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31일 (넷째날. 완도군 보길도)
▻08:20 진도 수련원 출발
▻09:45 해남 땅끝 터미널 도착
▻10:00 노화도행 여객선 승선
▻10:40 노화도 산양항 도착→
보길도로 출발(보길대교)
▻11.05 보길도 세연정 도착
(윤선도 원림 탐방)→
동천석실(세연정에서 2km)→
곡수당. 낙서재(동천석실에서 0.7km)
▻14:30 보옥 공룡알 해변 탐방
▻15:20 노화도 산양항 도착
▻15:30 노화도 산양항(여객선)
→땅끝 터미널(40분)
▻16:10 해남 땅끝 터미널 도착
▻16:25 땅끝 전망대(모노레일).
스카이워크
▻17:40 해남 땅끝→진도 출발
▻19:10 진도 수산시장 도착
(횟거리 구매)
▻20:00 진도경찰수련원 도착
(여행 마지막 밤 파티)
▶2024.01.31. 아침
여행중 sns에 올린 글
▷여기는 진도
오늘은 보길도 입도하는
스케줄이라 새벽부터
부산합니다~~~
옆지기가 끓인
콩나물 국이 너무 시원하여
전부 탄성을 지릅니다~~~
참말루....
우리와 오랬동안 여행하던
님들은 당연히 맞이하는
아침 식사지만
처음 동행한 님은 색다른
아침 식사가 아닐까??
지난 3일 동안
가는 곳 마다 많이
발전하고 변화하여 꼭
외국에 여행 온 듯한
기분이 들고
모든 것이 찬란하여
그때마다 기록하고 싶어
손가락이 얼마나 근질근질
했는지 모릅니다~~~
허나
바쁜 스케줄 땜시 한시도
여유가 없음에 머릿속에
메모만 했는데 시간이 흐르면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지???
특히.
영원한 우리 민족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했던 명랑해전~~~
명량해전은
조선 역사상 최고 최대의
조선 수군 승리 해전이다.
13척의 판옥선으로
133척 왜 수군을 격퇴한
명량해전 (왜선 31척 수장.
기능상실 90여척) 기념관에서는
심장이 멎을 만큼 감동과
뭉쿨함이 온몸에 전율을
느끼게 합니다...
새벽 식사하고
옆지기가 보길도에 가져갈
김밥을 준비하는 동안
이렇게 긁적이는 짧은 여유가
나름 바쁜 와중에 여유를
부려 봅니다~~~
진도 동녘하늘이
서서히 밝아오고 창밖 드넓은
바다위에는 짙은구름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잉????
왜 빗소리가 들리지 않지??
서울 출발당시
오늘의 날씨는 11시까지 많은
비가 내린다는 기상 예보
였는데......
빗방을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급히 기상예보 탐색했더니
진도. 보길도 오늘의 날씨...
종일 흐린 날씨..
그러나 비는 내리지 않는다는
기상 예보입니다~~~~
와우~~~~~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오늘도 神 이 행운을 선물
하는 것 같습니다~~~ㅎㅎㅎ
神 은 항상
감사하는 마음
봉사하는 마음
사랑 나눔을 실천하는
멋진 사람에게 내리는 행운~~~~
덕분에
나도 그 은혜를 입음에
오늘도
기쁨과 즐거움 행복한 시간의
연속에 그져 감사할 따름
입니다~~~~
이글 읽는 님들~~~
행운 행복 가득하시길
진도에서 기원합니다~~~
오늘도
짜릿함이 그윽하고 즐거움이
가득한 행복한 날
멋진 날
좋은 하루 되십시요~~~~
2024. 01. 31. (수) 아침
진도에서....
최폴리......
<해남 땅끝>
▲해남 땅끝항↔노화도 “산양“항을
운항하는 "뉴 장보고" 여객선
▲노화도
뒤 보길도와 연결된 보길대교
▶보길도 세연정
►인조 14년(1636) 12월....
병자호란에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했다.
다음 해 1월 윤선도는 왕을 위해
가복 수백 명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갔다. 그러나 이미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다시 왕이 있는
남한산성으로 가려 하였으나 이번에는
왕이 항복하고 환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윤선도는 한없는 치욕과
절망감에 은거를 결심한 뒤,
뱃머리를 제주도로 돌렸다.
마침 거친 풍랑을 만나 뱃길에 있는
보길도로 잠시 피난했다. 그러다
아름다운 풍광에 이끌려 닻을 내리고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았으니
부용동이다.
부용동에 집을 지어 낙서제(樂書齋)라
하고 바라보는 산봉우리를
격자봉(格紫峰)이라 했다.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으로 십이정각,
세연정, 회수당, 동촌석실 등을
지었으니, 오늘 우리가 잠시 세속을
떠나 선경에 취해볼 수 있는
이유이다.
►윤선도는 당대의 정치인이자,
선비였고, 빼어난 문인이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도 막대했지만
간척사업 등으로 부를 불려 이를
아낌없이 투자했던 통 큰 경제인이기도
했다. 그렇게 윤선도의 재력 덕분이기도
했던 이곳 부용동의 8경이 있다.
윤선도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당시 조선 조정의 정치 권력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있었다. 다시 동인은
남인 북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윤선도는 동인이자 남인이었다.
그리고 서인이자 노론의 우두머리인
송시열의 견제 때문에 피해를 본다고
생각했다. 여기 보길도 바닷가 바위
암벽에 송시열의 ‘글씐바위’가 있다.
역시 제주 귀양길에 풍랑을 만난
송시열이 새겨놓은 글이다.
‘여든셋 늙은 몸이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구나’의 그의 암각서 시 역시
권력의 허무함이다.
송시열 역시 홀로선 외로운 돛대였다.
윤선도가 두 살 때 죽은
이발(1544~1589)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윤선도의 고모부였다. 이발은 문과
장원급제하여 부제학이었고, 아우 이길도
별시 을과에 급제하여 응교였으나,
기축옥사에 둘 다 고문 끝에 죽었다.
동인 강경파의 영수였던 이발의 80대
노모와 어린 아들은 가장 처참한
압슬형으로 죽었다. 그래서인지 당시
기축옥사를 주도했던 정철에 대한
원한으로 이 집안에서는 제사 때
고기를 다지며 ‘정철정철정철’이라
중얼댄다고 한다. 당쟁의 소용돌이와
그 원한의 후유증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음이다.
(발췌하여 옮김)
►“기축옥사” 참고
▷기축옥사는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이 모반을 꾀한다는
고변서에서 촉발되어 다수의 동인이
처벌된 사건이다. 2년 반 정도
지속되면서 1,000명 정도가 사망한
사건이다. 지역적으로는 호남이,
당파적으로는 동인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에 대한 사료가
부족하고, 조선시대 내내 그에 대한
해석이 당파적으로 이루어지면서
현재까지도 여전히 그 발생 원인,
사건의 성격에 대한 이해가 상이한
사건이다.
▷내용
발단은 1589년 10월 황해도 관찰사
한준(韓準)과 재령 군수 박충간(朴忠侃),
안악 군수 이축(李軸), 신천 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이 전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들의 고변에서 열거된 정여립의
역모 죄상은 그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
전주와 진안 · 금구 등지를 내왕하면서
무뢰배와 공 · 사노비들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라는 단체를 만들어
매월 활쏘기를 익혔다는 것이다.
또 당시 민간에 유포되어 있던
도참설을 이용해 민심을 현혹시킨 뒤,
기축년 말에 서울에 쳐들어갈 계획을
세우고, 그 책임 부서까지 정해
놓았다고 주장했다.
이 고변서를 받은 선조는 선전관과
의금부 도사(都事)를 황해도와 전라도에
파견하여 사실을 확인하도록 하였다.
정여립은 안악에 사는 변숭복(邊崇福)
에게서 그의 제자였던 안악 교생
조구(趙球)가 자복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아들 정옥남(鄭玉男)과
함께 도망하여 진안에 숨어 있다가
관군이 포위하여 도망갈 수 없게 되자
자결하였다. 고변서가 조정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고변서 내용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정여립이 도피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그가 모반을 꾀했다는
확실한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한양으로 붙잡혀 온 정여립의 아들
옥남은 문초를 받은 끝에
길삼봉(吉三峯)이 모의 주모자이고,
황해도 사람 김세겸(金世謙) ·
박연령(朴延齡) · 이기(李箕) ·
이광수(李光秀) · 변숭복 등이
공모했다고 자백했다. 그 결과 다시
이들이 잡혀 가 일부는 조구와
같은 내용을 자백하고, 일부는
불복하다가 고문 끝에 죽음을 맞았다.
정여립의 자결과 일부 연루자들의
자백으로 그가 역모를 꾀했다는 것은
사실로 단정되었다.
이 사건으로 동인의 지도급 인물로
인식되었던 이발(李潑) · 이길(李洁) ·
김우옹(金宇顒) · 백유양(白惟讓) ·
정언신(鄭彦信) · 홍종록(洪宗祿) ·
정언지(鄭彦智) · 정창연(鄭昌衍) 등이
처형 또는 유배당했다.
이 사건은 무고한 많은 인명의 살상을
초래했다. 그 가운데 후대에 가장 많이
언급되었던 이들은 이발의 형제 ·
노모 · 자식이었다. 이발은 자신의
집에서 정여립이 그에게 보낸 편지가
발견되어 다시 불려 가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호남 유생
정암수(丁巖壽)를 비롯한 50여 인의
상소로 나사침(羅士忱) · 나덕명(羅德明) ·
나덕준(羅德峻) · 정인홍(鄭仁弘) ·
한효순(韓孝純) · 정개청(鄭介淸) ·
유종지(柳宗智) · 김우굉(金宇宏) ·
윤의중(尹毅中) · 유몽정(柳夢井) ·
조대중(曺大中) · 우성전(禹性傳) ·
남언경(南彦經) 등 30여 인이 연루되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이때의 상소로 조정의 동인계
고관과 함께 호남 지방 사류가
다수 연좌되었다.
그리하여 그 뒤로 전라도는 반역향으로
불리게 되었고, 호남 지역 사류 간
반목과 대립이 후대에까지 이어져
여러 가지 문제를 낳았다.
진주에 거주하던 처사 최영경(崔永慶)은
모의 주모자인 길삼봉으로 지목되어
옥사했는데, 그의 연좌 또한 지극히
모호한 내용이어서 많은 말썽을
불러일으켰다.
그 뒤 약 3년 가까이 정여립과
친교가 있었거나, 또는 동인이라는
이유로 처형된 자가 무려 1,0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뿐 아니라 이 사건은
그 뒤 당쟁이 벌어질 때마다 주요한
현안으로 소환되었다.
이 옥사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학설이 나누어진다. ① 노비 출신인
송익필(宋翼弼)이 당시 서인의 배후
인물로 활약했는데, 자신과 그의 친족
70여 인을 다시 노비로 전락시키려는
동인의 이발 · 백유양 등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설.
② 당시 위관(委官)으로 있던 정철이
위축된 서인 세력을 회복하기 위해
사건을 악화시켰다는 설.
③ 일부 조작된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정여립이 전제 군주
정치 아래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운
선양(禪讓)에 의한 왕위 계승 방식을
주장하는 등 혁명성을 가진 주장이
옥사를 발생시킨 요인이 되었다는 설,
즉 정여립의 모역상도 어느 정도는
인정된다고 보는 설.
④ 최근의 연구 성과로 국왕 선조가
조정의 분열을 이용해서 세력이 강해진
동인을 견제하기 위해서 확대시킨 사
건으로 보는 설도 제기되었다.
기축옥사의 전모에 대해서는 여전히
확실하지 않은 점들이 많다.
일차적으로는 빈약하고 부정확한
사료가 원인이다. 그와 함께 이 사건이
여전히 조선시대에는 물론 지금까지도
당파적 관점에 따라 해석된다는 것도
또 하나의 원인일 것이다.
▶보길도
조선 중기 문신이며,
시인인 고산 윤선도(1587~1671)가
병자호란 때 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하고
제주도로 향하다 보길도의
자연경관에 감동하여 머물렀다고
한다. 보길도는 그가 인조
15년(1631) 51세 때부터 13년간
글과 마음을 다듬으며,
‘어부사시사’와 같은 훌륭한
시가문학을 이루어 낸 곳이다.
보길도는 고산 윤선도가
섬 안의 바위와 산봉우리에
붙인 이름은 아직도 남아있다.
낙서재 건너 개울가에 연못을 파고
집을 세워 ‘곡수당’이라 하고, 그 건너
산중턱 위에 집을 지어 ‘동천석실’이라
하였다.
계곡의 동북쪽에는 ‘세연정’을 세워
책을 읽고 뱃놀이도 하며 자연을
벗 삼아 지냈다.
보길도에는 동양의 자연관과
성리학의 사상이 흐르고 있다.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통해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도록 한 윤선도의
뛰어난 안목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동천석실
동천석실은 주자학에서 신선이 산다는
선계세상으로 부용동을 한눈에
굽어 볼 수 있으며 낙서재의 정면에
바라보이는 산자락에 있다.
1,000여평의 공간에 한칸 정자와
석문, 석담, 석천, 석폭, 석전을
조성하고 차를 마시며 시를 읆었던
곳이다. 특히 석담에는 수련을 심고
못을 둘로 나누어 물이 드나들 수
있도록 인공적으로 구멍을 파고
다리를 만들어 희황교라 칭하였다.
지금도 석실앞에는 도르래를
걸었다는 용두암과 차를 끊여 마신
차바위가 남아있다.
▶낙서재. 곡수당.
낙서재는 윤선도가, 곡수당은
윤선도의 아들 학관이 머물렀던 곳
▶곡수당
곡수당은 격자봉에서 흐른 물이
이곳에 이르러 곡수를 이루고
있다고 해 붙인 이름으로 윤선도의
아들 학관이 휴식했던 곳
▼2024.01.31.(수) 4일째 여정 계속.....
(해남. 완도 보길도)
카페 게시글
국내여행(등산)사진
⓺목포.신안.진도.보길도 트래킹(2024.1.28~2.1)
최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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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2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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