑 같이 배우게해라 머한민국 ㅅㅂ
이런내용의 영화나와서 조금이라도 많이 피부로 접하면 좋겠다ㅠㅠㅠ
아니 이런건 왜 교육 안하는지 모르겠어 열받아 진짜
기억할게요 정말로
더 알아보고싶다 진짜
이런 걸 교육하지않고 열심히 안 찾으니까 지금 남자들이 여자는 조국을 위해 뭘 했느냐고 큰 소리치는거아니야 나도 취업하고나면 남는 시간에 이런 활동 열심히 하고싶음ㅠㅠ
절대 안잊을게요 죄송해요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