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 붙이는 것도 내력인가 보구나.”
--- 김병호 (베드로)
나의 시골집 컴방(책장과 pc가 놓인 4평짜리 작은방),책상 앞에는 십자고상과 함께 메모지와 A4 용지들이 어지럽게 붙어있다.
‘2020년 새해 첫날의 다짐’ ‘마음에 새겨둘 성경 말씀’ ‘하루를 시작하며 드리는 기도’ ‘안 하기 7훈’ ‘신심성찰(信心省察)’
‘주님,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그 아래에는 화살기도를 올려 드리는 분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등이다.
어떤 것은 여러 해 붙어있어 종이 색이 바랜 것도 있고, 어떤 것은 년 초마다 새로 붙인 것도 있다.
또 어떤 것은 생각 날 때마다 그때그때, 추가해서 써넣은 것도 있다.
모두가 나 혼자 보기 위해 써 붙인 경구(警句)나 성구(聖句), 계획서, 기도문 등이다.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이렇다.
‘2020년 새해 첫날의 다짐’에는 1. 나서지 말자.(*내 가 한 일, 생색내지 말자. *잘 모르면서 아는 체하지 말자.
*배울 생각 없는 사람에게 가르치려 하지 말자.) 2. 뱃살을 빼자(*운동시간과 체중조절 목표) 3. 올해는 이렇게 살자.
(*남의 말을 하지 말자. *묵주기도 매일 5단 바치기. *작은 일에도 감사하며 살자. *남을 배려하고 칭찬을 많이 하자)라고
쓰여 있다.
‘안 하기 7훈’에는(40대 중반에 만든 자경문(自警文)이니까 대충, 35년은 된 것이다.)
1. 잘 못된 일, 남의 탓 안 하기. 2. 뒤에서 남의 험담 안 하기. 3. 웬만해선 거짓말 안 하기. 4. 내 앞에 와서 도움을 청하는 데,
외면하지 않기. 5. 음식물 남겨서 버리지 않기. 6. 공짜로 생기는 돈 바라지 않기. 7. 원칙에 어긋난 일, 남이 한다고 따라 하지 않기라고 쓰여 있다.
이쯤 해 두자.
써 붙인 것들의 내용을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고 ‘써 붙이는 것도 내력인가"가 주제니까 그 이야기로 돌아와야 한다.
써 붙이기의 원조는 나의 선친이시다. 아버지는 공무원이셨다. 보통 공무원이 아니라 진짜로 공무에만 올 인하신,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공무원이셨다.
집에는 국경일이나 소속 관청의 행사 때 받은 표창장으로 여덟 평 안방을 온통 도배할 지경이었지만,
표창장과 승진과는 별로 상관관계가 없었던 것 같다.
그 아래, 앉은키의 눈높이에는 아버지께서 쓰신 붓글씨와 정부에서 배포한 국민계도용 유인물들이 낡은 도배지 위에
붙어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으로는 ‘혁명공약’ ‘국민 교육헌장’ ‘간첩 식별 법과 신고 요령’과 같은 유인물과 아버지의 휘호(揮毫)인
‘사무사(思無邪)’니 ‘멸사봉공(滅私奉公)’같은 공직자의 좌우명과 우리 가족에게 훈계하는 글로 생각되는
’근검절약‘ ’부지런하고, 정직하자‘ 그리고 가훈인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등이 있다.
부전자전이라고 했던가? 나도 결혼하여 가장이 되면서부터 '써 붙이기'가 시작되었다.
결혼하고 단칸 월세 방에 써 붙인 최초의 글은 아무래도, 두 사람의 결혼 약속을 적은 ‘건강, 성실, 명랑’이 아니었겠나 싶다.
그로부터 시작된 써 붙이기는 위인들의 명언이나 좌우명들로 이어졌다.
예컨대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 공명의 ‘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에서 유래했다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도
빠지지 않는 레파토리였고, 원효대사(元曉大師)의 오도송(悟道頌)이라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도 좋아하던 글귀였고,
진실불허(眞實不虛)같은 반야심경의 구절도 나의 좌우명이었다.
50대 초반에 천주교로 개종하기까지는 독실한 불교신자였으니, 자연히 불가의 글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되면서 인생이 달라졌고, 신앙이 달라지니 사언행(思言行)이 바뀌었다.
거기다가 34년을 신입사원에서 계열사 CEO가 되기까지 외곬으로 일하던 직장에서 퇴직하고, 회갑의 나이에 객지 타향으로
귀촌(歸村)하여 오직, ‘주(主 예수님) 바라기'로 살기로 하였으니 그로부터 써 붙이는 글들은 온통,
성경 말씀과 기도문과 신앙의 다짐들뿐이었다.
하루는, 어머니께서 한 말씀하셨다. "써 붙이는 것도 내력인가 보구나."
"그러게요. 아버지 하시던 걸, 제가 고대로 하지요?"하고 함께 웃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 흉보다가 닮는다는 말이 있듯이 어릴 적에는 "아버지, 그만 써 붙이세요."하며 엄마 편을 들기도 했는데,
이제는 내가 아내에게서 "거실에는 써 붙이지 마세요. 손님들이 와서 보면 좀 그래요.“하는 당부를 듣게 되었다.
그래서 거실에는,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세 번째로 바뀐 가훈인 '경천순명, 홍익상생(敬天順命, 弘益相生)'은
아내의 요청을 따라, 서예가 선배께 부탁하여 휘호(揮毫)를 받아, 매직펜으로 쓴 나의 글씨와 바꿔 걸어 놓았다.
외람되지만, 가훈의 뜻을 풀이하자면, '경천순명(敬天順命)'은 하느님과의 관계로서 '하느님을 우러러 경배하며
그 명하심에 순종하고', '홍익상생(弘益相生)'은 인간과의 관계로서 '세상에 널리 유익하도록 서로 돕고 사는' 사람이 되자는
뜻이다.
첫댓글 항상 품위 있으시고 덕망이 배어 있으신 모습에 경의를 드립니다. 내내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