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이야기3-2 (보길도2; 윤선도 유적지)
안식과 사색의 섬으로 불리는 보길도. 여름 휴가철에 안식은 물론
사색까지 함으로써 심적, 정신적 피로를 줄이고 영혼의 위로까지
받을 수 있는 휴가지가 있다면 물론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길도를 그토록 많이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그것이 내 40년 여행경력에서
경험한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여행지에서 실망하지 않으려면
큰 기대보다는 작은 것에 대한 아름다움을 찾는 일이다.
그것이 여행을 좀 더 알차게 해주고 행복하게 해준다.
보길도에 있는 윤 선도의 유적지는 기대만큼 화려하지 않다.
수 백 년이나 된 유적지가 잘 보전되어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뭔가 더 큰 것을 바란다면 그것은 욕심이다.
실망이 크면 불만이 생기고 결국은 여행의 목적을 잃어버리게 된다.
인생도 그와 같다. 과욕은 불급!
욕심이 과하면 결국 자신이 피해를 본다. 작은 행복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은 큰 행복도 느낄 수 없는 법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이런 마음으로 내 글을 읽어달라는 것이다.
내 글과 사진을 통하여 잠시나마 작은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나중에 내 사진의 장소를 갔을 때 ‘뭐 이래?’,
‘이래서 사진은 믿을 수가 없다’, ‘그 사람이 거짓말 했네’ 등등
불평하지 마시기를. 내 귀가 간지러울테니까.^^ 사진은 쓰레기장의
더러움도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마법이 있고 그것이 매력이다.
이제 윤 선도에 대해 간단히 피력한다면 그는 정철, 박 인로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으로 불린다. 윤 선도가 서인인 정철에
의해 유배당하는 등 성품이 강직하고 시비에 타협이 없어 자주
유배를 당했다. 그가 살던 시대는 광해군, 인조반정, 병자호란 등의
과도기였고 정치적으로 분쟁이 끊이지 않았기에 일찍 보길도에
은거하여 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은 채 보길도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가히 풍류시인이라 하겠다.
사설이 좀 길었지만 이 마당에 국문학사에 있어서 최고봉이라는
윤 선도의 작품세계를 하나만 언급하고 사진을 보기로 하겠다.
어부사시사 ; 40수 시조로 된 윤 선도의 대표작이다.
앞 내에 안개걷고 뒷 뫼에 해 비친다
밤물은 거의 지고 낮물이 밀어온다
江村에 온갖 곳이 먼 빛이 더욱 좋아라
배떠라 배떠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중략)
사진1. (세연정;사적 368호) 매표소에서 관람권을 산 후 출입구를 지나면 바로
수림에 둘러 싸인 세연정의 정자가 보인다. 한 낮의 폭염이 절로 그늘을 찾게 할
때 눈에 보이는 풍경으로만 시원한 느낌을 준다. 세연정 앞의 갈림길 좌측으로는 판석보가 있다.)
사진2.(세연정과 회수담) 우측에서 본 세연정. 녹음이 짙어 폭염이 절로 가신다.
연못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연꽃이 몇 개 피었는데 봉오리가 작아 사진에는
연잎만 보인다. 정자는 수 백 년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으나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일반적인 정자가 아니라 겨울에는 불을 지필 수 있는 형태로 온돌과 아궁이가
있고 창문과 방문이 다 있는데 지금은 여름이라 전부 위로 올려 바람이 통하게 되어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 문들의 창호지가 많이 뚫려져 있어 유적지 보전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에 보이는 연못은 회수담이다. 물길이 거의 막혀있어
깨끗하지 못하지만 연꽃이 피어 상쇄시켜준다.
사진3.(세연지) 세연정을 둘러 싼 연못이 세연지이다. 상, 중, 하단의 세연지로
구분하지만 구별이 안될 정도로 연결되어 있다. 세연지는 격자봉에서 흐르는
계류를 국내 유일의 석조보인 판석보로 물을 대고 회수담은 이 세연지의 물을
끌어들여 만든 인공호수이다.
사진4.(사투암) 세연정 옆에 붙은 커다란 바위. 중단 세연지에 있다. 사진
뒤쪽으로 판석보가 있고 우측 계곡위로 옥소봉이 있다.
사진5. (세연지와 혹약암) 세연이란 ‘주변 경관이 매우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 느낌이 온다. 다만 비가 적어 물이
조금 혼탁하지만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세연지에는 혹약암 등 7암이 있는데
그 뜻이 다 있지만 생략한다.)
사진6.(상단에서 본 세연지) 고산은 세연지에 배를 띄우고 어부사시사를 노래하며
풍류를 즐기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윤 선도는 이곳 세연정을 중심으로 부용동
원림을 조성하였는데 낙서재, 곡수당 등 그 규모가 무려 2만 5천 여 평에 달한다.
사진7. (상단과 중단 세연지 사이) 바위와 수림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풍경이다.
사진 좌측으로는 계속 숲이 있고 토성이 낮게 조성되어 있는데 이 토성을 담으로
하여 초등학교가 있다. 사진을 촬영하는 곳은 예전에 봉화대가 있는 곳이지만
지금은 숲으로 변해있다. 매표소 입구에서 이곳까지만 탐방이 가능하다.
거리는 불과 100여 미터. 세연지 건너편으로 가거나 옥소봉 등산로는 보이지 않고
그곳으로 가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보길도에 온 사람들은 꼭 한 번 들러가는
곳인지라 관람객은 휴가철답게 많은 편이다. 심지어는 단체관람객이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이동하는 모습도 자주 눈에 뜨여 촬영이 쉽지 않았다. 이럴 땐
가이드의 설명에 귀 기울이는 것이 공부다. 하하.
사진8.(판석보)이것이 세연지에 물을 끌여 들이는 곳이다. 충북 진천의 농다리처럼
보이지만 목적이 전혀 다르다. 물이 많으면 판석보 위로 넘쳐흘러 작은 폭포처럼 보인다고 한다.
사진9.(회수담 연꽃1) 회수담의 연꽃은 작은 연꽃들이라 새롭다. 윤선도가 어릴 때
절에서 오랫동안 공부한 때문인지 그 때도 연꽃을 심었나?
사진10.(회수담 연꽃2)
사진11.(회수담 연꽃3)노랑가시 연꽃이 예쁘다.
사진12.(회수담 연꽃4)
한 여름 폭염이 난무할 때도 정자에 비스듬히 누워 쉬면서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을
벗 삼아 한 잔씩 기울이고, 한 잔 술에 시조 한 수 읊으며 자연을 노래하고, 눈으로는
바람이 지나가는 흔적을 쫓아 나뭇가지의 떨림과 연못의 잔 물결을 담고, 마음은
연꽃의 의미를 생각하니 보이는 곳마다 아름다움이요 고개를 들면 옥소봉의 녹음이
짙고 하늘 또한 푸르러 피안의 세상이니 정치적 분쟁이나 조선 역사의 과도기적
혼란과 피폐를 잊을 수 있었겠다.
사진13.(동천석실) 1981년, 1991년. 두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로 유적의 일부가
밝혀지면서 1992년 사적 368호로 지정되면서 이곳 동천석실도 복원되었다.
산 중턱에 위치하여 등산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나 또한 망원렌즈로 찍었는데
더위가 심하여 오르기는 포기하였다. 석실 주변에 차바위, 용두암, 월대, 석폭
등이 있고 산 아래 입구에는 연지, 석담, 석천, 석계, 희황교가 있으나 물이
말라 보기에 좋지 않았다.
석실의 뜻처럼 예전에는 이곳에 도서를 모아두고 윤 선도가 자주 찾으며 부용동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라 윤 선도가 자주 찾으며 제일의 명승이라 했다고 한다.
석실 바로 앞의 용두암 사이에 도르레를 설치하고 물건을 운반할 경우에는 이를
이용했으며 넓고 평평한 차바위에 앉아 차를 마셨다고 한다.
안내책자에는 우회도로가 있어 차를 이용하여 근처까지 가도록 되어 있으나 공사
중이라 입구를 막아 놓은 것이 도로 공사 중인지 아니면 저수지 상수원보호 때문에
막아 놓은 것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많은 차들이 돌아나갔다.
세연정 뒤편에 위치한 곡수당은 이제 건물만 들어서고 토목과 조경은 공사 중이었으며,
낙서재는 터만 남아 사진을 올리지 않는다. 또한 윤 선도 문학 체험공원도 사진과 설명 생략한다.
많은 시간 투자하여 글을 올리는데 아무도 시원한 냉커피 한 잔 배달시켜주는
사람 없네. 훌쩍훌쩍. 엉엉. 휴가 다녀온 지 어느새 2주가 넘었는데 방콕하며
유배생활하고 있는 민 삿갓. 그래도 글은 계속됩니다. 큭큭. 다음엔 완도로 갑니다.
첫댓글 사진 올리기에 문제발생하여 머리를 썩히느라 순서가 바뀌었네요^^죄송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