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산! 여인의 허리처럼 선이 고운 산이다. 이 산 중턱에는 유명한 약수터가 있다. 해마다 4월 8일 석가탄신일이면 근방의 선남선녀들이 이곳에 약수를 마시러 온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나의 형이나 누나들이 서로 건네는 말을 들어보면 이곳에 나들이하는 것이 그 당시로는 큰 외출이었다. 교통이 불편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처녀가 바깥에 나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이 날만큼은 어느 정도 바깥 구경을 할 수 있게 부모님들이 눈감아 준 것으로 생각되었다. 중학교에 다닐 때 영산 정류소에는 사람들이 붐벼 순경이 교통 정리하느라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어디 이것뿐이랴! 나 역시 고등학교 진학을 못해 방황하고 있을 때 이곳을 가 본 적이 있다. 사람들의 흐름 속을 따라 약수터에 올라가 보았다. 약수를 마시려면 줄을 서서 한참이나 기다려야 했다.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이 날 하루 벌이로 일 년을 먹고 산다는 이야기도 나돌았다. 아마도 이곳은 그 당시로서는 관광지였다. 영산에 사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빌리면 이 물을 먹으면 위장병을 고친다고 한다. 그래서 외지에서도 와서 물을 받아간다고 한다.
우린 약수터가 있는 함박산에 대해 잘 모른다. 왜 함박산이란 이름을 가졌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우리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아름다움이 있는 산이다. 그래서 지난 3월 함박산에 한 번 가기로 결정했다. 6월 3일 우리는 영산 정류소에서 만나 김밥과 막걸리를 준비해서 호국공원으로 갔다. 호국공원에도 다른 지역처럼 해설사가 있었다. 우리가 자란 곳이라 무슨 해설사가 필요할까마는 그래도 해설을 듣기도 하고 이곳에 있는 만년교에 대한 이야기도 주고받았다. 임진왜란 때 영산을 사수하는 전제 장군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사실적인 기록이 없어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영산고등학교 도서관을 정비한 내 친구의 이야기로는 폐기처분한 책에는 좋은 의미로 나와 있지는 않았다고 한다. 호국충혼탑을 건립할 때 어느 인사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해 조금은 미화가 되었다고 한다.
호국충혼탑에서 6.25전쟁 영산지구 전적비가 있는 곳으로 갔다. 계단을 올라가니 전적비가 나오고 전적비를 거쳐, 3·1운동 봉화대 및 기념비 쪽으로 갔다. 친구의 안내로 산등성이를 향해 올라갔다. 내가 생각한 방향과는 다른 곳으로 올라가게 되어 함박산 약수터에 어린 추억을 되새기기에는 조금 어려움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다수가 하는 일에 따르기로 했다.
조금 올라가니 왼쪽으로 난 산길이 있는데, 이것이 약수터로 가는 길이었다. 누군가 그 쪽으로 가자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안내자의 말을 따라 함박산 정상이 아닌 종암산 가는 길을 택했다.
종암산은 함박산과 연결되어 있다. 함박산 중턱에 난 산길을 거쳐서 가야 한다. 이 길을 걸으면서 어린 시절 이야기도 하였다. 중학교 때 이 함박산에서 토끼몰이 하던 것이 주된 화제가 되었다. 고기가 귀하던 시절이라 토끼를 잡아 구워먹는 것은 진짜로 큰 즐거움이었다. 선생님 몰래 숨겨온 토끼를 우리 동네에 와서 구워 먹는 친구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리고 이 산에 있는 금광에 대한 이야기도 하였다. 나는 산 중턱에 굴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산 중턱에 굴을 왜 팠을까? 처음에는 이것이 금광인 줄 몰랐기 때문이다. 돌을 던지면 제법 소리가 크게 울리기도 하였다. 약간은 두려웠다.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도 함박산에 대한 미련은 남아 있었다. 한 친구가 함박산 정상에 표지석이 있다고 하였다. 어느 정도 걸었을까 삼거리가 나왔다. 오른쪽으로 가면 종암산이고 왼쪽으로 가면 함박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었다.
모두가 함박산 정상에 갔다가 가자고 하였다. 우리들은 시간을 확인하고 방향을 돌려 정상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정상까지 정확한 거리는 모른다. 이 지역에 대해 잘 아는 친구가 앞장서서 갔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사람들이 많이 다닌 길은 아니었다. 얼마 안 가서 정상에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용기를 내 서둘러 올라갔다. 정상에는 ‘함박산’이라는 표지석이 있었다. 우리는 표지석 옆에서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약간 평평한 자리에 앉아 막걸리와 도시락을 배낭에서 꺼냈다. 먼저 막걸리를 한 잔씩 하고 김밥을 먹었다.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있어야 산행도 즐겁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집에서 40년 전에 있었던 연애편지를 가지고 갔다. 이것은 내가 과거에 써 둔 글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것이다. 젊은 날 수 많은 사연을 주고받은 내용 중에 잘 쓴 편지라 공책에 붙여 놓았던 것이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문장력이 뛰어났다. 그 내용을 읽고 내가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답장을 했다. 답장 내용에 그 당시 감정이 묻어 있었다. 아무튼 그 편지를 긴 세월 동안 내 글 속에 있었다는 것은 젊은 날의 나를 되돌아볼 수 있어서 좋다. 이것을 중학교 동기생들에게 읽어 주었다. 읽으면서 그들의 얼굴 표정을 보기도 하였다. 각자가 갖는 감정이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산길은 구불구불했지만, 걷기에는 좋았다. 지난번에 간 영축산처럼 암릉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나무 이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산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란 탓으로 나무나 풀이름을 잘 모른다. 산수유 꽃과 비슷한 생강나무의 꽃은 자주 보았지만, 그 잎은 이번에 처음 보았고 잎을 따서 냄새를 맡아보았더니 생강냄새가 났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 가니 무리지어 핀 꽃이 있었다. 친구가 이것을 가리키며 ‘천삼’이라고 했다. 처음 알게 된 식물이라 그 꽃을 핸드폰에 담았다.
생강나무에 얽힌 추억이 있다. 김유정의 단편소설에 ‘동백꽃’이 있다. 나는 이 소설의 제목인 ‘동백꽃’이 남부지방에 흔한 동백꽃인 알았다. 소설가 김유정의 고향이 강원도 춘천인데, 그곳에도 동백꽃이 피는구나 하고 그냥 넘어갔는데, 제목 아래 주를 보니 강원도에는 ‘생강나무의 꽃’을 동백꽃이라고 한다고 돼 있다. 문제는 식용에 사용하는 생강의 잎을 중학교 때 본 적이 있어서, 그 잎이라 생각하고 어느 발표하는 장소에서 자료로 활용해 무지함을 드러낸 적이 있다. 그때에도 생강의 잎이 대나무 잎처럼 생기고 크지 않은 잎인데 어찌 그 속으로 푹 파묻혔을까 하는 의문을 갖기도 하였다. 발표 후에 지인이 무엇을 잘못 알고 있다고 일러주었다.
‘천삼’이라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그래서 네이버에 검색을 하니 ‘홍삼 중 품질이 가장 양호한 등급……’ 식으로 정의를 해 놓았다. 이렇게 좋은 것을 사람들이 그냥 지나쳤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며칠 후 동행한 친구가 지인에게 이 꽃을 보여줬더니 ‘봉삼’을 두고 한 것 같다면서 카톡에 올려놓았다. 봉삼이든 천삼이든 처음으로 알게 된 데 대하여 기쁨을 감출 수가 없다.
산행이란 계속 오르막만 있는 것은 아니다. 평지를 갈 때에는 이런 식물 공부도 하고 학창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를 곁들이기도 하였다. 이때에는 즐거운 맛이 한껏 돋아난다. 숲이 우거져 더운 맛은 덜 하지만, 오르막에 오를 때는 숨이 턱턱 막힌다. 이런 깔딱 고개가 한두 개가 아니다. 설악산 봉정암 가는 길에 만나는 깔딱 고개는 고개도 아닌 것 같다. 참으로 힘이 들었다. 어쩌면 몸속에 있는 독소를 다 뱉어내는 것 같았다. 고통이 따라야 뒤에 달콤함이 있다고 했을까. 힘겹게 오르고 또 올라 종암산 정상에 닿았다. 종암산 전망대에서 영남들과 낙동강 의 아름다움도 보고 기념사진도 촬영하였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어릴 적 추억이 있는 약수터에 가보지 못한 것이다. 약수터에서 약숫물을 한 모금 마시면서 그 옛날 진한 감정을 떠올리고 싶었는데……. 어릴 적 친구가 벌써 일흔이 가까워지니 세월은 말없이 많이도 흘렀다. 고향 산의 아름다움은 일상을 벗어난 우리들에게 추억을 되새기게 하고 건강을 확인하게 했다.
고향을 지키고 있는 친구가 부곡온천욕을 즐기라고 사우나 티켓을 준비해 놓았다. 그 티켓으로 피로에 지친 몸을 말끔하게 씻었다. 친구의 고마움을 마음에 새기면서……. 그리고 그의 사무실에 갔다. 사무실에서 그가 준비한 돼지고기와 소주로 흘러간 세월을 달래기도 하였다. 오랜만에 주고받는 소주잔에 정은 넘쳤지만, 나이에 걸맞지 않게 과음을 해 귀가하는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다. 세월이 유수같이 흘러가도 건강하게 만날 수 있음에 행복함을 느꼈다. 고향을 지키며, 사랑하며 살고 있는 두 친구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