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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사티
Eric Satie, 1866-1925, 프랑스
사티는 낭만주의나 인상주의에 반대하여 감정의 표출을 절제한 채 단순하면서도
기발한 음악들을 써낸 '세기말의 반항아'였다.
괴팍한 아이디어와 신랄한 유머, 그리고 신비주의와 순수에 대한 이념이 그의 독창적인 음악세계를 만들어냈고,
그것은 그가 사용하는 지시어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지시어들을 "이것은 연주자와 작곡가 사이의 암호이다."라고
해석한 그는 때때로 비유적인 의미를 가지고 본질적 의미를 표현해 보기도 하고,
샤티
1890년에 몽마르트로 이사간 그는 기괴한 옷을 입고 나이트클럽에서 피아노를 치며 생활비를 벌었다.
이 시기부터 드뷔시와 친교를 가졌으며, 또한 신비주의적 비밀결사인 '장미십자교단'의 전속작곡가로 활동하면서
"장미십자교단의 종소리"와 같은 작품을 써냈다.
그는 '지휘자 예수의 예술 메트로폴리탄 교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유일한 교인이 된 적도 있다.
1898년 파리를 떠나 아르쾨유로 간 그는 조그만 방에 기거하면서 죽는 날까지 살았다.
항상 아마추어로 취급받는데 대해 불만을 느낀 사티는 1905년엔 스콜라 칸토룸에 입학하여 알베르트 루셀에게
음악을 배웠으나 그의 음악은 과대망상증, 기벽증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1917년에 콕토의 대본과 피카소의 무대장치에 의한 발레 "파라드"의 음악을 맡으면서 그의 가치는 반전되었다.
시대를 초월한 대담한 수법과 혁신적인 사티의 사상은 미래파의 출현을 예고해주었고, 초현실주의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장콕도가 그린 샤티, 데생
뉴에이지의 시초가 어떤 누구 하나에 의해서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명상적 특성, 간결미, 맑고 깨끗한 화성, 절제된 멜로디,
신비스러움 등의 모습이 바로 1866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에릭사티(Eric Satie)의 음악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뉴에이지 음악은 1990년대의 중/후반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다원론적 경향에 묘하게 일치된 점이 많았고,
요한 파헬벳의 '카논'이나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등에서도 일찌기 그 조짐이 보였었지만 대중들에게 쉽게 이해되지 못했다가
최근에서야 몇몇 아티스트들에 의해 확산되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현재 대중들이 수용할 수 있는
문화적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대를 앞서간 에릭사티와 같은 놀라운 천재들의 공헌도
이바지한 바가 상당한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하여튼, 시대를 앞서간 천재 에릭사티의 음악에서는 따듯하지만 묘한 부조화를 이루고있는 마티스의 색감을 느낄 수 있고
한사람의 천재인지 한사람의 광인인지 모르겠다는 스페인의 건축가 가우디의 건축물이,
그것도 우스꽝스랍게 튀어나온 회화적인 굴뚝이 생각난다.
"Gymnopedie".....복수 여성 명사.
그리스어의 '금노스:벌거숭이'와 '파이스 또는 파이도스:어린이'에서 유래된 말. 고대 그리스의 리케다이몬(스파르타)에서
행해진 나체의 어린이 또는 남성에 의한아폴론이나 박카스를 찬미하는 춤을 말한다.
이말에는 나체와 소년이란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샤티는 이 이색적인 소재를 프로벨의 소설 (사란보)의 일부에서 착상하여
1888년에 3곡의 조곡으로 작곡하였다.
그후 드뷔시가 이 조곡의 1번과 3번을 관현악으로 편곡하여 현재 연주되고 있는데, 드뷔시는 3번을 1번으로 하고 있다.
같은 멜로디가 3개의 짐노페디에서 계속하여 반복되고 있지만
짐노페디는 악기의 특성과 그 편성에 따라 느낌을 달리하는 이국적인 선율을 지니고 있다.
사티의 연인 수잔 발라동
Suzanne Valadon /Self-Portrait,1909
19세기 말 프랑스의 수도 파리. 그 중에서도 몽마르트 언덕은 세기말의 혼돈 속에서 방황하는 예술가들의 고향이었다. 이 시기 몽마르트는 인상파라고 불리워진 일군의 화가 군단과 음악가들을 배출해냈다. 르느와르와 로트렉, 드가 등의 화가들이 몽마르트 뒷골목의 싸구려 술집에서 압상트 술을 앞에 놓고 내일 먹을 거리와 자신의 예술이 나갈 바에 대해 고민하며 취해갔다.
그들의 귓전에는 무명의 음악가였던 에릭 사티의 피아노 연주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 모든 예술가들의 베아트리체와 같았던 여인이 한 명 있었다. 그녀는 화가들의 모델이었고 음악가들의 벗이었으며 그들 모두의 애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 스스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19세기 말 예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 쉬잔 발라동이다.
한편 한평생을 가난 속에서 무명의 음악가로 살았던 에릭 사티는 쉬잔과 6개월간의 짧은 동거생활이라는 사랑을 나누었고 그 사랑을 한평생 간직하며 살았다. 쉬잔 발라동은 그들의 애인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간직한 예술적 혼을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쉬잔 발라동이 그린 젊은날의 샤티
쉬잔 발라동이 그림 그리는 일과 아들에게 헌신적이었지만,
그녀에게도 뜨거운 가슴이 넘쳐났습니다.
매력적인 그녀는 여러 염문을 뿌리기도 했으며, 44살의 나이에 자기 아들보다 어린 23살의 화가 위터와 결혼을 하기도 합니다.
(역시,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은 뭔가 다르긴 합니다 ^^)
작곡에서 뿐 아니라 괴상한 옷차림으로도 유명했던 사티는 몽마르뜨르의 싸구려 술집에서 피아노를 치다가 쉬잔을 알게되어 사랑에 빠져듭니다. 평생독신으로 지낸 사티에겐 유일하게 염문을 뿌렸던 상대였으며,
그의 나이 27살에 쉬잔을 만나반년간 열애에 빠져 들었습니다.
샤티가 그린 쉬잔 발라동
쉬잔이 그렸던 초상화와 그가 그렸던 수잔의 초상화가 죽는 순간까지 그의 방에 나란히 붙어있었다고 하니...(한 번 붙이면 떼어내기 싫어하는 아주 게으르거나 무관심한 사람이었거나 평생을 수잔의 매력에 빠져 산 사람이거나 둘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평생 가난한 카바레 피아니스트로 살았으나 음악열정을 불살라 새로운 현대 음악어법을 창조해낸 천재 작곡가, 언제나 검은 모자에 검은 옷과 검은 고양이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박쥐우산을 들고 다녔고 악보엔 이상한 지시어를 남겼던 괴짜 작곡가 에릭 사티(1866~1925)의 일생은 그 자체가 19세기 동시대에선 열정과 자유분방 그리고 고독을 즐겼던 사티의 예술과 삶은 하나의 소설감이었습니다.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에릭 사티가 예술가로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죽은 지 38년 만이었습니다.
에릭 사티를 죽을 때까지 따라다닌 것은 가난과 독신이었습니다. 그는 평생 ‘무슈 르 포브르’ 즉,
‘가난뱅이 씨’라고 불릴 만큼 가난했으며, 단 한 번의 연애-쉬잔 발라동을 사랑한 것을 끝으로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묻혀 있던 그를 다시 발견한 것은 프랑스 영화감독 루이 말이었습니다.
[Malle, Louis, 1932.10.30~1995.11.24]
1963년, 루이 말 감독은 자신의 영화 <도깨비불>의 영화음악으로 사티의 피아노 곡을 사용했는데,
영화가 개봉되자 ‘정신이 아찔해질 만큼 아름다운 이 음악은 대체 누가 작곡한 거지?
뭐? 사티라고? 도대체 그가 누구야?’ 하며 전 세계가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마치 두껍고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는 계단을 올라가듯 툭툭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
<짐노페디>나 <그노시엔>. 큰 소리로 외치는 게 아니라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피아노 소리.
에릭 사티의 음악을 글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피아노를 치는 샤티
그가 한평생 사랑했던 여자, 쉬잔 발라동.
화가 툴루즈 로트렉과 르노아르, 퓌비 드 샤반의 모델이며, 그들의 연인이기도 했던 쉬잔.
사티는 그녀를 사랑했었죠. 사티는 일곱 살 때 죽은 어머니를 무척 사랑했는데, 샤티의 어머니와 쉬잔의 모습은
거울처럼 닮아 있었어요.
몽마르트르에서 살고 몽마르트르에서 죽은 쉬잔의 아들 그 소년이 훗날 ‘몽마르트르의 화가’라고 불렸던,
화가 위트릴로입니다. 위트릴로는 어머니 쉬잔을 사랑했고 쉬잔은 사티를 사랑했고 사티는 죽은 어머니를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사티와 쉬잔이 헤어진 건 어머니 때문이었으니까요.
르노아르의 모델을 하면서 그의 그림을 흉내내기 시작하며 화가의 꿈을 키워 가던 쉬잔은
사티에게 모델이 되어 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들의 동거는 반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어느 날 쉬잔과 사랑을 나누고 있던 사티는 맞은편 거울 속에서 벌거벗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게 되고,
깜짝 놀라 돌아보니 벌거벗은 쉬잔이 “당신, 갑자기 왜 그래요?”라며 묻는다. 그날 이후로 사티는 쉬잔과 육체적인
사랑을 나눌 수 없게 되었던 거죠... --;
샤티의 초상화를 완성한 쉬잔이 슬픈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이걸 그릴 때 내 몸과 마음이 참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어쩐지 이건 내가 그린 게 아니라,
내 몸 속에 들어온 당신 어머니가 그린 것 같아요.” 헤어지고 두 달 뒤 사티는 쉬잔에게 편지를 씁니다.
‘나는 어머니를 사랑했소.
그러나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 이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오.’
그 뒤 사티는 애달프고 슬픈 음악들을 계속 작곡하였지만 한동안 압생트라는 독한 술에 빠져 살았습니다.
쉬잔은 그녀의 소망대로 프랑스의 표현주의 화가로 성공하게 됩니다.
사티는 59세에 죽었습니다. 그가 죽은 뒤 아르크에 있던 그의 방에서 부치지 않은 편지 한 묶음이
발견 되었습니다. 수신인은 모두 쉬잔 발라동이었고 한 장의 사진이 있었죠.
쉬잔과 그의 아들 위트릴로와 개 한 마리가 나란히 있는. 그리고 뒷면에는
‘사랑스러운 쉬잔 발라동의 사진’이라는 사티의 고딕 필체가 남아 있는.
이 사진 속에 사티는 보이지 않습니다.
사티가 죽은 뒤 이 사진을 건네받은 쉬잔이 개 줄을 쥐고 있던 맨 왼쪽 사티의 모습을 도려낸 것입니다.
30여 년 세월이 흐른 뒤에야 겨우 배달된 사티의 편지를 받은, 61세의 유명인사 쉬잔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솟아나는 추억은 괴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지만….”
쉬잔이 개 줄을 쥐고 있던 맨 왼쪽 사티의 모습을 도려낸 것입니다.
그 말줄임표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숨겨진 의미 때문에 쉬잔은 사진 속 사티의 모습을 도려내 버렸던 것일까요?
사티의 이야기에 잠시 덧 글을 답니다. 재미있는 일화라 여기 그대로 옮겨 봅니다.
세계에서 가장 긴 음악은? 에릭 사티의 "짜증"
프랑스의 작곡가 에릭 사티는 그 기이한 행각으로도 유명한 작곡가입니다. 그의 작품인 Vexation "짜증"이란 작품은
기껏해야 약 1장 분량에 지나지 않지만 메트로놈 지시에 정확히 따라서 연주를 하면 대략 13시간 40분간 연주를 해야 합니다.
그것도 같은 멜로디를 840번이나 반복하도록 되어있는 그야말로 엽기적인 작품입니다.
당대의 내로라하던 전위예술가인 존 케이지가 사티의 친구로부터
이 악보를 입수 한 것은 사티가 죽은 뒤 이미 24년이나 지나서 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위예술가로 이름을 날리던 케이지도 이 악보를 보고서는
차마 할 말을 잃고 연주를 계속 지연해왔습니다
드디어 이 곡이 초연되던 날은 그로부터 15년이 더 지나서 이었습니다.
다만 도저히 혼자 연주할 자신이 없어서 4명의 동료와 같이 초연했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다카시 유지라는 피아니스트가 10시간왕복야간열차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서울대학교 학생식당에서 1995년 3월에 무려 40명의 음대생에 의해 초연되었습니다.
이 곡의 연주에 대해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비교적 유명한 피아니스트 3명이 이 곡을 연주하기로 하고 프로그램에는 작품명이나 연주시간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아는 사람이 보고 기겁이라도 하여 연주회장이 비어버릴까 해서이죠!
드디어 연주회 날...객석은 가득히 메워졌고 한 연주자가 나와서 이 곡의 제목을 설명 했습니다 순간 극소수의 청중은
"이키! 이거 큰일 났구나!" 했지만 이미 다수의 관객들의 박수소리에 그들의 놀람은 묻혀버렸습니다
그리고 시작된 느릿느릿한 연주...30분간 청중들은 열심히 들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멜로디가 계속 반복되면서 슬슬
청중들이 술렁이기 시작! 이후 지루할 때 인간이 보일 수 있는 갖가지 반응들이 속출하기 시작 합니다.
팔짱끼기, 다시 풀기, 머리 긁기, 코 만지기, 눈비비기 그러다가 한 청중이 급기야 하품을 하자 여기저기서 하품이 터지고
연주자에게 행여 실례가 될까 조심스레 입을 가린 청중들의 눈은 하품으로 나온 눈물로 촉촉해졌습니다.
약 2시간 후...
사회자를 대동한 다른 연주자가 나타나자 졸기 시작하던 청중들은 자세를 갖추고 박수를 칠 준비를 했습니다.
드디어 끝났구나! 그러나 사회자가 꺼내든 팻말은
"연주자만 휴식 없이 교체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드디어 몇몇 인내심에 한계를 느낀 청중들은 자리를 뜨기 시작했고 새로 나온 연주자들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교체하여 연주를 계속... 그러나 멜로디는 그대로 반복...
이미 객석은 절반이상이 비어버렸고 남은 절반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습니다. 이내 새 연주자가 나타났지만 청중들의
대다수는 이미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연주회자체는 지속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비평가와 지인들 및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는 10여명의 청중 외에는 객석은 완전히 비어버렸습니다.
단 한사람...맨 앞자리의 한 뚱뚱한 남자 한명은 땀까지 흘리면서 눈을 부릅뜨고 연주를 열심히 듣고 있었습니다.
그 후로 오랫동안 비가 왔...아니....같은 멜로디가 계속되고 연주자만 또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13시간 40여분이 흐른 뒤....
마지막 연주자가 종지부를 맺는 음을 누르고는 비틀대며 일어섭니다! 연주자들이 모두 나와 관객들(?)에게 인사하자
남아있던 최후의 몇몇 관객들은 그 연주자들의 의지와 결국 끝까지 버티고야 말았다는 자신들의 인내에 겨워
우뢰와 같은 박수를 쳐댑니다.
이 박수소리에 자느라고 미처 나가지 않던 청중들도
얼떨결에 일어나 박수를 칩니다.
짝짝짝짝짝짝짝짝......
그러나 연주자와 청중들의 진~~한 감동의 순간은 맨 앞자리의 뚱보 청중의 한마디 외침으로 인해
곧 경악으로 바뀌고 맙니다. 그는 힘차게 외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앙코르~~~!
<웹에서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