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인천 동구청쪽 금곡동 어느 판자집이 제가 태어난 고향입니다. - -;;
제가 겪었던 황당한 저의 6학년 담임선생님을 고발합니다.... ^^*
초등학교 ..그때에는 국민학교라고 불렀었지요 ^^.
아무튼 초등학교 6학년 졸업을 앞두고 생긴 일입니다..
그때는 각급학교마다 저금 창구(窓口)를 마련해놓고
학생들로 하여금 수시로 학급담임마다 저축실적을 상부에 보고하는 등..
허리띠 졸라매고 저축 / 저금을 강조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초등학교 입학때부터 거의 강제적으로 졸업 6년까지
얼마씩 형평껏 저축을 강요해서 도리없이 저금을 하였는데 ...
형편 좋은 가정은 한차례에 5원이나 10원
형편 어려운 가정은 한번 건너 뛰고 1원정도 씩 저금을 했었습니다.
그때 돈 1원이면 지금의 붕어빵 5개 정도였습니다. ( 그 시절 1원 = 지금의 1천원 ? )
1학년때부터 6학년 졸업할 때까지...
담임선생님이 저금할 돈 가져 오라고 닦달을 하면...
워낙 어렵던 그시절
미군부대에서 식탁에서 나오는 잔반쓰레기를
이것들을 모아 펄펄 끓여서
학교 근처 시장에서 일명 꿀꿀이죽으로 팔면..
또 그걸 사서 양푼에 담아 집으로 가져오면
기름진 영양식/별식으로 먹기도 했었는데
이는 한마디로 군대 짬밥 걷어다가 펄펄끓여 소독한후 먹는겁니다..웩~
가끔가다 꿀꿀이죽에서 담배꽁초도 나오기도 했다는데
우리 엄마는 먹지 말라고 하였으나 우리 형들은 어쩌다..한번씩 사와서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게 어렵던 시절..
학교담임선생의 강압적인 시달림과 재촉에 견디다 못해
저와 같은 아해들은 엄마를 (때로는 저금할돈 내놓으라고 울면서) 졸라서..
1원씩...1원씩 강제로 저금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간신히 간신히 ,억지로 억지로 초등 6년간을 저금했더니..
6학년 졸업식때쯤 되어서..
우리 담임선생님은 학부모들을 상대로 왈
노골적으로
" 아이들 저금한 돈 그까짓것.. 몇푼안되는것이니... 찾지말고 걍 나에게 달라..
다른 반들도 모두 그렇게 한다..우리반애들은 저금한 돈도 별로 안된다.. " 는겁니다..
" 담임선생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아이들 6년동안 저금한 돈을 담임선생에게 헌납해라???????? "
그래서 우리반 6학년 9반 우리반 애들 모두 6년동한 저축한 돈을
꼼짝없이 담임선생님에게 (강제적으로) 선물..당했습니다..ㅋㅋ ...- -;;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하는 비리이지요..
아이들 코묻은 돈 6년 저금한것을..노골적으로 담임선생님이 빼앗아 간다는것..
이게 말이 됩니까 ?
근데 그때에는 그게 통했나 봅니다..하하..
울 집사람도 그 당시 동인천역 근처 모 초등학교에 다녔는데..왈
" 나도 엄마를 졸라 ..저금한 기억은 있는데..졸업식때 그돈 찾아간 기억이 없다고 합니다.. "
그때에는 6년동안 저금한 돈을 선생님에게 선물하는것이...트렌드.. 대세였나 봅니다..ㅋㅋ - -;;
약 20년전쯤에..출근길에
바로 6학년때 그 담임선생님을 우연히 경인전철역에서 뵌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무 반가운 마음으로 인사드렸었습니다..( 물론 저를 못알아 보았지만..암튼 반가워서 ..)
인천 부평의 모 초등학교 교장이 되었더군요...ㅋㅋ
초등학교 6년동안 강제로 저금한걸..담임선생님에게 강제 헌납하고도..
그 어떤 부모도 " 걍..그런가 보다.."....하던 시절..
6.25 전쟁, 피난시절..동인천역 근처 율목동 답동이 인천상륙작전때 폭격받아 온통 불바다가 되던시절...
자식들 6년 저금한 돈을 담임선생님께 빼앗겨도 ..아무 말 없이 걍 이에 순종하던 시절..
우리네 80대 어르신들은 그런시절을 살아 오셨고..
지금의 50대 아줌마 아저씨들은 저금한돈 빼앗아 가는 담임선생님과 초등시절을 보냈답니다..
지금은 모두 돌아가신 우리 아버님과 어머님
그 아버님과 어머님에 의해 길러지던....
1960년...1970대 시절...
저의 그때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첫댓글 동시대의 추억을 간직합니다. 우린 그래도 저금찾아 그돈으로 롤라 스케이트 탔던 기억이 납니다. 전 1200원 정도 턴걸로 기억하고 그때 당시 자장면 1그릇값이 40원 정도 했던 시절입니다.
요즘 소담지님이 자랐던 동네에서 노인방문요양 실습중인데..환경이 2009년과 1960년대가 공존하고 있더군요.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의 집으로 이동목욕차를 타고 방문목욕을 가서 목욕을 시켜드리고 또 약간의 거동이 가능한 어르신들을 복지관으로 모셔와 목욕을 시켜드리면 "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나같은 늙은이가 빨리 죽어야 젊은이들이 고생을 덜 할텐데...너무 미안해요"라면서 너무 미안해 하십니다.
그러면 저희들은 이렇게 말하지요" ..어르신들이 젊어서 먹지도 쓰지도 못하고 저희들을 키우셨고 나라를 이만큼 잘 살게 만드셨으니 보살펴드리는 것은 당연합니다."라구요.--- 울 부모님들의 어려운 시절, 선생님의 비리이야기... 격동의 세월이 다 지난듯 평온해 보여도 요양원에 가보니...늘 나라에 순종하고, 자식에 헌신하신 울 부모님들의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것 같습니다.
그시절 그 어르신들이 아직 남아 있는한..전쟁은 아직 안끝났다는 하늘땅님의 의견에 공감합니다..
그런 것이 그 시대의 부모님들이 지혜이자 무식입니다. 말발도 논리도 힘도 없으면 바보처럼 당해 주는 것이 현명하죠. 같은 시대에 저는 서울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했는데 저는 그 적금을 찾은 기억입니다. 그런데, 6학년 초에 저의 담임이 저의 아버지에게 뭔가 서운한 것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저를 벽에 공을 튀겼다는 이유로 나가 뒤로 몇 미터는 나가 떨어지게 싸대기를 가겼죠. 그리고 중학교를 가장 먼 지역으로 배정해 버렸지요. 이런 일이 결국은 인생 전체를 좌우하게 되더군요 ㅎㅎㅎ
그런데 저도 60년 생인데 우리 나이대가 인구가 많지요 ㅎㅎㅎ
강냉이죽에 사료용 분유도 넣어 주었지요. 그죽한그릇 얻어먹고 싶어 도시락하고 바꿔먹던시절 바꿔먹은 도시락 집으로 싸 갖어갔던 친구가 대한민국에서 누구하면 알정도인 거물급 갑부가 되었다면~~~ 그래도 이웃간에 이웃 사촌 형제의 정이 있었건만 현실은 ~~~ 그립습니다. 정이 이웃에 풋풋한 정 인심이 넘처 흐르던 엣추억 그시절이~~
저는 강냉이죽이 먹고싶어서 도시락 밥이랑 바꿔먹었어요
5-60년대 척박하고 가난한 농촌 시골학교에서는 저축 자체가 없었는것 같습니다 국민학교 졸업식때 누나가 만들어준 예쁜 손수건을 담임선생님께 선물한 기억이 새롭습니다 소담지님의 아련한 옛 추억을 회상하니 어린 그때로 돌아가는것 같아 마음이 마냥 즐겁고 같이 뛰놀던 옛 친구들이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