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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어풍대08블로그임다 원문보기 글쓴이: 어풍대08
안남국왕에서 화산이씨로 | ||
이공온(李公蘊)은 화산이씨의 시조로 안남국(安南國) 사람이다. 교지군(交趾郡)의 왕이었다고 한다. 송나라 진종 대중상주 13년에 안남왕 여환(黎桓)의 차자인 교지군왕 지충(至忠)이 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는데, 음란하고, 잔악무도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 이공온의 아들인 이명제·이명창 등이 다투어 공격하고자 하였고, 송나라 시랑 능책(凌策)도 병사를 내어 징벌하기를 바랐다. 이공온은 병사를 내어 피 흘리지 않고 정벌하였다. 천자가 기뻐하여 정해군 절도사를 제수하였고, 또 교지군왕으로 봉하였으며, 천희 원년 정사년에는 남평왕으로 봉해졌다. 인종 천성 7년 기사년에 타계하였다. 재위는 20년이다. 인종 천성 7년에 즉위하여 경오년에 서평왕 조덕명과 더불어 공신으로 책록되고 남평왕으로 봉해졌다. 지화 2년에 타계하니 재위는 26년이다. 교지국왕 이공온의 6대손이고, 안남왕 이용한(李龍翰)의 아우이다. 본디 인자한 성품이었으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형제간에 공경하여 덕망이 높았다. 왕인 형님이 동생의 그러한 덕망을 사랑하여 왕위를 물려주고자 하였다. 이용상은 거듭 세 번이나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진일희(陳日熙)가 나라를 빼앗는 변란이 일어나자 종리종 보경 2년 그 종족의 군장인 슬포제기(瑟抱祭器)와 더불어 동쪽 바다에 배를 띄워 탈출하였다. 이용상은 1226년(고려 고종 13)에 옹진현 창린도에 표착하여 귀화하였다. 지금의 옹진군 조면 화산리에 살았으므로, 고종으로부터 화산군으로 책봉되고, 화산을 본으로 삼게 되었다. 이간은 고려에서 처음 벼슬을 한 화산이씨로, 벼슬이 금자광록대부 벽상3한 3중대광 도첨의 좌정승 예문관 대제학 감우문관사 등을 지냈다
충효당의 정문은 작고 아담하다. 한팔 정도 되는 공간에 양쪽 나무판 문을 달고, 그 앞으로 반팔 정도 나아가서 앞 선의 기둥 둘, 또 그 뒤로 반팔 정도 나아가서 뒤 선의 기둥 둘을 키 높이가 조금 넘도록 세워 올리고 위에 지붕을 덮었다. 이 대문은 좌우로 역시 키 높이에 조금 못 미치는 담장을 좌우에 일선으로 거느리고 있다. 충효당은 산기슭의 기울기를 평면으로 만들고 그 위에 올려 세운 건물이 아니다. 충효당이 서 있는 바닥면은 그대로 경사면이다. 최소한의 인공을 가하여 옆으로 기울기를 좀 조정한 흔적은 있지만, 위 아래의 기울기를 잡은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제 일선의 기둥들이 놓인 지점은 정문 안에 마련된 좁은 안마당 뒷면이다. 주초는 조금 사각 모양으로 다듬어서 썼다. 기둥은 상당한 굵기인데, 제 1선의 기둥은 원형이다. 제 1선의 기둥은 키보다 높은 지점에서 건물의 바닥구조와 만난다. 통나무를 거칠게 각형으로 다듬은 것들이다. 제 1선의 기둥 뒤편으로는 바닥면이 두 뼘 정도 높이의 계단으로 처리되어 있다. 그 윗면의 폭도 그 정도이다. 이 계단은 건물의 양 끝까지 나아간다. 이를테면 방이 있는 부분에는 이 계단 면이 마련되지만, 마루가 있는 부분에서는 만들어지지 않는 식이다. 어쨌든 건물의 바닥면은 이런 방식으로 처리되어 실제적으로 건물이 가설되는 평면이 마련되는 것이다 ******* 화산이씨충효당!!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창평리 220 창평리이야기.
화산이씨(花山李氏)는 비(非) 중국계(中國係) 귀화(歸化) 성씨(姓氏)로 시조(始祖) 이용상(李龍祥)은 베트남 리 왕조(李朝)의 개국왕(開國王)인 이태조(李太祖) 이공온(李公蘊·Ly Cong U?n)의 7대손(七大孫)이며, 6대 임금 영종 이천조(李天祚·Ly Thien T?)의 일곱 번째 아들이다. 당시(當時)의 고려(高麗) 고종(高宗)은 이를 즉은(惻隱)히 여겨 이용상(李龍祥)에게 그 지역(地域)의 땅을 주어 그를 화산군(花山君)으로 봉(封)하여 정착(定着)을 도왔다. 원(元)나라 침입(侵入)했을 때는 지역주민(地域住民)들과 함께 몽골군과 싸워 전과(戰果)를 올리기도 하였다. 본관(本貫)을 화산(花山)으로 칭(稱)하였다. 베트남 인사(人事)가 한국(韓國)을 방문(訪問)할 경우(境遇), 이들을 방문(訪問)하는 것도 관례(冠禮)가 되어, 화산이씨(花山李氏)가 양국관계(兩國關係)에서 가교(架橋) 역할(役割)을 하고 있다. 나라에서 사복시 주부(司僕寺 主簿)의 관직(官職)을 내렸으나 취임(就任)하지 않았다. 일찍이 부친(父親)을 여의고 모친(母親)을 섬김이 어느 효자(孝子)보다도 지극(至極)하였고 문장(文章)이 또한 숙휘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읍(邑)에서 의병(義兵)을 이르켰는데 광산인(光山人)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가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부르니 당시(當時) 나이 19세였다. 분연(憤然)히 적개(敵愾)하는 뜻이 있었으나 모친(母親)이 계심(桂心)을 어렵게 여겨 모친(母親)에게 들어가 아뢰니 모부인(母夫人)이 “남자(男子)가 세상(世相)에 태어나 국가(國家)를 위하여 죽는 것은 유감(遺憾)없는 일이다. 너는 모름지기 국가(國家)를 위하여 힘을 다하고 죽고 사는 것을 이 늙은 애미를 위하지 말아라” 이리하여 문경(聞慶) 진중(陣中)에 달려가 왜적(倭敵)을 맞나 혈전(血戰)한 나머지 전사(戰死)하기 직전(直前)에 시(詩)에 백년(百年) 사직(司直)을 보존(保存)하려는 계책(計策)으로 6월에 군복(軍服)을 입었네 국가(國家)를 근심(謹審)하다 몸은 헛되이 죽으나, 어버이 못잊어 혼백(魂帛)만 홀로 돌아가네(백년재사계(百年在社計), 유월저융의(六月著戎衣), 우국신공사(憂國身空死), 사친혼독귀(思親魂獨歸)라 하고 장렬(壯烈)히 전사(戰死)하였다.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의 격문(檄文)에 따르면 천성(天性)이 순효(純孝)하고 풍모(風貌)가 뛰어나 기상(氣象)이 늠늠하다 하였고 그 스승인 동강(東江) 권사온(權士溫)은 대기(大器)라고 인정(仁情)하였고 그 시신(屍身)을 찾을때 죽은 모습(冒襲)이 바람을 몰고 우레(又賴)를 굴리는듯한기상(氣象)이라고 하였으며 신야옹(新野翁) 이인행(李仁行)은 유허비(遺墟?)명(名)에서 “그 대절(大節)을 세워것은 독실(獨室)한 학문(學問)의 덕(德)과 선조(先祖)가 가르친 의리(義理)를 몸소 실천(實踐)한 것이라”고 하였다. 직장(直長) 황소공(黃昭公)이 죽음앞의 시(詩)를보고 감동(感動)하여 당(堂)에다 “충효(忠孝):두 글자를 써불여 정려(旌閭)를 대신(大神)하였으며 또한 감사(監司)의 계문(啓文)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행장(行狀)은 참판(參判) 문소(聞韶) 김희주(金熙周)가 묘지명(墓誌銘)은 생원(生員) 권은래(權恩?)이 유허비명(遺墟?銘)은 익형(翊衡) 신야(新野) 진성(眞城) 이인행(李仁行)이 각각(各各)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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