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지퍼들 (외 2편)
배옥주
지퍼를 열자 여자들이 쏟아진다
입 밖으로 뛰쳐나오는 수다들
아이들이 쏟아지고 남편들이 쏟아지고
루비똥이 쏟아지고 포르쉐가 쏟아지고
엘콘도파사 속으로 다시 빨려가 회오리치는
수다들의 향연
왼쪽으로 저었다가 오른쪽으로 저었다가
도덕이 쏟아지고 애인이 쏟아지고
주상복합단지가 쏟아지고 콘도가 쏟아지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 ‘오후 3시’
나른한 평화가 쏟아진다
저마다 속내 하나씩 지퍼 안에 감추고
벌어진 지퍼를 닫을 줄 모르는 지퍼들
에스프레소를 삼키며 재개발이 쏟아지고
마키아토를 저으며 주식이 쏟아지고
창밖엔 지퍼를 열어
오늘의 갈매기들을 날려 보내는 수평선
원피스 속, 어제보다 뚱뚱해진 욕망을 감춘 채
오후 3시의 지퍼를 열고
우아하게 걸어 나가는 지퍼들의 뒷굽
석류의 방
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들여다보면 여자의 실루엣이 둥글게 몸을 웅크리고 있다 붉은 유태인의 자화상 같은, 밤의 지층마다 여자는 뜨거운 얼음벽을 쌓았다 몇 개의 상실로, 몇 개의 치욕으로, 석류는 익어갔다 들녘 끝 멀어져가는 가을의 등, 창을 열면 캄캄한 분화구 저쪽 새가 날아올랐다 스물한 살, 방 안 가득 새 울음소리만 남아 있다 죽음보다 더 붉은,
물의 집
언니가 죽은 지 열 달 만에
형부는 새장가를 갔다
일 년 만에 만난 그는
물방울 넥타이를 다질링 홍차로 누르고 있다
일곱 살 때 형부로 만난 남자가
눈물 몇 방울로 추억을 버무리는 동안
‘오후의 홍차’ 창가로 흘러내리는 오후
개업행사 치킨집 앞 피에로는
긴 막대기로 비눗방울을 날리고 있다
닿기만 하면 터지는 물의 집
저건 어쩌면 비누의 상처가 살고 있는
투명한 집인지도 모르겠다
외면하고 싶었던 시간들이 남천 열매처럼
창가에 매달려 흔들리는 동안
탁자 밑 젖은 발이 아려온다
두 해 겨울을 건너뛴 부츠가
잊었던 기억을 물집으로 달아준 것일까
분노를 삭힌 걸음을 숨기며
허공을 내려올 때
기어코 물집이 터지고 말았다
뒤축에서 아린 울음이 쏟아져 나왔다
—시집『오후의 지퍼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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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옥주 / 1962년 부산 출생. 2008년《서정시학》등단. 부경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포엠포엠》편집위원.