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상
최진실의 남편이었던 조성민은 순식간에 바뀌는 최진실의 얼굴에 사람이 무서웠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연기자의 본래의 얼굴은 카메라가 돌고 있을 때일까 아니면 카메라가 꺼질 때일까? 우리 모두 연기자임이 일부의 진실이다. 진정한 진실은 자신을 마주할 때뿐이다. 불쌍하고 고독하고 암담하고 분노하고 무기력하고 소심한 얼굴이 자신이 민낯이다. 대중 앞에, 카메라 앞에 웃음과 눈물은 가짜다. 남들이 볼 때를 기다려 흘리는 웃음과 눈물처럼 위선적인 것도 없다. 그런 진실은 세상 여기저기에 널부러져 있다.
사회는 인간에게 삶의 터전인 동시에 죽음의 무대이다. 개별 인간은 자신의 언어, 행위, 의식, 욕망 등에 관하여 자신의 의지와 기호를 선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타당한 가치 아래 실현할 수 있는 권리를 지녔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노동력이나 퍼스낼리티와 같은 항목을 내다 팔아야 하는 필연적 구조에 갇힌 존재이며, 먹고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할 뿐 아니라 위험이나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정직함과 소신도 굽히지 않을 수 없는 사회의 단편 속의 존재이다.
이것이 인간이 자신의 창조주에게서 받은 자유의지라는 작디작고 무서운 선물이다.
프랑스 인권선언은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서 생활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명기하고 있다. 인류의 죽음을 무릅쓴 투쟁으로 쟁취한 이 자유와 권리는 행복까지 포함시키지는 않는다. 행복해지든지 불행해지든지는 개별 인간의 몫이다.
우리의 삶은 이러저러한 사연을 지녔다. 세상의 고리는 항상 우리를 붙잡고 모두와 관계한다. 혼자만의 삶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로빈손쿠르소의 무인도의 나날은 실제 인간의 삶이 아니다. 하다못해 똥개라도 옆에 있어 말이라도 나누어야 사는 것이다. 나의 얼굴을 타인의 눈과 좌우 도치된 거울만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우리의 삶은 타자와의 얽힌 실타래와 같다
삶은 그것이 아름다워서,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다. 삶이기에 사는 것이며, 무엇인가 이루려고 노력하고 지향한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 어디를 향하고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진정 살아야 할 만한 가치를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 이 소정의 노래 〈살다 보면〉의 가사처럼, 우리는 그저 ‘살다 보면 살아지는’ 삶을 살고 있다.
이 우울하고 삭막한 삶에서 위안의 원천은 우리의 모든 죽은 어머니들이 말해주던 삶에 대한 주술이다.
혼자라 슬퍼하진 않아
돌아가신 엄마 말 하길
그저 살다 보면 살아진다
그 말 무슨 뜻인진 몰라도
기분이 좋아지는 주문 같아
너도 해봐 눈을 감고 중얼거려
그저 살다 보면 살아진다
그저 살다 보면 살아진다
눈을 감고 바람을 느껴봐
엄마가 쓰다듬던 손길이야
멀리 보고 소리를 질러봐
아픈 내 마음 멀리 날아가네
소리는 함께 놀던 놀이
돌아가신 엄마 소리는
너도 해봐 눈을 감고 소릴 질러
그저 살다 보면 살아진다
그저 살다 보면 살아진다
눈을 감고 바람을 느껴봐
엄마가 쓰다듬던 손길이야
멀리 보고 소리를 질러봐
아픈 내 마음 멀리
내 마음 멀리
아픈 내 마음 멀리 날아가네
그저 살다 보면 살아진다
우리에게 불행을 참고 인내하게 하는 성실의 본원은 우리의 의지 너머에 있다.
인간의 수명이 유한한 것이듯 우리의 남은 인생도 유한하다.
세르반테스의 말처럼 ‘희망이 있는 한 생명이 있고,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이다. 그러나 이제 젊은 날의 희망과 열정은 거의 사그라들었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지나고 난 후 추억은 남고 그것은 처참하거나 아름다울 것이다.
거짓이란 결국 속았다는 감정 외에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는다. 과도하게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고, 어디에 도달하고 싶고,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싶다고 매달리면 그것이 스스로와 세상을 괴롭히는 거짓이 될 뿐이다. 무엇인가 이루고 싶다는 것은 자신을 학대하는 일과 같다. 우연 또한 우리가 설명하지 못하는 필연의 다른 언어일 수 있다. “되려면 어떻게든 되고, 안 되려면 어떻게 해도 안 되는 거다”라고 말하면 된다. 세상의 확률은 언제나 반반이다. 동전의 확률과 같다.
추악한 정치꾼들이 내년 대선을 앞두고 시끄럽게 짖고 있다. 세계 어느 민족이나 국가가 역사에 죄를 저지르지 않은 나라가 있는가? 용서받지 못할 죄악을 저지르고도 역사에 생생히 기록한 나라를 보지도 못했다. 정치란 그 나라의 수준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문화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곳에 세익스피어나 괴테가 나올 수 없다.
마키아벨리는 큰 불이익에는 꼼짝하지 못하면서 작은 피해에는 어떻게든 앙갚음하려는 것이 민중이라고 하였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 정치란 원망과 복수와 죽음의 본능에서 동력을 끌어온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존속되든 사회주의가 되든 제2의 남미가 되든 다 민중의 선택이다. 아들과 손자들은 또 그들 나름의 선택과 책임을 부여받을 것이다. 우리는 무효표가 될는지 모르는 한 표의 참정권을 행사할 뿐이다. 이제 우리는 구경꾼에 지나지 않는다.
남은 인생에 욕심은 사소한 것에 한정해야 한다. 이제 거창한 무엇은 없다.
하루 하루가 그저 실망과 절망을 면하면 다행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오늘도 할 일이 있다.
백일홍 밭에 물주기.
늙은 개들에게 밥주고, 똥 치우기.
잔디밭에 잡초 뽑기.
그리고, 벗의 전화 기다리기
첫댓글 후산 글 잘 읽었소.수 십년 이사를 안 했더니 방충망이 낡아 살면서 삿시와 방충망 교체공사를 할려니 보통이 아닌 데 쓸모 없다고 혼자 문산 산행할려고 지하철 타고 가는 중에 글 잘 잀었소.워낙 글 재주가 없어 댓글도 부담스럽소.주어진 삶이니 최선을 다 할 수 밖에,또 좋은 글 기다리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