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들의 시간
김해자
1
연해주 사는 우데게족은
사람 동물 귀신 구분하지 않고 모두 ‘니’라 부른다는군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 안에 깃든 모든 영혼을 니로 섬긴대요
삵이 마을을 어슬렁거린다는 소문
밤 창문을 닫으려다 흠칫 놀랐어요
누군가 여태껏 훔쳐보기라도 한 듯
뻣뻣한 털들이 돋아난 유리창은 거대한 눈,
그 앞에 서기만 해도 찔릴 것 같았지요
수상쩍은 날들이 이어졌어요
이상스런 생물체가 출몰한다는 소문이 퍼졌죠
봄이 오긴 온 건가요
안전 안내 문자를 받으면 안전해지긴 할까요
이끼 낀 계단이 노려보았어요
맘만 먹으면 어디서든 넘어뜨릴 수 있다는 듯
모서리가 너무 많아요
2
비늘구름 속에서 미사일이 날아다녔어요 인형 속에 인형, 탄두 속에 탄두, 아이 손에서 터지는 탄두 속 작은 집속탄, 밀밭은 보고 있었죠 무너진 담벼락과 흩어진 살점들, 폭격에 쓰러진 나무가 가리키고 있었죠 크라마토르스크 기차역에 떨어진 토치카-U 로켓에 쓰인 흰 글씨, “어린이를 위해서”
겨우내 참았던 씨앗이 버럭 솟구친 것처럼
맥락도 없이 튀어나오는 울화
남몰래 사그라진 화장장의 연기는 지구를 몇 바퀴나 돌아 여기까지 왔을까요
살아도 죽어도 제로가 되는 수치
한낮에도 귀신이 출몰한다는군요 소금을 바가지로 뿌려대다
영구 엄니는 옥수수밭에 서 있는 발 없는 귀신들에게 넙죽 절했다죠
한 잔 받으시오, 고수레,
술 가득 부어 고수레,
삭삭 빌었다죠 손가락 넣고 휘휘 저어
석잔 대접하고야 놓여났다죠
발 붙들고 놓지 않는 산 그림자
3
합체는 멸족당한 자들의 모음,
정수리인 오늘의
뒤를 가리키며 어제를 말하고
앞을 가리키며 내일을 말하던 인디오들처럼
니라 부르면 니가 나처럼 느껴질까요
내가 니를 어떻게 했는데, 없이
니를 부르면 니가 나와 섞일까요
니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없이
나의 반대말들로만 이루어진 니들,
니는 대체 왜 그래, 없이
한 잔 받으시오, 죽은 사람에게 고수레
한 잔 받으시오, 산 사람에게 고수레
한 잔 받으시오, 앞으로 살 사람에게 고수레
4
뜨고 나서야 눈 감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우리는 한 꿰미로 사이좋게 도망가는 사이
불안과 사랑을 두 쪽 내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는 사이
철창 속 달궈진 철판 위에서
번갈아 발을 떼는 개처럼(니들은 사람이 아니야)
니가 할딱거리는 동안 뜨거운 철 상자 속에 갇힌 하청에게
맞불을 놓는 원청처럼(니들도 사람이 아니야)
니가 깎여나가는 동안 허리가 묶인 물고기들처럼
아무리 헤엄쳐가도 헤어지지 못하는 사이(우리는 우리가 아니야)
밤이 내려와도 뜬눈으로 누워있는
니들이 실종되는 사이 빠른 속도로 감염되는
멜랑콜리를 나눠 마시며
우리는 점차 말이 없어지는 사이
5
니들이 부서지고 있습니다 산산이
공들여 X자를 붙였어도 태풍에 깨져버린 창문처럼
창에 비치던 너와 나의 얼굴
우린 어쩌다 먹어치워버렸을까요
앞으로 올 니들을
니들의 시간을
- 『니들의 시간』, 창비, 2023.
*김해자 시인은 전남 신안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과 졸업. 구상문학상. 만해문학상.
이육사시문학상. 백석문학상. 전태일문학상 수상. 1998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했으며,
시집 『무화과는 없다』 『축제』 『해자네 점집』 『니들의 시간』, 민중구술집 『당신을 사랑합니다』와
산문집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다 이상했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